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9] 세종대왕의 비극적인 가족사(1)
정치, 경제, 문화, 국방, 영토, 과학 등 다방면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세종대왕은 단군 이래 수많은 지도자 가운데 아직까지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도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행하고 비극적인 가족사를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8대조는 1170년(의종 24) 정중부와 더불어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인(李隣)이다. 이인은 1174년(명종 4)에 이의방이 살해되자 낙향했는데, 아들 이양무와 손자 이안사 때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즉 8대조 이인-7대조 이양무-6대조 이안사-5대조 이행리(李行里)-고조부 이춘(李椿)-증조부 이자춘(1315~1360)-조부 태조 이성계-부 태종 이방원- 세종대왕 순이다.
세종의 부친인 태종 이방원(1367~1422)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황후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나 여흥민씨 민제의 따님인 원경왕후(1365~1420)와 결혼, 4남(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성녕대군) 4녀(정순공주·경정공주·경안공주·정선공주)를 두었다. 그 후 효빈김씨·신빈선씨 등 11명의 부인에게서 경녕군·함녕군·온녕군·정신옹주 등 8남 13녀를 낳아 총 12남 17녀를 두었다. 조선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과 자녀를 둔 인물로 태종은 기록되고 있다.
세종대왕(1397~1450, 재위기간 31년 6개월)은 이방원이 31세 때인 1397년에 삼남으로 태어났다. 세종이 태어난 다음해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 발생해 세종의 숙부인 방석과 방번이 살해되었다. 세종대왕의 모후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태종이 등극할 때까지 여장부로서 내조를 잘했으나, 태종이 왕위에 등극한 뒤 곁에서 모시는 시녀들만 가까이하여 불화가 잦아지게 되었다. 결국 세종대왕이 14세와 20세때 ‘민무구의 옥’(1410)으로 외삼촌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민무휼·민무회가 사사되어 4명의 외삼촌을 모두 잃는다.
세종대왕은 12세때인 1408년(태종 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ㅋ446)와 결혼했다. 소헌왕후의 조부는 좌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 심덕부이고, 부모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과 순흥안씨다. 세종대왕은 즉위하던 해(1418년)에 장인인 영의정 심온과 처삼촌인 심정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당하고 장모와 처가족 친족들도 관노비가 되는 불행을 겪는다. 한편 동생인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도 세종대왕이 즉위하기 전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사망한다. 세종대왕은 비록 왕이지만 상왕인 태종에 의해 장인과 처삼촌이 죽음을 당하고 장모와 처가족 식구들이 관노비가 되는 상황이 발생해 결국 외가와 처가가 모두 몰락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1419년에는 중부(仲父)인 정종(1357~1419)이 승하한다. 한편, 소헌왕후에 대해서도 폐비(廢妃)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크고, 왕자를 여러 명 출산하였기에 폐비되지 않았다. 세종이 24세때인 1420년에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눈을 감는다.
세종대왕은 태어나서 즉위하기까지의 과정만 보아도 매우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켜보면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성년이 되어서도 매우 힘든 가족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자식들과 손자들의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0] 세종대왕의 비극적인 가족사(2)
(영남일보 2011-10-06 07:57:58)
세종대왕(1397∼1450)은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18남4녀)의 자녀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1395∼1446)에게서 정소공주(1412∼1424), 문종(1414∼1452), 정의공주, 세조(1417∼1468),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 이렇게 8남 2녀를 두었다.
소헌왕후는 18세부터 맏딸 정소공주를 출산하여 20살 때 첫아들 문종, 21살 때 둘째딸 정의공주, 23세때 둘째 아들 수양대군, 24세때 셋째 아들 안평대군, 25세때 넷째 아들 임영대군을 출산해 8년 사이에 무려 6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이후 31살부터 3년 연속해서 다섯째 광평대군, 여섯째 금성대군, 일곱째 평원대군을 출산했다. 이러한 왕성한 자녀 출산은 40살에 막내인 영응대군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실로 대단한 자녀생산력을 보였는데, 요즘 같은 시대라면 정부에서 표창장이나 TV에 나올 만한 기록이다.
한편 세종의 후궁들은 영빈 강씨가 화의군, 신빈 김씨가 6남(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 혜빈 양씨가 3남(한남군·수춘군·영풍군), 숙원 이씨가 정안옹주, 상침송씨가 정현옹주를 낳았다. 세종은 향(문종)이 세자 시절에 두 번씩이나 맏며느리를 내친 적이 있다. 즉‘휘빈 김씨 폐빈사건’과 ‘순빈 봉씨 폐빈사건’이다. 문종은 8살때 세자로 책봉되어 14세때 김오문의 딸(18세)을 취하여 세자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휘빈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의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하거나, 교미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만들어 먹이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가, 후에 이 사실이 탄로가 폐서인이 되었다. 한편 이런 일을 부끄럽게 여긴 김오문은 딸과 부인을 비상으로 자결케 한 후 자신은 무관답게 배를 갈라 최후를 마쳤다.
이후 종부소윤(정4품직) 봉려(奉礪)의 딸이 새로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봉씨는 세자와 동갑이었고 몸집도 작고 유약했지만 겉보기와는 아주 달리 보기 드물게 색욕이 강한 음탕한 여자였다. 동궁에게 만족하지 못하던 세자빈 봉씨는 술중독과 동궁 시비와 ‘조선 왕실 최초의 레즈비언(lesbian: 여성간 동성애)스캔들’을 일으켰다. 결국 세자빈 봉씨는 세자빈이 된지 7년 만에 폐출되었다. 이후 아버지 봉려는 딸을 죽인 후 자기도 스스로 자결하였다.
다시 세종은 세자궁인 현덕왕후를 세 번째 맏며느리로 삼았다. 현덕왕후는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현덕왕후는 정종(鄭悰)에게 시집간 경혜공주를 낳고, 24세 때인 1441년 원손(元孫: 뒤의 단종)을 출생하다가 죽고 말았다.
세종의 맏며느리는 이렇게 세 명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세종의 넷째 임영대군과 여덟째 영응대군의 부인도 병 때문에 내쫓아야 했다. 이때는 병에 걸리는 것도 ‘칠거지악’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또한 세종이 28세때 13살 된 맏딸 정소공주를 잃은 이후 48세부터 50세까지 삼년 연속으로 광평대군·평원대군·소헌왕후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세종의 가족사는 이렇게 슬펐다. 또한 세종 사후에는 장남 문종의 단명과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수양대군이 주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역사인 계유정난(癸酉靖亂)과 ‘단종의 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1] 세종대왕의 비극적 가족사(3)
(영남일보 2011-10-20 08:01:20)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은 세번째 부인인 현덕왕후에게서 비운의 경혜공주와 단종을 두었다. 그외 후비로 귀인홍씨, 사측양씨가 있다. 사측 양씨는 경숙옹주를 낳았다. 단종은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란에 의해 실질적인 권력을 잃고 다음해 정월에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1456년 6월에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비극적인 삶을 산 경혜공주(1436~73)는 7세에 현덕왕후가 죽고 16세에 정종과 결혼하였으나, 그해에 부친 문종이 죽었다. 21세에 동생 단종이 죽고 25세에 남편마저 능지처참 당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정미수는 세조의 왕후인 정희왕후에 의해 보호되어 성종과 같이 살다가 나중에 중종반정의 공신이 되어 부원군에 오른다. 경혜공주는 38세에 요절한다.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계유정란 때 사사된다. 이후 그의 아들 의춘군 이우직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다. 의춘군의 아내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수양대군의 측근인 권람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안평은 조맹부체의 명필로 유명했다. 임영대군은 계유정란 이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을 지지하여 그를 도왔다. 9남2녀를 둔 임영대군은 예종 때의 20대 정승 구성군 준의 아버지였고, 영의정 신승선의 장인이었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신씨는 그의 외손녀였으며, 중종의 첫째부인인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그의 외손자였다. 광평대군은 종조부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에게 입적된다. 20세에 밥을 먹다가 가시에 걸려 요절한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모의해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다가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동복형제들 중 세조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세종의 여덟번째 아들 영응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첫 부인 대방부부인이 쫓겨난 뒤 해주정씨를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세종은 후에 춘성부부인의 동생인 정종을 경혜공주와 혼인시키는데, 이는 영응대군이 단종의 후원세력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세종의 심모원려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를 간파하고 본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응대군을 늘 송현수(대방부부인의 오빠)의 집에 데리고 다녔다. 정난 후에 수양대군의 배려로 영응대군과 대방부부인은 결국 재결합하게 된다. 송씨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의 누이로 단종비 정순왕후의 친 고모이기도 하다.
세종의 후궁자녀들도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에 의해 편이 갈리었다. 단종의 유모역할을 한 혜빈 양씨와 소생들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등은 수양대군과 적대관계였으나, 노비출신으로서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으며 8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고, 후궁 중에서 최고의 자리인 빈(嬪)에까지 올라가 행복하게 살았던 조선판 신데렐라의 주인공인 신빈김씨와 자녀들은 수양대군편으로 현달한 인물이 많다. 수양대군으로 인하여 세종의 자녀들은 골육상쟁의 아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이후 세조와 그 자손들에게는 악업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2] 세조 자손들의 불행
(영남일보 2011-11-03 08:17:16)
수양대군은 12세에 정희왕후(1418∼83)와 가례를 올렸다. 정희왕후는 예종과 성종 재위시 조선에서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동아시아에서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리로 정치를 맡는 일을 말한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 의숙공주, 해양대군(예종) 등 2남1녀를 두었다. 의숙공주는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출가해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고 36세에 요절했다. 최근에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수양의 딸과 김종서 아들의 러브스토리는 야사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허구적인 내용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예종(1450~69)은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1445~61)사이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한씨가 산후병으로 17세에 요절하고 인성대군마저 세 살에 요절한다. 이후 예종은 한백륜의 딸인 안순왕후를 계비로 맞아 제안대군(1466~1525)과 현숙공주·혜순공주를 낳았으나 재위 14개월 만에 사망한다. 제안대군은 후사가 없고, 현숙공주는 갑자사화를 주도한 간신인 임사홍의 며느리가 되어 슬하에 소생은 없고 39세에 요절한다. 혜순공주는 두 살에 요절한다.
세조의 장남인 덕종(1438~57)은 1450년에 한확의 딸 소혜왕후 한씨와 혼례를 올렸다. 덕종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20세로 요절하였다. 사인은 가위눌림이라고 하나 불확실하다. 야사는 의경세자와 세조가 문종비 현덕왕후의 원한을 샀다고 전하나, 덕종은 단종보다 일찍 죽는다. 소혜왕후 한씨는 남편이 요절하는 바람에 시동생인 해양대군이 왕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재위 14개월 만에 예종이 죽는 바람에 권력가인 한명회의 딸(공혜왕후 청주한씨)과 혼인한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장남 월산대군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을 제외시키고 왕으로 등극케 하여 대비로서의 지위를 얻은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주도함으로써 손자 연산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이 되고 만다.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는 월산대군 정(1454~88)과 자을산대군 혈(1457~94), 딸 명숙공주(1455~82)가 있다.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은 승평부부인 박씨와 혼인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35세에 요절했다. 아내 박씨는 연산군과의 추문에 휘말리며 결국 자결하였다. 박씨의 동생은 나중에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으로, 박씨는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의 고모가 되기도 한다. 월산대군은 첩실에서 독자인 덕풍군을 두었으나 역시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덕풍군은 3명의 아들 파림군(坡林君), 계림군(桂林君), 전성부정(全城副正)을 두었다. 그러나 세조의 현손인 파림군은 41세에 죽고, 계림군은 성종의 서자인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을사사화(1545) 당시 역모의 모함을 받아 동생인 전성부정과 함께 처형된다. 명숙공주는 28세에 요절하였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12명의 부인에게서 16남 12녀를 두었으나 38세에 일찍 죽고 만다. 세조의 악업(惡業)은 본인이 희귀한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자손들이 일찍 죽는 결과를 낳았고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이 많았다. 그 당시 백성들은 부당한 권력찬탈로 인한 인과응보의 현상으로 생각하여 수많은 야사(野史)를 생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