발해
[ Balhae , 渤海 ]
[네이버 지식백과]발해 [Balhae, 渤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칭별칭
진국(振國), 진국(震國)
지명
고대/남북국/발해
국가, 고대국가
한반도 북부~중국 만주·연해주
정의
698년부터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건국과 성쇠
1. 건국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698년에 건국되었다. 건국의 기폭제가 된 것은 696년에 요서(遼東) 지방의 영주(營州: 지금의 요령성 朝陽)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이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奚族), 말갈족 등이 있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에 겨우 평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에 동조했고,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에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이 때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동참했다.
두 집단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으로 건너왔으니, 이들이 영주에서 말갈족의 거주지인 북방으로 손쉽게 탈출하지 않고 아직 당나라 세력이 남아 있는 동쪽의 고구려 옛 땅으로 돌아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고구려 유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암시하고, 발해 건국이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함에 따라 당나라 군대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이해고(李楷固)로서 거란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에 항복한 인물이다. 그는 먼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고, 이 무렵에 걸걸중상도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대조영이 두 집단을 통합하였고, 당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랴오둥을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해고는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吉林省〕경계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오자, 대조영 집단은 부득이 당나라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행히 이 전투에서 이해고가 대패하여 귀환했다.
대조영은 무리를 수습하여 영주로부터 2천리나 떨어진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다. 발해가 건국된 해는 일본측 기록인『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전해진다. 건국지는 지린성 돈화(敦化)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말갈족의 터전이기에 기록에는 ‘읍루의 옛 땅’에 도읍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조영이 처음부터 건국지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추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었다. 산 위에 성을 쌓아 건국한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서, 건국 당시 방어에 급급했던 절박한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건국 집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영주를 탈출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립적으로 망명자를 통솔했으니,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지휘했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했다. 이때의 규모는 1천 명 가량이었다. 발해를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점차 흡수함에 따라 세력이 날로 불어나 마침내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주도권은 고구려 유민이 쥐고 있었을 것이니, 현전하는 발해인의 성씨 가운데 고(高)씨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발해 왕실과 귀족이 묻힌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서 제일 상층부에 속하는 무덤들에 고구려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실 등에서 증명된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국(振國)’이라 했다. 진국(震國)이란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걸걸중상에게 봉해진 진국공에서 유래해서 추후에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이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서 이때에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고 한 것은 당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비하해 불렀기 때문이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이는 발해국의 귀속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순수한 고구려인도 순수한 말갈인도 아니었으니, 역사 기록에 고구려 별종(別種)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조영 집안은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려 장수를 역임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에는 그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기에는 이미 고구려 유력가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건국 시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통솔할 수 있었다.
건국을 선포한 뒤에 고왕(高王) 대조영(?~719)이 추진한 것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동돌궐(東突厥)에 사신을 파견했고, 역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등 대아찬을 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당나라도 발해에 화해의 몸짓을 보내왔다. 707년경에 당 중종은 장행급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무했고,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했다. 마침내 713년에 당 현종이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함으로써, 비로소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는 거의 매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2. 발전
발해의 발전은 2대 무왕(武王, 719~737)과 3대 문왕(文王, 737~793) 때에 이루어졌다. 무왕 대무예는 즉위 후에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선포하였으니,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왕의 통치기에 동모산에서 현주(顯州, 현재의 지린성 和龍)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복군주라는 사실이다. 그가 즉위한 뒤에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발해 영토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상당수 회복했음을 선언했다. 또 북쪽과 동쪽의 말갈 땅도 복속시켰으며, 남쪽의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도 진출하여 신라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마찰을 야기했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대결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은 발해 세력이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데에 불안을 느끼자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당나라는 이를 호기로 삼아서 726년에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했다. 무왕은 이런 조치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앞뒤에서 협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727년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고립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거란,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동아시아 세력 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任雅)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동생은 당나라에 숙위했던 경험이 있어 당나라에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 수차례 간언하다가 결국 무왕의 분노를 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고, 그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던 차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거란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격퇴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종식된 뒤인 735년에 신라는 그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발해도 735년에 당나라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가 복원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57년간이나 재위한 그는 시호에서 보듯이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택했다가 774년에는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가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된 듯하다. 또 즉위한 직후에 당나라로부터 국가 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국가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건국 초기에 고구려 제도를 많이 따랐던 모습이 사라지고, 당나라 제도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중앙행정기구와 중앙군대, 관리의 등급제도와 복장제도를 마련했다. 지방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체계가 갖추어졌다. 전국에 5경을 둔 것은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수도를 중앙이 아닌 북쪽에 둔 것이나 네 번 수도를 옮긴 것에서는 독자적인 면이 엿보인다.
문왕은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황제국을 지향했다. 그의 존호에 금륜(金輪)이란 단어가 보이는 것은 전자의 증거이고, 황상(皇上),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 용어 등이 사용된 것은 후자의 증거이다. 국력 신장에 따라 당나라는 762년에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하여 책봉했다. 명목적인 것이지만, 이때에 비로소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관계(舅甥關係, 장인과 사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샀다.
그의 시대에는 천도가 잦았다.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년 초에 현주에서 상경(上京, 현재의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천도했고, 780년대 후반에 동경(東京, 현재의 중국 지린성 琿春)으로 천도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에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3. 내분
문왕이 장기간 통치를 한 뒤에 사망하자, 발해는 그 후유증을 앓았다. 동궁이 먼저 사망하여 친척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6명의 왕이 25년 사이에 교체되었으니, 이것은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5대 성왕(成王)은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그의 연호처럼 중흥(中興)을 꾀했지만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대 강왕(康王) 때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798년 발해 국서에서는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고씨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언명했다.
4. 융성
818년 10대 선왕(宣王, 818~830)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의 시대에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은 선왕은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그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넓혔으니,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해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또 남쪽으로 요동지방과 대동강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처음에 ‘사방 2천리’였던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사방의 경계가 확정되었고,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일본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여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였으며, 교류 성격도 더욱 더 상업적으로 변모했다. 이 무렵에 일본이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11대 왕 대이진(大彛震, 831~857)이 즉위한 뒤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왕권이 재차 강화되면서 융성기를 맞이했고,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융성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가 전하지 않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또 9세기 후반 이후 발해 국왕의 계승 관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872년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 유학생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고,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져, 신라를 능가했던 발해의 국력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5. 멸망과 부흥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했다. 거란은 남쪽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서방 세력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서 동방의 발해를 공격해왔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926년 정월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의 내분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이나, 지방의 수령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분해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수도에 동쪽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에는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도 함께 이주시켰다. 이로부터 발해 유민은 금나라 초기까지 200여년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자취를 남기다가 서서히 중국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부는 요나라 또는 금나라 지배층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이들 지배에 저항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에서 일어난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그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 ?~980년대), 원래의 발해 중심지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요나라의 동경에서 일어난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이룬 부류도 있으니, 이들은 멸망 직전부터 들어왔고 때로는 부흥운동이 좌절될 때마다 피신처를 찾아 망명해왔다. 국내의 태씨, 대씨들은 발해 왕실의 후예로서 그러한 망명자의 후손들이다.
<발해의 왕계>
①고왕 대조영(698~719)-②무왕 대무예(719~737)-③문왕 대흠무(737~793.3)-④□왕 대원의(793.3~793?)-⑤성왕 대화여(793?~794)-⑥강왕 대승린(794~809)-⑦정왕 대원유(809~812)-⑧희왕 대언의(812~817?)-⑨간왕 대명충(817?~818)-⑩선왕 대인수(818~830)-⑪□왕 대이진(831~857)-⑫□왕 대건황(858~871)-⑬□왕 대현석(872~894?)-⑭□왕 대위해(895?~906?)-⑮□왕 대인선(907?~926.1)
* ?은 즉위년, 퇴위년이 확실하지 않음
* 10대 왕까지는 즉위년칭원법, 11대 왕부터는 유년칭원법에 따름
정치제도
중앙통치기구의 핵심은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의 3성(省)과 정당성 아래에 설치된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部)이다. 국가의 주요 업무는 여기에서 처리되었다.
이 밖에 1대(臺), 7시(寺), 1원(院), 1감(監), 1국(局)이 있었다. 중정대(中正臺)는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고, 전중시(殿中寺)·종속시(宗屬寺)·태상시(太常寺)·사빈시(司賓寺)·대농시(大農寺)·사장시(司藏寺)·사선시(司膳寺)의 7시는 주로 궁중 업무를 담당하였다. 문적원(文籍院)은 도서 관리를 담당하고, 주자감(胄子監)은 교육을 맡았다. 또한 항백국(巷伯局)은 후궁을 관리했다.
군사제도에는 중앙군대로서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의 10위가 있었다. 각각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을 두었다. 지방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과의도위(果毅都尉), 별장(別將)과 같은 직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나라 부병제도(府兵制度)와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왕실제도로는 성왕(聖王), 기하(基下), 노왕(老王), 태비(太妃), 황후(皇后), 귀비(貴妃), 부왕(副王), 왕자(王子) 등과 같은 호칭 규정이 있었다. 또한 존호(尊號)와 시호(諡號)도 규정에 따라 시행했다.
관료에 관한 각종 등급제도도 마련되어 있었다. 직사관(職事官)을 위한 등급으로 1품(品)에서 9품까지 있었다. 발해에서는 품을 질(秩)이라 불렀다고 한다. 각각 정·종(正從)의 구별이 있었지만, 상·하(上下)의 구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18등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산관(散官)에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문산계로는 자수대부(紫綬大夫), 청수대부(靑綬大夫), 영서대부(英緖大夫), 헌가대부(獻可大夫), 광간대부(匡諫大夫) 등이 있었다. 무산계로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비롯해, 위군대장군(慰軍大將軍), 운휘장군(雲麾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유장군(游將軍) 등이 있었다. 벼슬 등급과 품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에 사용되는 행수법(行守法)도 시행되었으며, 임시직인 검교관(檢校官) 제도도 있었다.
관리의 복장제도로서 3질 이상은 자주색 옷〔紫衣〕·상아홀〔牙笏〕·금어대(金魚袋), 4·5질은 짙은 붉은색 옷〔緋衣〕·상아홀·은어대(銀魚袋)를 착용했다. 6·7질은 옅은 붉은색 옷〔淺緋衣〕·나무홀〔木笏〕, 8·9품은 녹색옷〔綠衣〕·나무홀을 착용했다. 다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에는 이 규정보다 상위의 복장을 착용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상주장(上柱將)처럼 군사적인 공헌을 기리기 위한 훈관(勳官)제도를 시행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발해의 관복제도>
품계 복색 홀(笏) 어대(魚袋)
1~3품 자주색 상아홀 금어대
4~5품 짙은 붉은색 상아홀 은어대
6~7품 옅은 붉은색 나무홀
8~9품 녹색 나무홀
개국공(開國公),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처럼 5등급의 봉작(封爵)제도도 있었다. 이 밖에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 역어(譯語), 사생(史生), 천문생(天文生), 의사(醫師), 수령(首領), 뱃사공 등으로 임시조직이 편성되었다.
지방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 및 다수의 현(縣)을 두어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현의 명칭은 일부만 알려져 있다. 5경은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15부 가운데에서 중요한 거점에 설치했다. 62주 가운데에는 3개의 독주주(獨奏州)가 있었으니, 중간에 있는 부를 거치지 않고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부에는 책임자로 도독(都督)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이러한 지방행정제도는 영토 범위가 확정된 9세기에 들어와서 완비되었을 것이다. 건국 직후에는 여기저기 산재하던 여러 촌(村)을 크기에 따라 대촌, 소촌 등으로 구분해 다스렸다. 이들에 대한 통치의 실권은 현지의 토착 지배자인 수령(首領)이 쥐고 있었다. 8세기 중반경에는 약홀주(若忽州), 목저주(木底州), 현도주(玄菟州)와 같은 고구려식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한 예도 보인다.
중앙과 지방의 발해 관제는 주로『신당서』발해전에 나타난다. 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이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 온 9세기 전반경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관제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니, 11대 왕 때에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발해의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당나라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동일 시기의 신라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을 띤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만큼 발해의 전통적 기반이 미약했음을 반영한다.
물론 당나라 제도를 따르기는 했으나, 명칭이나 운영에서 독자적인 면도 보인다. 예를 들면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은 선조성의 장관인 좌상(左相)이나 중대성의 장관인 우상(右相)보다 상위였다. 3성 가운데 실행기관인 정당성(政堂省)에 권한이 집중된 것이니, 정책기관을 우위에 두었던 당나라나 고려와 대비된다. 6부 명칭으로 충부(忠部), 인부(仁部) 등 유교 덕목을 사용한 것도 독특한 것으로서, 일본의 관제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해는 정치제도의 운영에서 황제국가의 체제를 그대로 따르기도 했다. 발해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왕을 황상(皇上)으로 불렀고, 왕비를 황후(皇后)라 불렀으며, 발해 왕의 명령을 조(詔)라 칭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발해는 대외적으로 왕국이면서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인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체제는 그 뒤에 고려에서도 활용되었다.
강역과 행정구역
1. 강역
발해 영역은『구당서(舊唐書)』발해말갈전과『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사방 2천 리에 이른다고 했고,『신당서』발해전에서는 사방 5천 리에 이른다고 했다. 양자의 차이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니, 사방 5천 리는 융성기인 9세기의 상황이고, 사방 2천 리는 건국 직후의 상황이다. 발해는 통일신라보다 대략 4~5배, 고구려보다 1.5~2배 정도 큰 영토를 지녔다.
영토는 건국 및 발전기, 융성기에 확장되었고, 내분기와 멸망기에 축소되거나 상실되었다. 727년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蕃國)을 병합해서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남쪽과 서쪽으로 진출하여 옛날 고구려와 부여의 중심지를 수복했다는 말이 된다. 사실 732년에 발해 수군이 당나라 등주를 공략한 것은 이때에 이미 압록강 수로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쪽과 동쪽의 말갈 땅도 공략했으니, 736년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친 것은 그 사이에 있던 말갈 집단을 이미 손아귀에 넣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리하여 흑수말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말갈족이 복속되었으니, 문헌에도 “영토를 크게 개척하자 동북쪽의 여러 오랑캐가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고 적었다.
신라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721년 7월에 신라가 하슬라도(何瑟羅道, 현 강릉)의 장정 2천 명을 동원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은 것은 발해의 남진에 대응한 것으로써, 이때에 이미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또 735년에는 신라가 김사란(金思蘭)을 파견하여 패강(浿江, 대동강)에 수자리를 둘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니, 이 또한 대동강까지 미친 발해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무왕의 뒤를 이어 문왕 때에도 말갈 정복이 계속되었으니, 8세기 중반에 철리부(鐵利部), 불열부(拂涅部), 월희부(越喜部), 우루부(虞婁部) 등이 복속되었다. 문왕 전반기에 오늘날의 연해주 땅도 발해로 편입된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이 일단락되었다.
8세기 말 내분기가 도래하면서 일부 말갈 부락은 발해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했으니, 우루말갈과 월희말갈이 802년에 당나라에 독자 조공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강왕이 즉위 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영토가 처음과 같이 되었다”고 한 것은 저간의 이탈 사정을 암시해준다.
선왕이 즉위하면서 재차 영역을 회복했으니, 월희말갈을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을 통제했으며, 남쪽으로 요동지방과 한반도 서북부 쪽으로 다시 진출했다. 이리하여 선왕 시대에 발해의 대외 정복활동이 마무리되고, 9세기 전반에 비로소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10세기 초에 들어서 요동지방을 거란에 빼앗기고, 그동안 지배해오던 보로국(寶露國)이나 달고(達姑)와 같은 집단들이 이탈해나가면서 멸망 때까지 영토가 축소되어갔다.
전성기의 강역은『신당서』발해전에 “남쪽은 이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접했고, 동쪽은 바다까지, 서쪽은 거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대체로 만주의 동부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서쪽으로 요동반도에 이르는 만주 중부 지역, 남쪽으로 대동강과 용흥강(龍興江)을 잇는 선, 동쪽으로 연해주 남부 일대, 북쪽으로 송화강(松花江)까지 포괄하였다.
2. 행정구역과 교통로
발해는 전국에 걸쳐 5경, 15부, 62주 및 다수의 현을 두었다. 5경은 15부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5부를 따로 선정해 주요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과거에 숙신이 있던 곳에 용천부(龍泉府)를 두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남서쪽으로 600리 떨어진 곳에 현덕부(顯德府)를 두었다. 예맥족이 살던 두만강 유역에는 용원부(龍原府)를 설치했는데, 고구려 책성이 있던 곳이어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용원부는 일본과 왕래하던 일본도(日本道)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신라의 국경지대인 천정군(泉井郡)까지 39개의 역(驛)을 설치하였다. 옥저가 있던 곳에는 남해부(南海府)를 두었는데, 신라와 왕래하던 신라도(新羅道)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땅에는 압록부(鴨淥府)를 설치했는데, 강과 바다를 통해 당나라 산동반도로 들어가는 조공도(朝貢道)의 중심지였다.
이상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압록부의 5부에 5경이 병치되었다. 그 소재지를 보면, 상경(上京)은 현재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 상경성(上京城), 중경(中京)은 지린성 허룽(和龍) 서고성(西古城), 동경(東京)은 지린성 훈춘(琿春) 팔련성(八連城), 남경(南京)은 함경남도 북청 청해토성(靑海土城), 서경(西京)은 지린성 린장(臨江) 지역으로 비정된다. 지리상으로 보면 각각 북·중·동·남·서에 해당되어 5경의 명칭과 실제 위치가 상호 일치한다. 5경은 문왕 통치기인 760년대 중반경에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설치되었다. 발해 멸망 후 요나라, 금나라에서는 발해를 본받아 5경제도를 실시했다.
나머지 10부는 5경의 주변 지역에 배치되었다. 고구려 영역에 속했던 곳에는 장령부(長嶺府)를 두었다. 장령부는 당나라로 연결되는 영주도(營州道)의 중심지였다. 부여가 있던 곳에는 부여부(扶餘府)와 막힐부(鄚頡府)를 두었다. 부여부에는 항상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게 했다.
읍루(挹婁) 지역에는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를 설치했다. 읍루는 아마 우루말갈(虞婁靺鞨) 지역이라는 의미의 우루(虞婁)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솔빈말갈(率賓靺鞨) 지역에는 솔빈부(率賓府)를 두었다. 불열말갈(拂涅靺鞨) 지역에는 동평부(東平府)를, 철리말갈(鐵利靺鞨) 지역에는 철리부(鐵利府)를, 월희말갈(越喜靺鞨) 지역에는 회원부(懷遠府)와 안원부(安遠府)를 설치했다.
15부 아래에는 62주가 있었으나『신당서』발해전에는 60개만 나열되어 있다. 따라서 누락된 두 개의 주로서『요사(遼史)』지리지에 보이는 집주(集州), 녹주(麓州), 빈주(賓州)나,『요사』태조본기에 보이는 신주(愼州) 등이 거론된다.
62주 아래에는 상당수의 현이 있었다. 모두 몇 개의 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00∼250개쯤으로 추정된다.『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일부 주(州)가 군(郡)으로도 불린다. 이것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행정체계가 일부 변경되었음을 반영한다.
발해에는 5개의 주요 대외교통로가 있었다.『신당서』발해전에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일본도에 속한다. 남해부는 신라도에, 압록부는 조공도에, 장령부는 영주도에, 부여부는 거란도에 속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동경용원부는 일본으로 가는 거점이니, 동경 관할의 염주(鹽州, 현재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서해안에 도착했다. 남경남해부는 신라로 가는 거점이니, 이곳에서 출발하여 국경인 이하(泥河)를 건너 신라의 천정군을 거쳐 신라 왕경으로 들어갔다. 서경압록부는 조공하는 경로이니, 여기서 압록강에 배를 타고 내려간 뒤에 해로로 요동반도의 연안을 따라 여순(旅順)에 도착했다. 여기서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따라 발해만을 횡단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상륙한 뒤에 육로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향했다. 발해에서 당나라로 향하는 또 하나의 통로로서 영주로 가는 육로가 있었다. 휘발하 유역의 장령부에서 요령성의 무순, 심양을 거친 다음 요하를 건너 영주에 도달했는데, 조공도에 비해 활용도가 낮았다. 거란도는 부여부가 있던 농안(農安)에서 서쪽의 거란 거주지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이밖에 상경성에서 북쪽으로 목단강 상류와 송화강 하류를 거쳐 흑수말갈과 왕래하였다.
<발해의 15부와 그 속주 및 독주주>
15부(府) 속주(屬州)
용천부(상경) 용주, 호주, 발주
현덕부(중경) 현주, 노주, 철주, 탕주, 영주(숭주), 흥주
용원부(동경) 경주, 염주, 목주, 하주
남해부(남경) 옥주, 정주, 초주
압록부(서경) 신주, 환주, 풍주, 정주
장령부 하주(瑕州), 하주(河州)
부여부 부주, 선주
막힐부 막주, 고주
정리부 정주, 반주(심주)
안변부 안주, 경주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
동평부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철리부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회원부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안원부 영주, 미주, 모주, 상주
독주주 영주, 동주, 속주
기타 집주, 녹주, 빈주, 신주 가운데 2개 주
사회구성
발해 사회는 소수의 고구려계와 다수의 말갈계로 구성되어 있었다.『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는 발해 초기의 지방사회 모습을 전하는 구절이 있으니,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인데, 주(州)·현(縣)과 관(館)·역(驛)이 없다. 곳곳에 촌락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은데, 토인이 모두 촌장이 된다. 큰 촌락의 지배자는 도독이고, 그 다음 크기의 지배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지방사회에서도 토인으로 불리는 고구려계 인물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말갈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송막기문(松漠紀聞)』에 “왕은 옛부터 대(大)를 성으로 삼았고, 유력한 성씨로는 고(高)·장(張)·양(楊)·두(竇, 賀의 잘못인 듯)·오(烏)·이(李)로써 몇 종에 불과하다. 부곡과 노비, 성이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의 성을 따른다”고 했다. 따라서 왕족으로 대씨가 있었고, 중앙의 유력한 귀족에는 고·장·양·하·오·이씨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일반 귀족으로서 왕(王)·모(慕)·해(解)·여(茹)씨 등과 같은 50개 가까운 성씨들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신라계로 보이는 박(朴)·최(崔)씨도 포함되어 있다.
유력 귀족 가운데에서는 고구려계인 고씨가 핵심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발해인은 유민까지 합쳐서 모두 380명이다. 왕족인 대씨가 11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고씨가 63명이고, 왕씨가 30명, 장씨가 20명, 양씨가 8명, 오씨가 13명, 이씨가 21명, 하씨가 4명 등이다. 이들 왕실과 유력귀족이 전체 발해인의 65%를 차지한다. 대조영이 어느 계통의 인물인지 논란이 있으니 제쳐두고 신하들만을 분석하면 고씨가 전체에서 47.5%를 차지한다.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그 아래에는 수령(首領)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독립적인 세력을 지닌 지방의 지배자로서,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일본에 파견되는 중앙정부의 사신단에 붙여서 따로 사신을 파견하는 경우도 있다.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 출신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수령은 말갈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수령 아래에는 말갈족이 대다수인 평민층이 있었고, 부곡(部曲)과 노비가 천민층을 이루었다.
종족적으로 이원적인 발해의 사회구성은 말기에 이르러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국인들이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분리된 것은 바로 과거의 고구려계인과 말갈인들이 멸망 시까지도 상호 융합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경제
1. 산업경제
발해의 경제와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발해는 매우 추운 지역이라서 논농사〔水田〕에 적합하지 않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신당서』발해전에 특산물이 나열되어 있다. 백두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마포, 옥주의 면포, 용주의 명주, 철주 아래 위성현의 철, 노성 즉 노주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주 아래 환도현의 오얏, 악유(樂游) 즉 낙랑현의 배 등이 있다. 이를 통하여 농업, 방직업, 목축업, 어업, 광업 등이 주된 산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나라와 일본에 보낸 물품으로 각종 짐승 가죽, 인삼이나 꿀·사향과 같은 약재, 구리와 같은 광산물이 들어 있어서 수렵업, 임산업 등의 면모나 외국과의 무역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을 통하여 도자기(陶磁器) 제조나 제련과 관련된 수공업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유민에 관한 기록이지만 송나라 왕증(王曾)은 발해인들이 철을 제련하는 것을 목격하여, “유하관(柳河館)에 이르렀다. 유하는 유하관 옆에 있다. 서북쪽에는 야철하는 곳이 있는데, 발해인들이 많이 산다. 유하에서 모래와 돌을 걸러서 제련하여 철을 생산한다”고 적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 발해의 경제는 1차 산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수준이나 질에서 낮은 편이었다. 반면에 당나라나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는 물품들은 문방구, 그릇, 옷감 등이 중심을 이루면서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이용되었다.
2. 대외교류
발해는 다섯 개의 주요 대외교통로를 통하여 당나라, 일본, 거란, 신라 등과 교류하였지만, 구체적인 교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 및 일본과의 관계이다.
발해는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발해는 당나라 및 그 후속국가들에 145회 이상 사신을 파견하였고, 중국은 16회 정도 사신을 보냈다. 이러한 조공-책봉 관계는 당나라에 대한 정치적 예속성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국가가 아닌 당나라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봉을 받은 당나라 주변국 지배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은데, 이 모두를 독립된 지배자가 아니라 당나라 관리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당나라는 발해를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로 삼았지만, 이것만으로 당나라 지방행정단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없다. 당나라는 800여개의 기미부주(羈縻府州)를 설치했으니 이를 모두 당나라 영토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이 조공-책봉 관계나 기미주를 근거로 발해가 독립국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정치적 교류 과정에서 경제적 교류도 진행했다. 713년 12월에 발해 왕자가 당나라에 도착하여 시장에서 교역할 수 있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발해가 당나라 조정에 보낸 물품은 대부분 지방 특산물로서, 호랑이·해표·담비·곰 등의 가죽, 말·매 등의 짐승, 물고기·마른 문어·다시마 등의 해산물, 인삼·잣·백부자(白附子) 등의 약재, 여자·아이·노비 등의 사람 따위가 있다. 그 답례로 당나라에서는 비단이나 옷가지, 금·은 그릇 등을 내려주었다.
발해 조공도의 경로이면서 발해관(渤海館)이 있던 산동 등주(登州)를 중심으로 조공과 무관하게 당나라와 무역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은 839년에 발해 교역선이 바닷가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당나라 후반에 득세했던 지방세력과도 말, 구리 등을 교역한 기록이 전해진다.
발해는 일본에 35회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은 13회 파견했다. 일본과의 교류는 처음에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뒤에는 점차 상업적으로 변했다. 825년 12월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 이들이 실제로는 상인들이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손님으로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상인들을 맞아들여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없다고 신하가 건의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과 교역한 것을 보면, 발해에서는 담비·표범·곰 등의 가죽, 인삼이나 꿀 같은 약재 등을 보냈고, 일본으로부터는 비단·면포·실 등의 옷감, 황금, 수은, 칠(漆), 부채 등을 들여왔다. 크게 보면 발해의 모피와 일본의 섬유가 교환되는 형식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물품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었다. 일본에서는 798년에 6년에 한 번씩 사신을 파견하길 요구했고, 824년 6월에는 12년에 한 번 파견하도록 조처했다. 또 828년에는 사사로운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했다.
문화
1. 유학
유학이 발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3대 문왕 시대이다. 물론 714년 학생을 파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건국 초기부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짐으로써 유학이 발해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 것은 문왕의 문치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문왕은 즉위한 다음 해인 738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당례(唐禮)』,『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를 구했다.『당례』는 유교에 입각한 국가 규범을 담고 있던『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의미한다. 이러한 서적들은 궁중도서를 관장하던 문적원(文籍院)에 소장되었을 것이고, 주자감(胄子監)에서는 이를 교재로 삼아 자제들을 교육시켰을 것이다.
발해의 여러 제도를 살펴보면 유학과 관련된 명칭들이 다수 보인다.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항백국(巷伯局)의 항백은『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 덕목을 6부의 명칭으로 삼은 것은 유학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실증해준다. 문왕의 존호(尊號)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도 불교 용어와 함께 효감(孝感)이란 유교적 단어가 들어 있다.
발해 지배층에 유학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사실은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두 묘지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묘지문은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해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소양을 엿보게 한다. 묘지에 인용된 경전만 해도『상서(尙書)』,『춘추(春秋)』,『좌전(左傳)』,『시경(詩經)』,『역경(易經)』,『예기(禮記)』,『맹자(孟子)』,『논어(論語)』등이 있다.
문왕 이후로 발해 사회에 유학이 크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 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우선 발해인의 이름이다. 왕 이름인 대원의(大元義), 대언의(大言義), 대명충(大明忠), 대인수(大仁秀), 공주 이름인 정혜(貞惠)와 정효(貞孝), 귀족 이름인 대의신(大義信), 대성경(大誠慶), 대성신(大誠愼) 등에는 유교의 덕목들이 들어 있다.
다음은 외국에 오고간 국서(國書)이다. 국서는 비록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왕에 대한 평가에는 어느 정도 실상을 보여 주는 일면도 있다. 특히 제10대 선왕이나 제11대 대이진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선왕은 일본으로부터 “신의로 본성을 이루고, 예의로 입신하였다(信義成性, 禮儀入神)”, “세속에는 예악을 전하고, 가문에는 의관을 이었다(俗傳禮樂, 門襲衣冠)”, “믿음은 금석과 같이 확고하고 절개는 소나무·대나무처럼 곧다(信確金石, 操貞松筠)”는 말을 들었다. 대이진은 중국으로부터 “대대로 충정을 이어받았고, 사람 됨됨이는 인후에 바탕을 두었다(代襲忠貞, 器資仁厚)”는 평가를 얻었다. 이러한 두 가지 정황을 통해 유학이 발해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2. 한문학
발해인들이 문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는 고원고(高元固)와 관련된 글에서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다. 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 과거시험에 함께 급제한 서인(徐夤)을 만나러 민중(閩中, 福建省 福州)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그가 지은「참사검부(斬蛇劍賦)」,「어구수부(御溝水賦)」,「인생기하부(人生幾何賦)」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병풍에 금으로 써놓았다는 말을 전했다. 이들이 급제한 것이 892년이므로 그 시기는 10세기 초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발해인의 문학작품은 극소수만 전해진다. 여기에는 문장과 시가 있다. 문장에는 사적인 것보다 외교와 관련하여 국가 사이에 오고간 공식 문서들이 중심을 이룬다. 문장 형식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변려문이 대부분이지만 산문도 있다.
발해는 당나라·일본·신라·거란·돌궐 등의 이웃 나라들과 외교 교섭이 있었지만, 당나라 또는 일본과 오간 것만 전해진다. 발해에서 당나라에 보낸 것이 1편,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것이 23편이다.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145차례 이상이지만, 발해가 당나라에 보낸 문서로는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하정표(賀正表) 1편만 있다.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23편의 문서 가운데에서 발해 국왕이 보낸 것이 16편이고, 발해 중대성이 일본 태정관(太政官)에 보낸 관청 문서가 7편이다. 이들은 외교 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대부분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져 있다. 이 밖에도 배구(裴璆)가 동단국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 조정에 사과하는 글을 올린 것이 있다.
이상은 외교와 관련된 문장들이지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쓰인 문장도 없지는 않다. 그 하나는 발해 승려인 정소(貞素)가 영선(靈仙)의 죽음을 애도해 지은 시에 붙인 서(序)가 있다. 또 하나는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문이다. 이들은 서(序)와 명(銘)을 갖추어 당나라의 전형적인 묘지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3대 문왕의 배우자인 효의황후(孝懿皇后) 및 9대 간왕의 배우자인 순목황후(順穆皇后) 묘지도 발굴되었다.
발해인의 시는 정소가 중국에서 지은 1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이 지었다. 일본 문인들과 시문을 교환했던 발해 사신으로는 758년에 파견된 부사 양태사(楊泰師), 814년에 파견된 대사 왕효렴(王孝廉)과 부사 고경수(高景秀) 및 녹사(錄事) 석인정(釋仁貞) 등이 있다. 또한, 858년에 파견된 부사 주원백(周元伯), 871년에 파견된 대사 양성규(楊成規)와 부사 이흥성(李興晟), 882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裴頲), 894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 907·919·929년에 파견된 대사 배구(裴璆)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문장에 조예가 있는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양태사 2수, 왕효렴 5수, 석인정 1수, 석정소 1수로서 모두 9수이다. 오언율시 2수, 칠언고시 1수, 7언절구 6수로서 발해인들이 7언시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내용으로는 멀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향수를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일본 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도 있다. 고국을 그리는 시로서 양태사의「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라는 서정적인 시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가을밤에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고국에 있는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일본 조정에서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는 왕효렴의「봄날에 비를 보고 정자(情字)를 얻어 지음」이란 시가 있다.
발해 멸망 뒤에 유민으로서 문학 작품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인물로서 요나라 때의 천조제 문비 대씨(天祚帝 文妃 大氏), 금나라 때의 왕준고(王遵古)·왕정견(王庭堅)·왕정균(王庭筠)·왕만경(王萬慶) 집안, 고간(高衎)·고헌(高憲) 집안, 장여위(張汝爲)·장여능(張汝能) 형제 등이 있다.
발해에 한자 이외에 고유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구당서』발해말갈전에는 “문자와 서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와에 찍혀 있는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들도 있어서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고유문자를 사용한 문장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해인이 남긴 묘지문이나 시문은 한자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현재로서는 발해에 고유문자가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불교 및 기타 종교
발해에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가 있었다. 이것은 건국하던 해에서 멀지 않은 713년 12월 당나라에 갔던 발해 왕자가 절에서 예배하기를 청했던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발해 불상 상당수가 당나라보다 이른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절 지붕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의 연꽃 문양이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니, 이것은 발해 불교가 같은 시대에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과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이 많다는 것을 증언해준다.
발해 불교가 발전기에 접어든 것은 제3대 문왕 시기이다. 그의 존호에 ‘금륜’과 ‘성법’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다. 특히 금륜이란 용어에서 문왕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지향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문왕대에 조성되었던 상경(上京), 중경(中京), 동경(東京) 주변에 절터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의 딸인 정효공주 무덤 및 그 앞에서 발굴된 10호 고분은 무덤 위에 탑을 세운 독특한 양식이다.
9세기에 들어와 불교가 융성하면서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발해 승려로서는 석인정(釋仁貞, ?∼815), 석정소(釋貞素, ?∼828), 살다라(薩多羅), 재웅(載雄)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석인정과 석정소이다.
석인정은 희왕(僖王)대의 인물로서, 814년 녹사의 직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병사했다. 그는 시를 잘 지었으니, 일본에서 지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기록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승려는 석정소이다. 그는 희왕대부터 선왕대까지 활동했다. 일찍이 당에 유학해 813년 가을에 일본 유학승 레이센〔靈仙, ?∼828〕을 만나 사귀었다. 그 후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간 레이센과 일본 조정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신과 물건을 전해 주는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다가 828년에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귀족층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활동이 보인다. 762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예불하였던 사실을 보여 주는 고문서가 전해진다. 그리고 814년 사신으로 갔던 왕효렴(王孝廉)은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쿠우카이〔空海, 774∼835〕와 시문을 나누었다. 861년 사신으로 갔던 이거정(李居正)이 일본에 전해 준 다라니경(陀羅尼經)도 전해진다. 814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고예진(高禮進)이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치기도 했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927년 3월에 들어온 승려 재웅이 포함되어 있다. 발해 불교의 명맥은 요동 지방에서 활발히 이어졌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에 유민들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현재의 요양(遼陽) 지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 전통은 금나라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고, 발해 유민들이 금나라 황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발해의 불교 유적으로는 절터와 탑터, 불상, 사리함 등이 있다. 절터는 모두 40곳 정도가 확인되었다. 주로 통치의 중심지였던 5경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불교가 지배자를 중심으로 숭배되었을 것이다.
탑으로는 영광탑(靈光塔)만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탑이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만 아니라 정효공주 무덤탑처럼 일반 무덤 위에 세워진 경우도 있다.
불상으로는 금불, 금동불, 동불, 석불, 철불, 전불(塼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있고, 벽화 조각도 남아 있다. 석불로서는 상경성 2호 절터에 남아 있는 석불과 일본 오오하라〔大原〕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함화4년명비상(咸和4年銘碑像)」이 대표적이다. 발해 불상의 전형을 이루는 것은 전불이다. 이들은 크기가 10㎝ 내외로 아주 작으며, 틀빼기를 해서 구웠다.
형식면에서는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 미타정인여래좌상(彌陀定印如來坐像), 2불병좌상(二佛竝坐像), 3존불(三尊佛), 5존불(五尊佛) 등이 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발견되는데, 상경 지역에서는 관음상(觀音像), 동경 지역에서는 2불병좌상이 주축을 이룬다. 이것은 지역적으로 관음신앙과 법화(法華)신앙이 각기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이 밖에 발해인의 종교로서 기독교 일파인 경교(景敎)가 들어왔던 흔적이 일부 보인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을 것이다.
4. 미술과 공예
발해의 회화에 관해서는 원나라 때에 편찬된『도회보감(圖繪寶鑑)』에 대간지(大簡之)가 소나무와 돌 및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간지를 발해인이라 하면서도 금나라 항목에 넣은 점으로 보아, 금나라 때에 활동한 발해 유민으로 보인다.
발해시대의 그림으로는 정효공주 무덤과 삼릉둔(三陵屯) 2호묘의 벽화가 대표적이다. 정효공주 무덤에는 널길과 널방의 3벽에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그려진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樂師)·시종(侍從)을 통해 공주의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다. 널받침〔棺臺〕남쪽 측면에도 백회 위에 그린 사자머리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다.
인물 표현을 보면 하얗게 칠한 얼굴은 둥글고 크며 살이 쪄서 풍만하다. 눈은 작고 눈썹은 가늘며 코가 낮다. 뺨은 둥글며 붉은 입술은 작고 동그랗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대체로 당나라 풍격을 반영한다.
이 벽화는 발해인의 복식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머리에는 높은 상투를 틀고 복두나 말액(抹額)·투구를 썼다. 몸에는 단령포나 갑옷을 입었다. 단령포는 깃이 밭아서 목둘레선에서는 속옷이 보이지 않는다. 허리 아래에서 옆으로 트인 옆트임을 통해 속에 입은 중단(中單)·내의(內衣)·고(袴)가 드러난다. 소매에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고, 옷자락이 발등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 겉옷에는 여러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겉옷의 색깔은 갈색·붉은색·짙푸른색·흰색·자색 등이 있는데, 동일한 직분인데도 옷 색깔이 각기 다른 점으로 보아서 관복 규정에 따른 것은 아닌 듯하다.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고 신발은 검은 가죽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삼릉둔(三陵屯) 2호묘의 널방〔玄室〕과 널길〔羨道〕의 벽 및 천장에도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이 무덤에는 인물과 함께 꽃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정효공주 무덤 벽화와 조금 다르다. 인물 그림은 널방 동·서쪽 벽에 각각 4명, 북쪽 벽에 3명, 남쪽 널길 입구 좌우에 각각 1명, 널길 동·서쪽 벽에 각각 무사 1명씩 도합 15명이 그려져 있지만 훼손되었다. 널방 천장과 널길 천장에는 꽃 그림이 있다. 삼각고임한 천장에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꽃이 가득 그려져 있다.
이밖에 함경북도 화대군 금성리 고분에서도 사람의 다리 등이 묘사된 벽화편이 발굴되었다. 상경성에서 발굴된 절터에서도 꽃이나 천불도(千佛圖)가 그려진 벽화편들이 발굴되었으며,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절터에서도 번개무늬와 직물무늬가 섞인 벽화편이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벼루 위에 복두를 쓴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것도 있다.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도자기·기와·벽돌·금속 세공품 등이 있다. 상경성 2호 절터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石燈)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돌사자상(石獅子像)으로 대표적인 것은 정혜공주 무덤에서 출토된 두 개의 화강암 사자상이다. 이들은 당나라의 돌사자보다 크기가 작지만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조각품에 속하는 것으로는 이 밖에 귀부(龜趺)·그릇 다리·묘지석(墓誌石) 등이 있다. 현무암으로 만든 귀부는 1976년 상경성에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그릇에는 다리에 짐승머리가 조각된 것도 있다. 길게 내민 혀가 바닥에 닿고 머리로 그릇의 몸을 떠받들게 되어 있어서 발해 예술품의 하나로 삼을 수 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석의 경우는 모두 규형(圭形)으로서, 앞면에는 해서체로 묘지문이 음각되어 있다.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그릇으로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가 있다.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발해인들이 주로 사용한 것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이다. 이들은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바탕흙이 거칠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홍갈색·회갈색·황갈색이 많고 색깔이 고르지 못하다. 손으로 빚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말갈계 도기들이고, 이른 시기에 많이 보인다. 둘째, 바탕흙에 모래가 섞인 것이 줄어들고 물레를 사용한 것이 많아지며 회색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주로 고구려계 도기들이다. 그릇 표면에는 다양한 문양들을 누르고, 찍고, 새기고, 덧붙여서 장식했고, 일부에는 글자들을 새기거나 찍었다. 이들은 중·후기에 많이 보인다. 셋째, 유약을 바른 도기로서, 구운 온도가 높고 바탕이 희고 단단하다. 유약으로 삼채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를 생활 용기로 많이 사용한 것은 통일신라가 장례용으로 많이 사용한 것과 대비된다. 화룡 북대(北大)고분군에서 삼채 도기, 화룡 석국(石國)고분군과 용해고분군에서는 삼채 도용, 삼릉둔 4호묘에서는 삼채 향로가 각각 발굴되었다. 자기는 수량이 아주 적은데,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완(白磁碗)과 자색관(紫色罐) 등을 들 수 있다.
발해 도기는 세 가지 문화를 반영한다. 첫째, 말갈 전통을 담은 것으로서 입술이 두 겹이고 몸통이 긴 통형관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계통의 단지에는 일반적으로 톱날같은 융기문이 덧붙여져 있다. 둘째, 고구려 풍격을 지닌 것으로서 상경성에서 발견된 입이 나팔처럼 벌어지고 몸통에 가로띠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삼채 그릇이나 자기는 당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기는 수량이 아주 적고 그마저 조각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 사발과 자색 단지가 있다. 호리병도 있는데 갈색 교유(絞釉)를 흐르는 구름이 에워싸듯이 생동감 있게 처리했고, 바닥에는 먹으로 ‘함화(咸和)’라는 발해 연호가 쓰여 있다. 발해 그릇이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던 사실은『두양잡편(杜陽雜編)』에 나온다.
다음으로 기와와 벽돌이다. 발해 기와에는 암키와·수키와·치미·용면와(龍面瓦)·기둥밑장식〔柱礎裝飾〕등이 있다. 이들 기와에는 유약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유약은 녹유를 바른 것이 대부분이고, 자색 유약을 바른 것도 일부 있다.
암키와의 겉에는 새끼줄 무늬·그물 무늬·마름모꼴 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다. 안쪽에는 포목 무늬가 많으며, 가장자리에는 손가락으로 누른 무늬나 연주문(連珠紋) 또는 톱날 무늬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수키와는 막새기와가 대표적이다.
수막새의 문양으로는 연꽃잎 무늬가 주종을 이룬다. 고구려 전통을 강하게 띠면서 발해 고유의 양식을 드러낸다. 연꽃잎은 대체로 양식화되어 있는데, 잎의 숫자는 6개가 기본을 이루면서 4개에서 8개에 이른다. 연꽃잎 사이에 장식을 넣은 것이 매우 특징적인데, 연해주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절터에서는 봉황새를 부조해 넣은 것이 발굴되었다. 발해 기와 가운데에는 문자를 찍거나 새긴 것이 다수 있다.
건물에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는 기와에는 치미·용면와·기둥밑장식 등이 있다. 치미는 상경성·서고성·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에서, 용면와는 상경성·서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기둥밑장식은 발해에서 독특하게 발견된다.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을 씌워 장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였다.
금속공예품에는 쇠나 구리 또는 은이나 금으로 만든 것들이 많다. 2004년과 2005년에 용해고분군에서 발굴된 13호분과 14호분에서 도굴되지 않은 채 금제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13호분에서는 금팔찌와 금비녀 등이 출토되었고, 14호분에서는 금관 장식, 금판을 붙인 옥대(玉帶)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금관 장식이다. 이것은 길다란 잎사귀가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인데, 가운데 것은 위로 곧게 솟아 있고, 그 양쪽 것은 뒤로 날개를 편 듯이 구부러져 있다. 전체 모습은 고구려 조우관과 매우 닮았다.
814년에는 발해 사신이 당나라에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연해주 아누치노(Anuchino) 구역에 있는 노보고르데예프카(Novogordeevka) 산성은 커다란 수공업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하남둔(河南屯) 고분에서 발견된 순금 세공품은 금 알갱이를 촘촘하게 붙인 누금(鏤金) 수법이 뛰어나다. 또한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제 관장식은 고구려 조익형 관식을 닮아서 고구려 계승성을 실물로 확인해준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부근의 강가에서 발견된 청동용(靑銅俑)은 발해인의 얼굴과 의상을 자세히 보여 준다. 청동으로 만든 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은 상경성, 연해주 우수리스크 등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단히 양식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1975년에 상경성 토대자(土臺子)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四天王像)도 주목된다. 방형의 은합(銀盒) 4면에 양각한 것으로 선이 가늘고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5. 음악과 무용
발해의 중앙 관청에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던 태상시(太常寺)가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일본 기록에 발해 음악에 관한 것이 일부 보인다.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己珍蒙) 일행이 740년 정월에 ‘본국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아마 이 연주를 계기로 발해 음악이 일본에 알려졌을 것이다.
발해 음악이 일본 조정에 전해져 최초로 연주된 것은 749년에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法會)에서다. 이 무렵에 발해 음악이 정식으로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에 속하게 되어, 발해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 수시로 연주되었다.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 음악을 직접 배워 올 필요성을 느껴 유학생을 발해에 파견한 적도 있다. 발해 음악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의 송나라와 금나라에 이어졌다.
송나라에서는 효종(孝宗) 재위 12년인 1185년 3월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금나라에는 발해교방(渤海敎坊)이 있어서 발해 음악이 제도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발해 악기로는 송나라 때에도 사용된 발해금(渤海琴)이 있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정효공주 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3명의 악사 그림을 보면 각기 보자기에 싼 악기를 들고 있다. 보자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기인지 알 수 없지만, 외형으로 보아 박판(拍板), 공후(箜篌), 비파(琵琶)인 듯하다.
음악이 연주될 때에는 춤과 노래가 따랐을 것이다. 발해인들 사이에는 답추(踏鎚)라고 하는 춤도 유행했다. 기록에 따르면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해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했다. 이는 발해에서 백성들 사이에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종의 집단 무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6. 발해문화의 성격
발해문화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초기의 도성(都城) 체제나 고분 양식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발해 불교도 고구려계가 주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뒤에 당나라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 요소가 점차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발해의 각종 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기초로 한 것이며, 벽돌무덤 양식이나 벽화 양식도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기층문화는 말갈문화가 중심이었다.
이 밖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된 요소도 눈에 띠며, 발해인들이 창조한 고유한 요소도 나타난다.
주요 유적
1. 성터와 건물터
성터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 조사는 1933년과 1934년에 일본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동경성(東京城: 지금의 상경성)을 발굴한 것이 최초이다. 그 뒤 많은 성터들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그 중심지였던 만주의 동부 지역에서뿐 아니라 북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도 고루 분포해 있다. 발해 성터에는 평지성, 산성이 있는가 하면, 중심이 되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 차단성도 있다.
성을 쌓는 재료로 볼 때에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평지성은 토성이 대다수이고, 산성은 석성이 대부분이다. 평면은 긴네모모양〔長方形〕·네모모양〔方形〕·부정형 등이 있다.
발해는 전국을 부(경)-주-현으로 설정하여 통치했다. 주요 관청의 소재지에는 성을 쌓아 통치 거점으로 삼았으니, 대체로 도성, 부성, 주성, 현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성으로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 상경성(上京城), 서고성(西古城), 팔련성(八連城) 등이 있다. 성산자산성은 중국 지린성 둔화(敦化)에 있는 초기 도읍지이다. 대조영이 성을 쌓고 도읍으로 정한 동모산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상경성은 헤이룽장성 영안(寧安)에 있는데, 8세기 중반에 문왕이 이곳에 도읍을 옮긴 뒤로 가장 오랫동안 수도가 되었다. 서고성은 지린성 화룡(和龍)에 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일시적으로 도읍을 삼았다. 팔련성은 지린성 혼춘(琿春)에 있으며, 8세기 후반기에 10여년 간 도읍을 삼았다.
부성으로는 청해토성(靑海土城)·소밀성(蘇密城)·대성자고성(大城子古城) 등이 있다. 청해토성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에 있는데, 5경의 하나인 남경 소재지이다. 소밀성은 지린성 화전(樺甸)에 있으며 장령부(長嶺府) 소재지이다.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는 대성자고성이 지목되고 있다.
주성으로는 크라스키노(Kraskino)성·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남성자고성(南城子古城)·남호두고성(南湖頭古城) 등이 지목된다. 크라스키노 성은 연해주 하산(Khasan)에 있는데, 동경 관할의 염주(鹽州) 소재지이다. 남성자고성은 독주주(獨奏州)의 하나인 속주(涑州)의 소재지로 추정된다. 남호두고성은 상경 관할의 호주(湖州) 소재지일 것이다.
발해 성터와 관련하여 고구려 및 당나라 성과 비교해 발해 성의 변화 과정을 언급한 연구가 주목된다. 발해 성은 성산자산성처럼 초기에 산성에 의지했는데, 이것은 환인(桓仁) 오녀산성이나 집안(集安) 환도산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8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한다. 따라서 전체 시기를 놓고 볼 때, 발해의 성은 건국 초기에 고구려 양식을 따르다가 당나라 양식으로 전환했다.
발해시대의 건물로서 궁전이나 관청터 등이 발굴되었다. 절과 탑 자리도 많이 확인되었으며 평민 주거지도 조사되었다. 건물 성격에 관해 논란이 있는 24개석 주춧돌 유적도 10여 곳 발견되었다.
궁전과 관청 자리는 상경성에서 조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2천년대에 들어 서고성과 팔련성에서도 궁궐지가 발굴되었다. 상경성 궁전은 5개의 건물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각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왕이 거처하던 건물지에서는 온돌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온돌을 전해받은 것이다. 관청 자리는 일부만 조사되었다.
이 밖에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어화원(御花園)이라 불리는 궁궐 후원이 있었다. 이곳에는 인공으로 만든 못과 산이 있고 정자터도 확인되었다. 상경성 부근의 목단강에는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오공교(五孔橋), 칠공교(七孔橋)로 불리는 교량 유적이 남아 있다.
한편, 성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도 주거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평민 주택으로 보이는 반지하식 건물지들이 동녕(東寧) 단결(團結)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연해주 일대에서도 성 안팎에서 화덕자리나 온돌 장치가 딸린 반지하식 또는 지상식 주거지들이 발굴되었다. 건물 축조에 사용되었던 기와와 벽돌을 굽던 가마터도 상경성 부근의 행산(杏山)과 크라스키노 성터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발해 건물의 외형은 1987년에 연해주 하산 구역에서 발견된 불판(佛板)에 불상이 안치된 목조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고, 상경성 석등 상부에도 목조 건물이 묘사되어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2. 무덤
고분들은 주로 구국(舊國)의 소재지였던 지린성 돈화, 상경용천부의 소재지로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헤이룽장성 영안 상경성 등에서 발견되었다. 중경현덕부의 소재지인 지린성 화룡 서고성, 동경용원부의 소재지인 지린성 혼춘 팔련성 주변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서경의 관내였던 지린성 통화(通化), 남경의 관내였던 함경남북도 지역, 변방에 해당하는 길림시 지역, 수분하(綏芬河) 유역, 러시아 연해주 남부 지역 등에서도 고분이 발견되었다. 연해주에서는 고분이 매우 적게 발견되었다.
주요한 고분군은 다음과 같다. 돈화에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는 제1구역에 30여 기, 제2구역에 130기가 확인되었다. 1949년에 정혜공주(貞惠公主)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발해 초기의 왕실과 귀족들이 묻혀 있음이 확인되었다.
서고성에 가까운 화룡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도 1980년에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발견되었다. 용두산 고분군은 제일 남쪽의 석국(石國)고분군, 중간의 용해(龍海)고분군, 북쪽의 용호(龍湖)고분군으로 나뉘는데, 정효공주 무덤은 용해고분군에 속한다. 용해고분군에서는 2천년대에 들어 20기의 고분이 확인되어 15기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무덤은 돌방흙무지무덤〔石室封土墓〕9기, 대형 벽돌방무덤〔塼室墓〕2기, 대형 벽돌방탑묘〔塼室塔墓〕2기, 이혈(異穴) 어울무덤〔合葬墓〕한 쌍이다. 이 고분군에서 효의황후 및 순목황후 무덤이 확인되었다.
상경성 부근에서는 왕실 무덤들인 삼릉둔(三陵屯)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벽을 돌려서 왈(曰)자 모양의 능역을 조성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남쪽은 제사구역이고 북쪽은 무덤구역인데, 이 능역에서는 3기가 발굴되었고, 그 부근에서도 1기가 더 발굴되었다. 1호묘는 내부가 드러난 채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고, 2호묘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4호묘에서는 삼채 향로가 발굴되었다.
상경성 부근의 홍준어장(虹鱒魚場) 고분군에서도 1990년대에 고분 323기, 방단(方壇) 7기, 집터〔住居址〕1기를 발굴하고, 유물 1,800여 점을 수습했다. 축조 재료에 따라 석축묘(石築墓), 전축묘(塼築墓), 석전혼축묘(石塼混築墓) 세 가지로 대별되고, 움무덤〔土壙墓〕은 발굴되지 않았다. 제단 시설이 발굴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북한에서는 화대 금성리 고분에서 벽화고분이 발굴되었고, 근래에 연변대학과 공동으로 청진 부거리 고분군을 발굴하여 국내에서 보고서를 출간했다.
연해주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 체르냐티노(Cherniatino) 5고분군에서 159기의 고분이 발굴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연해주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움무덤이 대다수를 이루면서 돌방무덤〔石室墓〕, 돌깐무덤〔敷石墓〕, 돌돌림무덤〔圍石墓〕, 무시설 무덤 등 다양한 고분 양식이 확인되었고, 장법에서도 매장, 화장(火葬), 굴지장(屈肢葬), 단인장(單人葬), 다인장(多人葬), 1차장, 2차장 등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서 주목된다. 지방의 말갈사회에 발해 중앙문화가 침투되어 들어가는 모습을 추적해볼 수 있는 고분군이다.
발해 고분에는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 등이 있다. 흙무덤은 건국 이전부터 유행했던 양식이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널무덤〔石棺墓〕로 나뉜다. 이 중 돌방흙무지무덤〔石室封土墓〕가 최상층의 발해 무덤을 이룬다.
돌을 이용해 무덤을 쌓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돌방흙무지무덤은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인데, 정혜공주 무덤이 대표적이다.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써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정효공주 무덤이다. 이 무덤은 벽을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해 당나라 양식과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 밖에 삼릉둔에서 발견된 고분들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 방식으로 단인장·2인합장·다인합장이 모두 보인다. 2인합장은 부부 매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 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주인공과 배장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예도 있다. 배장자는 적게는 1인에서 많게는 14인에 이른다.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있으며, 한 무덤에서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사람뼈〔人骨〕는 대체로 추가장(追加葬)에 의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는 널〔木棺〕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널 없이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발해 초기에는 육정산 고분군에서처럼 화장도 유행했다. 이것은 시신을 널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운 것이다.
이 밖에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도 출토되었다. 동물뼈로는 말, 소, 개의 뼈들이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릉둔 고분과 하남둔(河南屯) 고분, 용해고분군에서는 흙무지〔封土〕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는 무덤도 발견되었다. 육정산 고분군과 용두산 고분군에서는 흙무지에서 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묘상 건축물 전통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발해사 연구동향
발해의 역사는 한국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발해가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던 일본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발해사는 단순히 한국사의 일부라는 차원이 아닌, 국제적인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있다.
1. 국가별 연구 동향
(1)한국
국내에서의 발해사 연구사를 보면, 조선 후기에 발해사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처음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영토적인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연구는 자연히 韓鎭書)지리고증에 집중되었다. 이 방면의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丁若鏞)·한치윤(韓致奫)·한진서(韓鎭書) 등이다. 이들이 발해사에 대한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다. 따라서 발해사 연구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일제시대에도 실증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단지 장도빈(張道斌)의 연구 정도만 꼽을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발해사 연구는 남·북한에서 각기 재개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용범(李龍範)이 연구를 주도했다. 그는 1960년대에 기왕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한국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 또 1970년대에는 발해의 사회구성과 유민사의 연구에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송기호, 한규철, 노태돈 등이 참여했고, 1990년대에는 새로운 연구자들이 양성되었으며 연구 분야도 다양화되었다.
(2)북한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도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2년 박시형이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다. 문헌에 기초를 둔 그의 주장은 주영헌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게 1970년대 초까지 문헌사와 고고학의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틀이 마련됨으로써, 그 후의 연구들은 이들의 주장을 보강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1970년대에 침체되었던 북한에서의 연구는 1980년대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발해사를 연구하는 기구와 인력이 대폭 확충되었다. 문헌학자로서 장국종, 손영종, 현명호, 채태형, 김혁철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서 김종혁, 리준걸, 김지철 등이 있다. 1980년대에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연구 방향도 특정 주제에 고정되었다. 고구려의 계승성, 그리고 고려에의 계승성에만 너무 집착하는 것이다. 다만 1980년대에 함경도 지역에서 발해 유적들이 속속 확인된 것은 큰 성과이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보고되는 유적 가운데 고구려 것은 평안도에 집중되고, 발해 것은 함경도에 집중되어, 북한의 시대 설정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3)중국
중국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조정걸(曹廷杰), 경방창(景方昶) 등이 역사지리 고증을 하면서 단초를 열었다. 전문적인 연구는 20세기 초에 들어와 당연(唐宴), 황유한(黃維翰), 김육불(金毓黻)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김육불은 발해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들을 망라하여 정밀하게 고증함으로써, 그 후의 발해사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발해사 연구의 침체기였고,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는 1970년대 말부터 다시 발해사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이 무렵에 이미 발해는 말갈족이 주체가 된 지방정권이란 공식이 만들어졌다. 주요 유적이 중국에 속해 있어 고고 연구를 주도하는 입장에 있다. 주요 연구자로는 왕청리〔王承禮〕, 웨이궈중〔魏國忠〕, 주궈천〔朱國忱〕, 류샤오둥〔劉曉東〕, 쑨위량〔孫玉良〕, 웨이춘청〔魏存成〕, 쑨진지〔孫進己〕, 쑨슈런〔孫秀仁〕등이 있다. 또한 조선족 학자로서 방학봉(方學鳳), 정영진(鄭永振), 김태순(金太順) 등이 있다.
(4)일본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특이한 점이 있다. 한국이나 중국, 러시아에서는 자기 역사의 일부로서 발해사를 다루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연구자가 제법 많은 것은 일본의 대외관계사라는 측면과 함께 일제시대에 만주를 지배했던 경험 때문이다.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와 만주 침략과 연계되면서 주로 지리고증과 고고조사에 중점을 두었다.
고고학 성과로서 동경성(東京城, 상경성), 서고성, 반랍성(半拉城, 팔련성) 등을 조사해 발해의 주요 수도들을 처음 확인했던 점은 주목된다. 이 시기에는 도리야마〔鳥山喜一〕, 미카미〔三上次男〕, 고마이〔駒井和愛〕, 사이토〔齋藤優〕, 와다〔和田淸〕, 츠다〔津田左右吉〕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1960년대까지는 소강 상태에 있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전후 세대로 구성된 새로운 연구자들이 등장하였다. 이제는 문헌사가 중심이 되었다. 일본사 전공자로서 이시이〔石井正敏〕, 스즈키〔鈴木靖民〕, 사카요리〔酒寄雅志〕등이 있고, 한국사 내지 중국사 전공자로서 후루하타〔古畑徹〕, 가와카미〔河上洋〕, 이성시(李成市), 하마다〔濱田耕策〕등이 있으며, 고고학자로서 고지마〔小嶋芳孝〕가 있다.
(5)러시아
러시아에서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19세기에 활동한 엔. 야. 비추린(N. Ia. Bichurin) 등에서 이미 나타난다. 그로부터 20세기 전반까지는 연해주의 발해 유적들에 대한 산발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해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이때부터 아. 페. 오클라드니코프(A. P. Okladnikov)와 그의 제자인 에. 붸. 샤프쿠노프(E. V. Shavkunov)가 연구를 주도했다. 1958년에 코프이토(Kopyto) 절터를 발굴하면서 연해주에서의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1960년대에 금나라 유적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발해사 연구가 부진했다.
조사와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이 시기에 새로운 연구자로서 붸. 이. 볼딘(V. I. Boldin), 오. 붸. 디야코바(O. V. D’iakova), 아. 엘. 이블리예프(A. L. Ivliev)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극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학자들과 공동으로 발해 유적을 조사하고 발굴해오고 있다. 공동으로 발굴된 유적에는 마리야노프카(Mar'ianovka) 성터, 크라스키노(Kraskino) 성터, 콕샤로프카(Koksharovka) 성터 등과 같은 성터가 주되며,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절터, 체르냐티노(Cherniatino) 고분군 등도 있다. 이를 매개로 한국과 가장 활발히 교류해오고 있다.
2. 연구 주제
발해사 연구에서 중심을 이루어 온 주제로는 발해사의 귀속(歸屬) 문제, 지리 고증, 대외 관계, 고고 조사 및 연구, 사회 내부의 여러 양상들, 유민 활동 등이다.
(1)귀속 문제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발해사의 귀속 문제이다. 이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말갈계 국가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는 주로 남·북한과 일본의 시각이고, 후자는 중국과 러시아의 시각이다.
(2)지리 고증
그 다음으로 관심을 보인 분야가 지리고증이다. 발해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조선시대 실학자나 청나라 학자들이 처음으로 연구한 부문이 바로 이 분야다. 발해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지나 영역 등이 미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사실이 일차적인 관심이 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첫 도읍지의 위치와 천도 과정, 5경, 대외 교통로, 영역 등이 주요 주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문헌만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다가 20세기 들어 성터들이 다수 발견됨으로써 성터 자료와 문헌 기록이 결합되어 더욱 구체성을 띠었다.
(3)대외 관계
발해의 대외 관계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발해인들이 남긴 사료가 거의 없고 중국, 일본, 신라에서 남긴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연히 대외 관계와 관련된 서술이 중심을 이루는 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4)고고 조사 및 연구
고고 조사와 발굴,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가 수량 면에서 가장 많다. 발해 유적에 관한 체계적 조사는 1933년 동경성(상경성)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일본인들의 조사는 팔련성, 서고성과 같은 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해방이 되면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 육정산 고분군이다. 그 뒤로 중국학자들의 조사는 성터를 비롯해 무덤·절터·가마터 등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5경을 벗어나 지방의 유적에까지 조사가 이루어졌다.
연해주에서도 성터를 중심으로 집터·절터 등에 대한 조사가 병행되고 있다. 연해주에서는 한국학자들과 공동으로 성터와 절터, 무덤 등이 발굴되었다. 북한의 함경도 일대에서도 성터·고분·절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5)사회 구조
발해 사회의 내부 구조를 밝히는 작업은 다른 어느 부문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방면의 연구는 다른 주제보다 뒤떨어져 있고 산발적이다. 이것은 발해 사료들이 대외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서 내부 구조를 밝히는 데에 어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부문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것이 대조영의 출자와 발해인의 종족 구성 문제이다. 이것은 물론 발해사의 귀속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데에 원인이 있다. 이외에도 부진하나마 지방사회, 경제, 정치제도, 문화에 대한 연구도 있다.
다음은 지방사회의 구성과 지방지배제도이다. 특히 지방사회의 지배자들인 수령(首領)의 정체가 무엇이고, 수령과 지방민의 상호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지방의 지배구조가 전시대의 고구려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들이 논의되고 있다.
발해의 경제를 연구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거의 없어서 연구가 매우 취약하다. 정치제도에 관한 연구는 발해의 제도가 당나라 또는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을 뿐이지, 정치 운영의 실상을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문화면에서는 벽화를 중심으로 한 회화와 불상, 그리고 불교·문학·음악·복식·건축·민속과 전설 등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연구도 발해사 귀속 문제와 연관되면서 당나라 문화 요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고구려 문화 요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에 관심을 주로 기울임으로써 발해문화 자체의 해명에는 미흡하다.
(6)유민 연구
마지막으로 발해유민 활동에 관한 연구이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일제시대 일본학자들과 근년의 국내 학자들이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는 발해유민의 향방과 관련해 사민정책, 부흥운동과 요·금 및 고려에서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7)발전 단계
이상과 같은 연구들이 체계적으로 진행된 다음에 과연 발해 사회가 고대국가에 속하는지 아니면 중세국가에 속하는지가 해명될 수 있다. 현재로서 중국에서는 노예제사회냐 봉건제사회냐 하는 사회 성격에 대한 논의가 가끔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봉건제국가로, 러시아에서는 중세국가로 규정해 놓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원시사회에서 중세국가로 바로 이행하면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라가 발해라고 해 ‘초기 중세국가’로 규정한다. 반면에 남한과 일본에서는 고대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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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Balhae, 渤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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