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명리학(命理學)으로 풀어 보는 천고일제(千古一帝) 청의 강희제(1)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 축구의 황제 펠레,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 복싱의 황제 무하마드 알리 등 현재는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나 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쓰는 말이 황제(皇帝)라는 칭호이다. 황제는 제국(帝國)에서 군주의 칭호로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통치자 및 그 명칭과 권위를 계승한 여러 군주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처음으로 이 칭호를 사용하여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두 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중국에서 황제(皇帝)라는 명칭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다. 기원전 230년 한(韓)을 멸망시킨 것을 필두로 위, 초, 조, 연, 제나라를 차례로 공격하여 기원전 221년 전국칠웅 가운데 여섯 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에 버금가고, 덕이 오제(五帝)를 능가한다며 삼황오제에서 ‘황(皇)’자와 ‘제(帝)’자를 따 자신을 ‘황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진시황제가 세운 진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고 만다.
이후 중국 황제는 당을 잠시 무너뜨리고 주(周)라는 국가를 세운 측천무후(재위: 690~705)를 제외하고 모두 남자들이 집권하다가 1912년 청의 황제 선통제 부의가 위안스카이에게 퇴위당할 때까지 2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속되어 왔다.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던 사람들까지 다 합치면 그 수가 583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식 역사 자료에 기록된 황제의 수는 406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제는 문경지치를 이룬 한의 문제와 경제, 한무제, 후한의 창시제 광무제, 위의 조조, 오의 손권, 촉한 유비, 북위의 효문제, 당 태종, 당 현종, 송 태조 조광윤, 요의 야율아보기, 금 태조 완안아골타, 몽고의 칭기즈칸, 원 세조 쿠빌라이, 명 태조 주원장, 명의 영락제, 후금의 건국자 누르하치, 청의 강희제, 건륭제 등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외에 열 살도 안 돼 황제가 됐던 경우도 2000여 년간 29번이나 됐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어린 황제들은 요절이 많았다. 평균수명이 36~37세에 불과할 만큼 장수한 황제는 드물었다. 심지어 재위 몇 시간만에 요절한 금의 마지막 황제 완안승린과 황위 재위 8개월 만에 죽은 동한(기원후 25~220)의 상제(殤帝) 유융같은 황제도 있다.
반면 장수한 황제들의 공통점은 천하의 패권을 쥔 지 얼마 안 되는 용맹한 황제이거나, 정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군주였다는 점이다. 중국 황제 가운데 가장 오래 제위(帝位)를 지켰던 이는 청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룩한 강희제(康熙帝)와 그의 손자 건륭제(乾隆帝)이다.
신묘년 정유월 경오일 병자시에 태어난 건륭제는 24세에 황제가 돼 60년간 제위에 있었다. 그는 조부 강희제의 재위 61년 기록을 넘지 않기 위해 84세 되던 해에 제위를 아들인 가경제(嘉慶帝)에게 넘겼다.
강희제보다 1년 적게 재위했지만 건륭제는 88세로 최장수 황제이다. 건륭제의 양생법은 현대인들이 깊이 새길 만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늦잠을 자지 말고 일찍 일어나 식전에 호흡을 충분히 하고, 근육을 움직여 주고, 치아를 서로 부딪치고, 침을 삼키며, 손을 당겨 주고, 코를 부드럽게 하고, 눈은 항상 움직이며, 얼굴을 비비고, 발을 안마하고, 근육을 이완시키며, 밥 먹을 때 말을 하지 않고, 누워서 말을 하지 않으며, 술에 취하지 않고, 색에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강희대제는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 태종 홍타이지, 순치제에 이은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이자 순치제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이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 경인궁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의 칭호인 ,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7세에 즉위해 68세로 사망할 때까지 61년간 집권한 강희제가 중국 역사상 최장수 집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명리학에서 정재와 편재로 표현되는 배우자 및 애인들로 볼 수 있는 황후 네 명, 황귀비 세 명, 귀비 세 명을 두었으며, 첩지를 받은 후비(后妃)와 잉첩(媵妾)만 64명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비를 거느렸다. 슬하에는 35남 20녀를 두었으나 이 중 아들 11명은 영·유아 때 요절하여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태어난 그의 일생을 명리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명보와 사주첩경 등에 언급되어 있는 사주팔자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위 사주명조는 세계적인 명리학자였던 원수산이 저술한 『명보(命譜)』에 언급된 것이다. 대만 무릉출판사에서 1998년 간행된 『명보(命譜)』의 445쪽부터 464쪽까지 20여 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강희제의 일생과 사주에 대해서 풀이하고 있다.
강희제의 사주를 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음양오행적인 면과 사주팔자 전체의 구조와 지지의 형충회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양은 일간인 ①무(戊)토를 기준으로 년주와 월주가 양간이고 시주가 정화의 음간으로 양 6개,음이 2개로 음양의 조화가 갖추어 졌다. 양의 성분이 강하면서 년간에 칠살이 득세하여 매우 적극적인 인물로 평가를 할 수 있다.
오행적인 성분은 천간의 무토(戊土)와 기토(己土), 지지의 용,개,소,양에 해당하는 진․술․축․미(辰․戌․丑․未, 용, 개, 소, 양)가 토기운이다. 강희제의 사주는 월지의 ②진(辰)토와 월 지장간 ②-①을 계무 가운데 무토가 월간과 일간에 드러나서 일간 ①무(戊)토를 중심으로 월간의 ⑦무(戊)토와 월지의 ②진(辰)토의 육친상 비견(比肩)과 겁재(劫財)에 해당하는 토기운이 매우 강하다.
이렇게 주체인 일간을 돕는 같은 오행이 강하면 주체성과 자주의식 및 독립정신이 투철하고 자아가 매우 강하다고 본다. 기가 강하여 자신감과 추진력이 좋으며 성취감과 자존심이 매우 강한 특성이다. 특히 무토는 지지에 진토를 보유하면 습토인 진토(辰土)가 습도를 조절해 반긴다. 이런 점들이 강희제가 1661년 비록 8살에 황제로 즉위하여 14살에 친정하기 까지 보정대신들이 정치를 보좌했으나 16살 때 보정대신 중의 한명인 오배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면서 황권을 확고히 구축한다.
보통 무토는 권위와 강압적인 지배를 성정을 가진 갑목 칠살로 다스리기 보다는 친화력과 포용성 및 관용을 나타내는 수복신인 식상(食傷)으로 설기하기를 선호한다. 이런 점에서 일지에 있는 ③신(申)금 식신(食神)의 역할은 강희제 사주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주의 기준점인 일간 다음의 오행을 식신과 상관이라 부르는데 강희제 사주의 경우 일간인 토 다음의 오행인 신금(申金)을 식신과 상관이라 하여, 특히 일간이 강한 사주일 경우 배부른 사람이 쾌변을 하면 기분이 좋듯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식신은 의식주를 주관하며 창작활동과 학문적인 성취감을 높이는 육친으로 관용과 배려를 상징하는 장수하는 수복신에도 해당한다. 그래서 명리학 고전에는 식신승재(食神勝財)라 하여 재성보다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육친이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이와 같이 식신은 만물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심성질의 인물에게 많은데 강희제가 이런 인물이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명리학(命理學)으로 풀어 보는 천고일제(千古一帝) 청의 강희제(2)
(대기원시보 2013.02.15 16:02)
1759년(건륭 24) 천산산맥의 남북지역을 신강(新疆)으로 명명한 이후 복합 다민족국가인 청조가 완성된다. 건륭제때 실시된 신강의 중국으로의 편입은 만주족․몽골족․한족․티베트족 세계 외에도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인 위구르족 세계까지 포함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중화와 외이(外夷)의 융합체인 다민족국가 ‘오족(五族)의 중국’이 형성되었다.
청조를 건립한 여진족(만주)족은 고려시대에 요(916~1125)에서 독립하여 현재의 중국 동북3성지역에 완안아골타에 의해 금(1115~1234)을 건국하였다. 이후 1125년에 제2대 태종(太宗: 재위1123∼1135) 때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이후 5대 세종 완안옹(世宗 完顔雍, 재위1161~1189)의 29년 재위기간은 ‘소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 불릴만큼 전성기였으나 결국 1234년에 몽고에 의해서 멸망하고 명나라 말기에 다시 영웅 누르하치(1559~1626)가 등장하여 만주족을 통일하면서 1616년 후금(後金)을 세운다. 명과 후금이 천하의 패권을 두고 1619년 사르후 전투를 벌여 승리하여 파란만장한 서막을 장식한 청나라 초기는 이후 홍타이지․순치제․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6명의 한(han)이 주인공으로 중국 전역을 청의 무대로 장식한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인 강건성세 또는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를 연 강희제는 건국이나 천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조(聖祖)라는 묘호를 받을 만큼 강희제의 공적이 건국자 못지않다는 칭송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집권 초기 4명의 보정대신들의 보필을 받다가 1669년(강희 8) 황권을 위협하던 오배를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한 강희제는 무술뿐 아니라 학문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범위는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학을 비롯하여 그 당시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에게 천문학․수학․해부학 등 다양한 유럽의 과학 강의를 받았다.
이것은 1697년 프랑스 선교사 부베가 저술한 강희제 전기에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또한 많은 사전류를 편찬했는데, 유명한 한자 자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과 청조 최초의 만만사전(滿滿辭典)인『어제청문감(御製淸文鑑)』을 제작하여 중국 내지를 정치적으로 통일한 강희제가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시도하여 다민족국가 청조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냈다고 본다. 강희제의 학문적인 소양은 만주족의 전통문화와 중화 세계의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를 통한 그 당시 유럽세계에서 풍미하던 최신의 학문 지식에까지 미치고 있을 만큼 대단한 학문적인 욕구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강희제가 학문적․ 문화적인 성취를 이룩한 것은 그의 사주팔자에서 학문적인 지식세계의 수용성을 보여주는 인성(印星)이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강희제 사주에서 학문이나 지식세계의 수용성을 나타내는 인성은 연지에 있는 ⑤오(午)화 정인, 시간에 투출한 ⑧정(丁)화 정인,④사(巳)화편인 등이다. 또한 일지에 있는 ③신(申)금 식신(食神)도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육친으로 지식 습득에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성(印星)이란 사주의 주체인 일간(日干)을 생해주는 오행을 말하며, 정인 또는 인수는 대체적으로 자연․조상․ 어머니․후견인 등의 혜택을 받아 후손이나 제자 등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전통과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자비심과 선비적인 자질을 구비한 것을 말한다. 인성은 음양의 배합에 따라 정인(正印)과 편인(偏印)으로 구별하는데, 보통 정인은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며 편인은 정인과 달리 자연이나 조상과 어머니로부터의 혜택이 약한 편이며, 예체능이나 기술 및 특기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전략적인 두뇌가 발달된 육친으로 새로움과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특성이 있다.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탁월하고 기회포착과 한때의 인기와 명성을 보장하는 육친이 편인이다.
한편 편인은 고독한 심성질로 속세를 떠나서 수련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기만의 특별한 캐릭터로 묵묵하게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인물로 변화무상한 인물에게 많은 인자이다. 습한 땅으로 만물을 성장시키는 진토(辰土)의 음력 3월 용달에 태어난 강희제는 진토의 지장간(지지에 숨어있는 하늘의 기운인 천간)인 을목(乙木)이 연간에 갑목(甲木)으로 투출하여 사주의 그릇과 인품 및 근본적인 기질과 유전자를 상징하는 격국(格局)이 칠살격(七殺格)을 형성했다. 주인공인 일간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공격하는 칠살을 사주에 보게 되면 일간의 강함과 약함으로 칠살의 활용도를 판단하거나 식신이나 인성및 양인으로 칠살을 다듬어야 한다.
강희제의 사주는 일간이 월주에 비견이 왕하고 인성마저 강하여 충분히 칠살을 이용할 수 있는 사주인데 이럴 경우 형제자매나 동료의 보조나 힘을 활용할 줄 아는 인물로, 신왕사주에 편관을 보면 조직을 이끌어 나가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용인술이 탁월하고, 강력한 권위의식과 권력지배력으로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할 수 있는 인물이 된다. 강희제 사주에서 연주의 ⑥갑목 칠살과 ⑤오화 정인(正印)은 무서운 기질의 칠살을 자비로운 정인의 마음으로 변하게 하는데 소위 살인상생(殺印相生)이다.
살인상생이라는 것은 청백리같은 고귀한 인품과 카리스마로 고통과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백성을 전투병에 해당하는 편관과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정인으로 달래어 백성의 고충을 헤아려 지혜로운 방법으로 애민정책을 펴 나갈 수 있는 인자를 말한다. 한마디로 사나운 호랑이와 같은 기상의 편관을 자비로운 어머니상인 정인이 잘 달래어 도리어 일간인 자식에게 도움을 주게하는 구조가 살인상생격이다.
여기에 시지(時支)에 ④사(巳)화 편인(偏印)까지 겸비하여, 시대적인 변화에 민감하면서 전략적인 두뇌와 임기응변이 탁월한 편인과 전투력이 뛰어난 편관이 겸비되니 새로운 문물인 유럽의 문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럽의 과학문화에도 탄력적으로 대처했다고 본다. 이렇게 통합과 화합의 오행이자 신의의 상징인 무토(戊土)일간이 인성과 편관이 결합하여 사주를 구성하니 민생을 살펴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통합의 지도자로 강희제가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전투력과 전략가의 결합체인 살인상생(殺印相生)의 사주인 젊은 강희제는 오삼계(吳三桂)·상가희(尙可喜)·경계무(耿繼茂) 등이 지배한 삼번을 폐지하자, 결국 1674년 오삼계가 난을 일으키며 경정충(耿精忠:경계무의 아들)과 상지신(尙之信:상가희의 아들)이 호응하면서 강희제에 저항했다. 이에 강희제는 엄청난 시련과 아픔을 준 삼번의 난을 주도면밀한 전략을 세워 난이 일어난 지 8년 만에 진압하였다. 이후 정성공이 푸젠성의 하문에 거점을 두고 명나라 신종 만력제(재위1573~1620)의 손자인 영명왕을 지원하면서 대규모 반청운동을 전개하면서 대만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20여 년 동안 타이완을 근거지로 하여 반청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강희제는 1683년 정씨가 투항하여 대만을 영유하는데 성공했고, 국내를 평정하게 되었다. 또한 세 차례 친정하여 몽고 지역 갈단의 난을 진압했다. 티베트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하였다. 1689년에는 중국과 유럽국가 사이에 맺은 최초의 국제조약이며 청과 러시아 사이의 호혜평등에 입각한 기념비적인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1681년(강희 20) 28세에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씨 가문도 항복시킨 강희제는 1684년부터 1707년까지 모두 6번에 걸쳐 남방 순행을 단행했다. 이때 경비를 내무부가 담당하여 백성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 강희제의 큰 자부심으로 남았다. 강희제의 대운은 금수운(金水運)이 희용신(喜用神)으로 대운의 흐름이 1세~10세는 기사대운(己巳大運)으로 불리한 운세이고 11세~20세는 경금의 식신(食神)과 오화의 정인(正印)이 주도하는 경오대운(庚午大運)으로 운세가 반반이다. 21~30세의 신미대운(辛未大運)은 신금의 상관과 미토의 겁재대운으로 조직의 반란을 상징하는 상관과 경쟁자에 해당하는 기신(忌神)인 겁재대운(劫財大運)으로 매우 불리했다.
이 대운 기간에 삼번의 난과 정성공 가문의 반청운동이 일어났으나 난을 진압하고 국내를 평정한 기간이다. 31세 이후 20년간 편재와 정재에 해당하는 임신(壬申)과 계유(癸酉) 대운으로 난조한 사주로 태어난 강희제는 서늘한 금수운으로 접어드니 가장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이렇게 사주와 대운이 길운으로 전개되니 강희대제는 ‘천고일제(千古一帝)’라는 극존칭을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