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시 46년만에 역사속으로..외교관 1천361명 배출
전 세계를 누비는 1천361명의 외교관을 배출한 외무고시가 4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1일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외무고시(5등급 외무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시험이 처음 치러진 것은 지난 1968년이다.
이때부터 다른 공무원과 함께 3급 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을 통해 뽑던 외무공무원을 3급 을류 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으로 따로 뽑게 됐다. 첫 외무고시를 통과한 것은 18명이다.
1973년부터는 관련 법령 개정으로 이 시험을 외무고등고시라고 부르게 됐다.
3년가량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외시 3회이고, 현직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외시 10회다. 첫 여성합격자가 나온 것은 외시가 치러진 지 10년 만인 1978년 12회 때다.
당시 합격한 김경임(65·여)씨는 주뉴욕 영사와 주 유네스코 참사관, 주인도 참사관,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주 튀니지대사, 본부대사 등을 지냈다.
1979년과 1980년 외무고시를 통해 각각 50명씩을 뽑아 역대 합격자 수가 가장 많았다.
1997∼2003년까지 7년간은 외무고시가 1·2부로 나뉘어 재외교포를 2부로 별도로 뽑았으며, 2011년에는 외무고시라는 이름이 5등급 외무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으로 바뀌고 외국어 능통자 전형이 도입됐다.
2013년 마지막 외시 최종합격자는 37명으로, 여성합격자는 이 중 59.5%인 22명이었다. 여성합격률 역대 최고치는 2007년 기록한 67.7%이다.
국립외교원을 통한 외교관 양성이 시작됨에 따라 외무고시는 올해 47기를 끝으로 내년부터 폐지된다. 올해 처음으로 뽑는 국립외교원 외교관후보자 1차 시험은 4월 27일 치러졌으며, 21.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합격자는 1년간 국립외교원에서 교육을 받게 되며, 종합교육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5급 외무공무원으로 임용된다.
마지막 외시 합격자 37명…여성비율 59.5%
(중앙일보 2013/06/11 18:00)

4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마지막 외무고시(5등급 외무공무원 공채)에 37명이 최종합격했다. 여성합격자 비율은 59.5%이다.
1968년 시작돼 46년간 1천361명의 외교관을 배출한 외무고시는 이번 47기 시험을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안전행정부는 11일 2013년도 5등급 외무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최종합격자 37명의 명단을 사이버국가고시센터(http://gosi.kr)를 통해 발표했다.
올해 1차 시험에는 973명이 응시해 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이 중 2차시험에 합격한 45명이 지난 1일 3차 시험에 응시해 지방인재 추가합격 2명을 포함한 37명이 최종합격했다고 안행부는 설명했다.
여성합격자는 모두 22명으로 전체 합격자의 59.5%를 차지해 작년 53.1%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여성 합격률 역대 최고치는 2007년 기록한 67.7%이다.
합격자는 외교통상직 34명, 영어능통자 2명, 러시아어능통자 1명이다.
합격자 평균 연령은 26.64세로 작년보다 0.95세 상승했고 연령대별로는 23∼25세 합격자가 43.25%로 가장 많았다.
최고득점자는 2차시험에서 70.66점을 받은 외교통상직의 이종찬(32)씨가 차지했으며 최연소 합격자는 러시아능통자 분야의 윤홍선(22.여)씨였다.
최종합격자 명단은 사이버국가고시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최종합격자는 12∼17일 후보자 등록을 해야 한다.
외무고시를 대체할 국립외교원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은 지난 4월 27일 21.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가운데 1차 시험에 이어 2차·3차 시험을 거쳐 오는 11월 13일 최종합격자가 발표된다.
일간지 기자 출신 외무고시 수석 이종찬씨
(법률저널 2013년 06월 11일 18시 08분)
“목표의식 확고하게 가진 것이 원동력”
“한반도 평화통일에 이바지 하고 싶다”
올해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외무고시(5등급 외무) 수석 합격자는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뒤늦게 외무고시에 도전한 끝에 수석의 영예를 안아 주의를 놀라게 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종찬(32·사진)씨. 부산 양정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31세의 늦깎이 고시생이었지만 1년 6개월 여만에 합격을 꿰찼다. 특히 중앙일보에서 3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반듯한 신문사를 그만두고 고시에 뛰어든 만큼 부담감이 적지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목표의식을 갖고 공부한 끝에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씨는 법률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합격소감을 묻는 말에 “우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뒷바라지 하신 어머니가 너무 고생하셨다”며 “멀쩡한 회사를 그만뒀을 때도, 힘든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저를 믿어주시고 뒷받침해주신 어머니가 저의 영웅”이라며 고생하신 어머니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또 “대한민국의 외교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매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향후 인류사적으로 더욱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달성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데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합격소감을 나타냈다.
그는 뒤늦게 공부에 뛰어들었지만 단기간에 합격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확고한 목표의식’이었다. 이 씨는 “목표의식을 확고하게 가졌던 것이 시험 공부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며 “외교관이 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한 목표의식이 있었고, 이에 따라 내가 왜 신림동 고시촌에 와 있는지 매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원래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해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3학년 올라가면서 경제학으로 전과를 했다. 전과한 후로 경제학은 물론 문학, 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한 덕분에 신문사에도 기사로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
그럼에도 그가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외교관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31세였다. 하지만 그는 “외교관이 되고자 목표를 세우고 나니 먼 길을 돌아온 제 삶의 궤적이 앞으로 제가 가야할 방향을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고시생활로 귀결되었다”고 외시를 도전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의 전반적인 수험생활은 2012년 1월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에 통과한 후 고시에 입문하게 됐다. 중국어(제2외국어)와 국제법을 전혀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이 두 과목에 집중해서 공부했다. 작년 2월에 치른 PSAT에서 불합격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PSAT시험을 치른 다음날 신림동 고시촌으로 이사했고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했다. 기초가 부족한 중국어와 영어 번역 공부에 5월까지 매진했고, 그 이후부터 기타 다른 논문과목 공부를 시작했다.
다양한 학문을 접한 그였지만 PSAT 공부는 녹녹치 않았다. 작년 치른 첫 PSAT 시험과 올해 외교원후보자 PSAT 시험에 떨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기출문제 중심으로 꾸준히 연습한 끝에 올해 외시 1차에서는 자료해석에서 30점이 넘는 상승폭을 기록했다.
2차 마무리 한달 전략으로 영어와 중국어는 모강 수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기타 논문과목 대비에 힘썼다. 국제정치학의 경우 신희섭의 2순환 자료와 스터디에서 만든 논문정리 자료를 활용했다. 국제법은 조문 및 판례, 기타 일반 법적 개념 등을 요약해 반복해서 보았다. 경제학은 김진욱의 3순환을 모의고사만 풀면서 답안지 작성 연습을 했다.
2차 답안작성에서는 우선 질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쓸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그 다음에 아무도 안쓰거나 소수의 수험생만 쓸 것 같은 내용을 비장의 무기로 각 챕터별로 갈무리해나갔다. 경제학은 양적 팽창 관련해 IS-LM, AD-AS 모형의 기본적 접근에 추가해 미국의 양적 팽창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정리해놓는다든지, 외부효과의 수학적 표현을 익혀 놓는다든지, 국제법에서 국가수용과 관련해 투자 관련 보완책(ICSID, MIGA) 등을 숙지해놓는다든지가 그 예이다.
면접 준비는 2차 발표 후 합격자 모두가 모여 면접 스터디를 진행했다. 또한 법률저널이 주관한 모의면접 컨설팅을 통해 면접에 대한 정확한 방향을 잡았다. 외국어토론면접은 영어토론 전문가의 과외를 받았지만 번역 공부했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토론 역시 단기간 대비가 어느 정도 가능했다.
면접에서 생각하는 중요한 포인트에 대해 그는 “우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보수적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며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과 진실된 경험만을 가지고 면접관들에게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입부하기까지 우선 도와주신 많은 분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고, 평소 못 읽은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수험생에게 한마디 해 달라는 말에 그는 “개인적으로 외무고시를 시작하기 전까지 수많은 크고 작은 실패를 겪었고, 시험 발표가 나는 그 순간까지도 제 옆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도사리고 있는 듯 했다”며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인내심을 갖고 매진했을 때 사회는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저에게 줬던 것 같다. 정직함과 인내라는 두 가지 미덕과 함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목표를 추구해간다면 분명히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며 수험생들을 응원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감사할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뒷바라지 해준 어머니, 아버지, 시험 때 도시락 싸준 동생. 시험 끝날 때마다 찾아와 술과 좋은 음식을 사준 고향 친구에게 감사하다”며 “또한 재작년 한해 동안 함께 시를 쓰고 읽으며 함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예비 시인 ‘박한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PSAT, 객관식이지만 순발력 테스트에 가까워 까다로웠다”
(서울신문 2013-06-13)
마지막 외시 수석합격 이종찬씨
▲ 마지막 외시 수석 합격 이종찬씨 |
10일 합격자를 발표한 국립외교원 외교관후보자 1차 시험에 낙방해서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는데, 마지막 외무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1968년 시작해 1361명의 외교관을 배출한 외무고시가 4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외무고시(5등급 외무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수석의 영광은 2차 시험에서 70.66점을 받은 외교통상직의 이종찬(32)씨가 안았다.
이씨는 많은 외교관 지망생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외무고시와 올해 처음 시행된 국립외교원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에 동시에 응시했다. 외무고시와 국립외교원 선발시험의 1차 과목은 공직적격성평가(PSAT)로 같지만, 2월에 합격했던 시험에 4월에는 떨어진 것이다. 이씨는 12일 “국립외교원 1차 PSAT에서는 1문제 차이로 떨어지긴 했는데, PSAT가 까다로운 시험인 것 같다. 객관식이지만 순발력 테스트에 가까워 합격했던 사람도 안심할 수 없고, 외교관후보자시험은 합격선도 외무고시보다 많이 올랐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신문사에서 3년간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고시 공부 기간은 2년을 잡고 지난해 1월부터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합격했다. “밥 먹을 때도 수첩을 들고 가서 공부하고,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으며 365일 한 눈 팔지 않고 공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2시간 안에 답안지를 작성해야 한다는 고시 공부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1년 만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꿈은 중국에서 일하며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는 외교관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 통일에 중국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한·중 관계를 돈독히 해서 동북아 평화안정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앞으로의 외교관 역할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외무고시 수석 합격수기 “끝까지 방심하거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법률저널 2013년 06월 21일 14시 05분)
이종찬 제47 외무고시 수석·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0. 들어가며
처음 합격 수기 의뢰를 받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단 외무고시가 올해로 폐지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줄곧 혼란과 막막함 속에 지내왔던 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합격하신 분들께서 이미 많은 양의 수기를 남겼는데 내가 굳이 덧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은 살아가려고 하듯, 저 역시 제가 거쳐 온 과정을 진솔하게 들려드리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있어 참고할만한 여러 증언들 중 하나로 받아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제가 부딪쳤던 난관들에 공감하시거나, 자신이 맞닥뜨리고 있는 여러 도전들을 이겨낼 수 있는 약간의 용기 혹은 힌트라도 얻으신다면 저에겐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1. 1차 PSAT 대비
(1) 2012년 PSAT
지난해(2012년) 1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치른 직후 외시를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처음 한 일은 중국어 기초반 동영상 강의와 국제법 예비순환 동영상 강의를 신청한 것이었습니다. PSAT시험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저에게 급한 것은 단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중국어와 국제법을 공부하는 것이지 PSAT시험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PSAT시험은 떨어질 확률이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고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2013년 국립외교원 입시를 최종합격에 제대로 도전할 첫번째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시에 처음 진입할 때, 2012년 시험에는 1차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2013년 시험에서는 2차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2013년 외시 2차 시험에서 그리 호락호락하게만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는 있었습니다.)
2012년 2월 PSAT 시험을 대비한 공부는 2주 정도 했습니다. 주로 기출문제를 풀었고 자료해석과 상황판단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꼼꼼히 리뷰를 하다 보니 최근 5개년조차 제대로 다 풀지 못한 상황에서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시험 당일에는 그동안 불규칙적인 생활과 오랫동안 시달린 불면증의 후유증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급기야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잘못되는 불상사까지 겹쳐 90분 동안 교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자료해석 시간에는 5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제발 시험 종료 종이 빨리 울리기를 바라기 시작했을 정도였습니다.
지난해 1차 시험을 치른 후 제가 느낀 점은 시험에 있어서 컨디션 조절과 체력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기 때문에 수면이나 음식 섭취에 있어 저에게 다소 예민하게 다가오는 부분들은 평소 관심 있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할 때는 11시 30분 이전에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나 짜고 매운 음식을 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차 시험 점수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합격선에서 4문제 차이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대비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2) 2013년 외시 PSAT
2013년 외시의 경우 1차 PSAT 시험 통과가 당면과제였기 때문에 11월 말부터 비교적 체계적인 대비를 하였습니다. 우선 가장 점수가 낮게 나왔고 투입 대비 생산이 가장 높다고 알려진 자료해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본 skill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신헌 선생님 기본서를 사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잡듯이 풀었습니다. 그 후에는 신헌 선생님 집중강의와 모강을 들으며 시간 안배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훈련했습니다. 언어논리의 경우 논리 파트 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김우진 선생님 논리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상황판단은 박준범 선생님 모강 수업에 의존했습니다.
모강기간부터는 모강수업을 충실히 들었고, 올해 1월에는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외시생들과 시간을 재고 문제 푸는 스터디를 했습니다. 특히 PSAT의 경우 90분동안의 시간관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스터디를 통해 문제풀이를 연습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시험 2주 전부터는 기출문제만 반복해서 풀었습니다.
2월초까지 2달간 준비를 했지만 정작 시험일이 되니 생각했던 것보다 대비가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시험 전날 잠을 많이 설쳤지만 1주일 동안 컨디션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자료해석에서 30점 가량 점수가 오르면서 1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상황판단의 점수는 제자리걸음을 나타내 4월 국립외교원 1차 시험에서는 상황판단 영역에 대한 대비에 시간을 좀더 할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퀴즈와 법률문제에 대한 대비를 좀더 철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 국립외교원 PSAT
처음으로 치른 외시 2차 시험을 끝내고 곧바로 PSAT 스터디를 구해 PSAT 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차 시험 직후여서 집중력을 갖고 PSAT 대비를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래 계획으로 갖고 있었던 상황판단 영역에 대한 별도의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고 스터디를 소화하기에 벅찼습니다.
실제 시험에서는 나쁘지 않게 치렀다고 생각했으나 채점 결과를 보니 점수가 소폭 하락했고 반면 합격선이 크게 상승해 결국 1문제 차이로 탈락했습니다. 국립외교원 시험성적을 보고 느낀 점은 끝까지 긴장하면서 대비하고 끝까지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 과목이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2월 외시 PSAT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황판단은 10점 이상 점수가 올랐으나, 자만했던 자료해석은 거꾸로 15점 이상 점수가 하락한 것입니다. PSAT 시험은 당일 컨디션과 시험 유형에 따라 결과가 크게 변동될 수 있으므로, 끝까지 방심하거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시험일까지 최선을 다해야하는 시험인 것 같습니다.
2. 2차 시험 대비
(1) 영어
2011년에 영문과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였던 것이 결과적으로 영어 과목 대비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영문과 대학원 입시 때 읽은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의 세련된 영어가 척박했던 저의 영어 토양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번역 공부는 우선 해커스에서 나온 토플 대비 writing 교재로 워밍업을 했고, 정영한 선생님의 writing start up을 2013년 3~4월 동안 집중적으로 연습했습니다. writing start up을 신물날 때까지 연습하고 나니 어느 정도 번역공부의 궤도에 올라선 것 같아, 뉴욕타임스의 토마스 프리드먼과 폴 크루그먼의 칼럼, ECONOMIST의 정치경제 이슈 주요 기사를 하루에 하나씩 읽으면서 활용할만한 표현들은 수첩에 적어 따로 외웠습니다.
문구점에서 파는 기자수첩에 수시로 표현들을 정리하니 올해 2차 시험 직전까지 5개 정도의 단어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단어장을 평소 밥 먹을 때와 이동 중, 휴식 취할 때 등의 시간에 틈틈이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첨삭은 개개인의 성향에 맞추어 세심하게 관리해주시는 안수진 선생님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에세이 형식을 확립하는데 있어 안 선생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국어와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2013년 3~4월은 두 가지 외국어 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5월 중순 논문과목 공부를 시작한 후에는 저녁 식사를 한 후 3~4시간 정도를 외국어 공부에 할애했습니다.
2차 시험 직전 다른 논문과목 준비가 너무나 시급해 상대적으로 영어 과목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지만, 안수진 선생님의 모강수업만은 끝까지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평소 뉴욕타임스와 ECONOMIST에서 정리해놓은 표현들이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 중국어
중국어는 제가 처음으로 접한 과목이라 2차 시험을 치를 때까지 저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우선 2012년 1~2월에 동영상 강의를 통해 성조와 한어병음, 그리고 기초회화 표현, 문법을 익혔고,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3~4월에는 서울대입구에 있는 민병철 어학원에서 HSK대비 중국어반을 수강했습니다. HSK 대비반에서 문법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고 5월부터는 조소현 선생님 고시반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초 문법을 어느 정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고시반 수업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수업시간에 다루는 지문의 90%가 모르는 단어일 정도로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수업시간에 다루는 중한 텍스트를 모두 한글로 번역한 다음에, 그것을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는 이중번역 연습을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다루는 텍스트 양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중번역을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흐르곤 했습니다. 복잡한 한자를 손에 익히기 위해 어려운 한자들은 계속해서 연습장에 받아 적었습니다.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들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기자수첩에 적어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보았습니다.
2012년 3~4월간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이런 식으로 중국어 공부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두 달간 연습을 하고 나니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조소현 선생님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게 됐던 것 같습니다. 중국어는 저의 가장 약점인 과목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2차 시험 마지막 2달간은 다른 논문과목 대비가 시급했기 때문에 조소현 선생님 모강에 의존했습니다. 별도로 중국 주요 지명과 주요 소수 민족 이름도 외웠지만 실전에서 써먹진 못했습니다. 시험 성적은 고득점까진 아니어도 1년 준비한 것치곤 만족스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3) 국제정치학
국제정치학은 대학교 4학년 당시 국제정치학 개론 수업을 들은 적은 있으나 졸업한지 시간이 꽤 흘러 수업에서 다룬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일하며 관심 있게 읽었던 기사와 그 속의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기에, 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이론적 틀을 공부하는 것이 저에겐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동북아 정세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등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가졌던 의문들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2년 5월에 박재영 교수의 국제정치 패러다임과 김용구 교수의 세계외교사를 읽은 뒤 이상구 선생님 1순환 강의를 동영상으로 수강했습니다. 그 후 신희섭 선생님의 답안지 특강(11월)과 2순환 강의(12월)를 들으면서 답안지 작성 연습을 하였습니다. 답안지 작성에 있어서는 신문사에서 받은 기사 작성 훈련이 큰 도움이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제정치학 답안지의 경우 특히나 주어진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정해진 분량에 효과적인 서술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우선 전체 답안지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전체 분량에서 서론, 본론, 결론의 비중을 감안하여 각 부분에 꽂아 넣을 이론과 팩트를 수집하는 것으로 공부의 방향을 세웠습니다. 2시간 동안 시험지 10장짜리 기사를 쓰는 것으로 시험을 간주하니, 공부의 방향감각도 생기고 효율도 올랐던 것 같습니다. 특히 12월에 진행한 논문요약 스터디가 이론과 사례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비는 신희섭 선생님 2순환 자료와 스터디에서 만들어놓은 논문요약 자료로 하였습니다.
실전에서는 50점짜리 1문을 쓰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3문 외교사 문제를 허겁지겁 작성했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나오면서, 올해 2차 시험에 불합격하면 답안 작성 스터디를 통해 시간 안배 훈련을 좀더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생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이는 시간에 쫓기면서 쓴 외교사 문제에서 형식적 완성도는 다소 포기하더라도 내용만은 충실히 채우려고 노력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4) 국제법
전술한 바와 같이 국제법은 처음 공부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큰 부담을 가졌던 과목이었습니다. 특히 법과목 자체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legal mind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밝아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정성주 선생님 예비순환 강의를 들으며 머리에 잘 남지 않는 내용들을 토시하나 빠지지 않고 받아 적었습니다. 처음엔 거의 대부분 모르는 내용이라 선생님 말씀을 속기사처럼 계속해서 받아 적기만 했습니다. 4시간짜리 강의를 하루 종일 듣고 있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법 용어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그 속도도 빨라졌던 것 같습니다.
4월까지 예비순환을 모두 들은 뒤, 9월 1순환 강의를 실강으로 들으면서 답안지 작성을 연습했습니다. 국제법 1순환 당시 모든 과목을 통틀어 처음으로 2차 답안지를 작성해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형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정성주 선생님이 미리 알려주시는 시험 문제를 가지고 다음날 하루 종일 목차를 짜는 등 고민해서 대비한 결과 답안지 쓰는데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2차 답안지 작성에 아직 서툰 분들이시라면 미리 문제를 읽고 답안지 목차를 짜면서 관련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에 시간에 맞춰 답안지 작성 연습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12월에는 PSAT 공부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2순환 강의는 수강하지 않고 뛰어넘었습니다. 다만, 1순환 시기동안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주요 조문 요약과 판례요약, 기타 주요 개념 요약 작업을 틈틈이 하였습니다. 1차 PSAT시험이 끝난 직후에도 판례요약자료와 일반국제법 개념 요약자료(김대순 저 목차 순으로)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 하였습니다. 요약 작업에는 정성주 선생님 요약집은 물론 이상구 선생님의 교재도 많이 참고했습니다. 외시 까페에 올라와 있는 합격자의 서브노트도 적극 활용했습니다.
일반 국제법 조문 요약은 갱지에 손으로 작성해 한데 묶었고, 기타 일반 국제법 판례와 기타 개념, 국제경제법 조문 및 판례 요약집은 한글파일로 작성했습니다. 이렇게 작성한 요약집을 시험당일까지 출제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 챕터 위주로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국제법의 경우 정성주 선생님이 3순환임에도 불구하고 내용 정리까지 충실히 해주셔서 답안작성은 물론 막판 핵심 법리(인도적 간섭과 수용 관련 등)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험 당일에는 전날 국제정치학 시험에서 시간이 모자랐던 기억 때문에 1문부터 매우 속도를 내어 작성하였고 결국 15초 정도를 남기고 답안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5) 경제학
경제학은 학부 때 전공이었던 관계로 시험에 입문할 때 제가 가장 희망을 걸었던 과목입니다. 미시와 거시는 물론, 국제경제학과 무역론도 수강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미시와 거시의 수준이 만만치 않았고 공부해야할 분량 역시 매우 방대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2012년 7~8월간 김진욱 선생님 1순환 강의를 동영상으로 들으며 이준구 저와 정운찬 저 교과서를 꼼꼼히 읽었고 중요한 내용은 대학노트에 필기해두었습니다.
10월 2순환 강의 때는 김진욱 선생님 실강을 들으며 1순환 강의 복습과 함께 본격적인 답안작성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경제학은 다른 과목에 비해서는 비교적 목차 구성은 쉬웠으나, 항상 시간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주요 그래프와 개념들을 기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그 때 그 때 암기해두어야 했습니다. 암기해도 다시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출제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은 대학노트에 따로 정리하여 수시로 보았습니다.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경제학 공부를 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한 챕터의 내용이 다른 챕터의 내용과 연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그 때 그 때 연계되는 다른 챕터를 세부내용까지 모두 복습한 다음에 다시 원래 공부하던 부분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3순환 시기에는 주요 논문과목 대비를 한꺼번에 해야 했던 관계로 시간이 부족해 수업은 듣지 않고 문제만 풀었고, 기출문제도 개인적으로 반복해서 풀었습니다.
국제경제학의 경우, 김진욱 선생님 1순환 강의를 동영상으로 들었지만 3순환 막판 정리는 유창석 선생님 강의로 수강하였습니다. 유창석 선생님께서 외시 출제 가능성이 높은 파트를 중심으로 집중적인 대비를 해주시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실전에서는 1문과 2문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빼앗긴 나머지 3문과 4문 작성이 소홀히 되었고 결과적으로도 그리 높은 점수는 얻지 못했습니다. 2차 시험을 대비하면서 경제학은 100점 답안을 한번도 작성해보지 못했는데, 이러한 허점이 공략 당했다고 시험 직후 스스로 진단했습니다. 따라서 올해 2차 시험에 낙방하면 향후에는 경제학 100점 답안 연습에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 3차 면접시험 대비
2차 합격자 발표가 난 뒤 합격자 거의 전원이 모여 한국어토론, 영어토론, 개인발표, 인성면접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실전과 같이 2차 합격자들을 8조로 나누었고 수시로 조를 섞어가며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덕분에 실전에서 한번씩 스터디를 해봤던 분들과 조가 편성되어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시험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2차 합격자 발표 직후 법률저널사가 마련해주신 모의면접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는데 전반적인 면접시험의 개요를 파악하고 이에 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사님이 옷차림이나 기본자세 등 세심한 곳까지 챙겨주셨기 때문에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저는 회사에 다닐 때 미국과 호주에 잠깐 출장을 간 경험만 있을 뿐 영어권 지역에 장기간 체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영어토론 준비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국립외교원 1차 시험이 끝난 직후에는 강남에 있는 영어인터뷰 학원과 이대에 있는 영어토론 클럽을 다녔고, 2차 합격자 발표 후에는 영어토론 클럽에서 알게 된 영어토론 전문가를 모셔 집중 과외를 받았습니다. 영어토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본적인 표현을 익히고 나니 2차 시험 준비에서 많은 양의 영어 텍스트를 읽어 놓았기 때문에 외국어 토론이라도 단기간 대비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토론이나 개인발표에서 다루어지는 이슈에 대비하기 위하여 면접일 직전 3일 동안에는 국제법 요약집의 중요 파트와 국제정치학 논문요약자료를 빠르게 읽었습니다.
4. 시간 및 체력 관리
대학동 고시촌에 들어온 뒤 저는 오후 11시~11시 30분에 취침하여 오전 6시 30분~7시 사이에 기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숙면을 취하고 컨디션을 조절하는데 가장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휘트니스 클럽에 가 2km 러닝머신을 뛰었고 그런 뒤 웨이트 기구와 팔굽혀펴기를 통해 스트레칭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30분 동안 운동을 한 뒤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러닝과 스트레칭을 1년간 거의 거르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밤 늦게까지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휘트니스 클럽이 쉬는 휴일에는 서울대 대운동장 트랙에라도 가서 뛰었습니다. 아침 식사로는 맵거나 짠 음식을 피했고 밥과 야채, 계란 반숙, 누룽지 등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에 그쳤습니다.
점심식사는 오전 11시 40분에 하였는데, 처음에는 집중력 유지를 위해 소량의 식사만 했으나 2달간 지나고 나니 체중이 줄고 체력의 급격한 저하가 나타나 나중에는 졸음이 조금 오더라도 다소 든든하게 먹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식사 뒤 졸음이 오면 굳이 참으려하지 않고 책상에 잠시 엎드려 있었습니다. 휴게실에 가 누워 자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녁식사는 오후 4시 40분에 하였는데 저녁식사의 경우는 든든하게 해도 졸음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하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기름지거나 소화가 힘든 음식을 먹으면 공부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음식은 피했습니다. 체력이 달릴 때는 신림동 단골식당에서 삼계탕을 먹고 기운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1차 PSAT 시험을 앞두고부터는 친구인 한의사가 조제해준 한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들쭉날쭉한 컨디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친구인 한의사는 오랜 기간 저를 관찰해왔기에 제 체질과 건강에 가장 적합한 처방을 해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체가 예민하고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이라면 한약이나 건강보조제 등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5. 나가며
제가 원해서 뛰어든 고시 생활이었지만 그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아무런 적(籍)이 없이 백의종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경제적 압박감을 겪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독서실에서, 그리고 학원 대형 강의실에서 착한 곰처럼 코를 박고 공부하는 많은 수험생들을 보며 미련할 정도로 ‘삶의 희망’에 애착을 가지는 그들에게 뜻밖의 감화를 받곤 했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정신적 지주이신 할머니, 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름다운 나의 부모님, 언제나 나를 응원하는 착한 내 동생, 내가 꼬마였을 때부터 항상 든든한 지원자였던 두 분의 작은 아버지, 그리고 외삼촌, 기회가 될 때마다 신림동으로 찾아와주었던 조성택·한승민·박정훈, 맞춤형 진료를 통해 최적 컨디션을 유지하게끔 도움을 준 통영경희한의원 최성웅 원장, 내가 시험 합격하는 꿈을 꿀 정도로 나 못지않게 시험결과에 애태우고 긴장했던 박진성·민관식 등 소중한 솟을 친구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큰 빚을 지게 된 든든한 친구 주용성, 시(詩)가 낳아준 나의 의형제 ‘박한결’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신림동에서 저와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그 인연에 꼭 보답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의 행복과 승리를 빌어드립니다.
[인터뷰] 외무고시 최연소 “안하면 죽는다는 독한 마음가짐이 비결”
(법률저널 2013년 06월 14일 14시 52분)
“러시아권 국가들과 관계개선에 이바지하고 싶다”
윤홍선 제47회 외무고시 최연소·이화여대 정외과 4년
올해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외무고시(5등급 외무)의 최연소 합격자의 주인공은 러시아능통자 분야에 지원한 윤홍선(22·사진)씨가 외무고시 역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묘령의 나이에 불과한 윤 씨는 명덕외고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으로, 올해 외무고시 처음 도전해 단번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법률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외무고시를 운좋게 한 번에 합격하여 어리둥절하다”면서 “3차 면접을 본 후 합격 발표가 나기까지 한 열흘동안 잠도 못 자고 마음 졸이며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합격 소식을 들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매우 기쁘다”며 예상치 못한 결과에 두 배의 기쁨을 누렸다.
그녀가 고시를 단번에 합격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독한 ‘마음가짐’ 이었다.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며 멋도 부리고 싶은 나이지만 과감히 접고, ‘이것을 안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꾸준하게 일정한 시간동안 매일매일 공부한 것이 최연소로 단기간에 붙을 수 있었던 이유다.
윤 씨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고, 저만의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물론 세상과 단절된 것 같고 견디기 괴롭지만, 만약 이렇게 해서 단기간에 합격할 수 있다면 오히려 빨리 붙고 그 후에 친구들과 다시 연락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외무고시에 뛰어든 것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카자흐스탄에 살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일을 하시면서 어려움을 겪으실 때 마다 카자흐스탄 대사관의 도움을 많이 얻는 것을 보고 커서 해외에서 거주하는 우리나라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녀는 “외국생활을 하면서 아시아를 제외하곤 많은 외국인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관심도 크지 않은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며 “꼭 커서 한국과 한국인, 한국문화, 산업 등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외교관의 꿈을 가지게 됐다.
러시아어 능통분야에 지원한 것은 러시아 지역권에 살고 러시아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 관련 전문가가 되고 싶었던 것.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직 러시아와의 관계가 다른 이웃국가들에 비해서는 크게 발전되지 않았던 점도 마음에 끌렸다.
윤 씨는 “자원이 부족하여 중동에 에너지수입 의존이 심한 우리나라 입장에서 자원이 풍부한 러시아는 매우 좋은 파트너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러한 특성들을 이끌어내 한-러간 관계를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이고 싶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외무고시의 첫 관문인 PSAT 공부는 우선 학원 강의에 의존했다. 세 영역 모두 학원의 기본강의부터 파이널 모강까지 꾸준히 들었다. PSAT은 문제를 많이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와 각 선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과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를 푸는 방법에서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썼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시간내에 40문제를 다 풀려고 노력해보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따라서 40문제 중에서 어려워 보이는 7~9문제를 과감히 버리고 나머지 문제를 다 맞자는 식으로 풀었더니 전보다 많은 점수가 올랐다고 했다.
PSAT 마무리 한 달 전략도 혼자 마무리 하는 것이 불안하여 세 영역 모두 모강을 들었다. 거의 매일 모의고사를 하나씩 풀면서 어떤 문제를 풀고 어떤 문제를 버릴지 연습을 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습니다. 물론 혼자 공부할 때는 기출문제를 한 세트 또는 두 세트씩 풀었다.
마지막 1주일 동안에는 기출문제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공부했다. 여러 번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틀렸던 문제들, 그리고 수업에서 중요하다고 한 문제를 중심으로 계속 반복하여 보면서 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2차 과목도 다른 수험생들보다 수험기간이 짧았던 탓에 혼자 교과서를 보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학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국제법은 학원의 강의를 계속 따라갔고, 국제정치학은 전공이 정치외교학과였기 때문에 시험에 필요한 학교강의를 택하여 들었다.
그녀에게 공포의 과목은 ‘경제학’이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점수가 20점도 나오지 않았던 실력이었다. 쉽게 설명해주는 강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경제학에 대한 공포감을 점차 떨쳐낼 수 있었다. 영어는 고시를 시작하기 전 미국 교환학생으로 갔다왔던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에서 전반적인 영어말하기와 쓰기를 배웠다면,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보다 구체적으로 글을 깔끔하고 매끄럽게 쓰는 방법은 학원수업으로부터 배웠다.
원래 건강한 편이라서 따로 체력관리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2차 준비기간 동안 아침을 빼먹지 않고 매일 먹고, 하루 세끼를 매일 일정한 시간에 먹으려 했다. 점심을 먹고 졸릴 때에는 커피 등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수를 먹고 버티기 보다는 차라리 몇 십분 낮잠을 잤다. 또한 저녁에는 밥 먹고 10∼20분정도 산책을 했던 것도 체력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능통자 분야의 면접은 두 명중 한명이 떨어지는 ‘모 아니면 도’였기 때문에 다른 직렬에 비해 심적 부담이 더욱 크다.
우선 한국어 토론과 개인PT, 인성면접은 2차에 합격한 학생들과 모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같이 면접공부를 했다. 3차 면접은 이전 1차와 2차와 달리 사람의 태도와 인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스터디 조원들과 서로 잘못된 태도 또는 말투 등을 고쳐주고 장점도 얘기해주는 피드백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장점 그리고 부족한 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새롭게 알게 되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이번에 수석을 차지한 이종찬씨와 마찬가지로 법률저널이 주관한 모의면접 컨설팅을 통해 면접의 맥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어 토론은 러시아 원어민 선생님과 일주일에 3~5번정도 만나서 스터디 때 한국어 토론으로 공부했던 내용을 그대로 러시아어로 하는 연습을 했다.
면접에서 생각하는 중요한 포인트에 대해 그녀는 미소와 자신감이라고 강조했다. 토론을 할 때 자신이 상대방 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에나 자신의 발언 횟수, 시간이 적을 때에도 위축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고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밝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부에 일가견 있는 그녀에게도 스트레스가 있을까 싶지만 윤 씨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잠시 공부하던 것을 멈추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거나 잠을 잤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거나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잠깐 식히고 좋아하는 것을 하고 다시 마음먹고 공부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입부하기 까지 계획을 묻자 그녀는 “그동안 공부하느라 담쌓고 지냈던 친구들과 가족들과 연락해서 인사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누어보고 여행가보고 싶었던 곳도 가보고 할 생각”이라며 “그 후에는 러시아어능통자로서 한국과 러시아 간 관계사 그리고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공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외무고시 폐지에 대해선 “외무고시가 영영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국립외교원이) 보다 더 전문적이고 똑똑한 인재를 뽑기 위한 취지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국립외교원에 붙은 수험생들이 미래에 현재보다 더 뛰어난 외교관이 되어 한국을 빛내기를 기원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현재 공부하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그녀는 “외무고시는 ‘헝거게임’과 매우 비슷하다. 헝거게임에서 선정된 아이들은 1명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며 “그 정도로 고시는 매우 잔인하다. 특히 지역분야, 그리고 전문분야로 지원한 분들은 뽑는 인원이 거의 1명이기 때문에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그 마지막 1명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내가 과연 될까?’라는 생각을 할 시간에, 불안해할 마음을 가질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며 “‘내가 아니면 누가 되나?’라는 자신감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하지만 독하게! 한다면 합격의 꿈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수험생들의 파이팅을 외쳤다.
묘령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외무공무원으로서의 포부는 당찼다. “대한민국의 외교관이 되었다는 것이 매우 기쁘고 큰 영광이다. 한반도의 통일달성과 동북아 평화, 그리고 미래 러시아전문가로서 보다 한국과 러시아, 그리고 CIS지역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이바지하고 싶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윤 씨에게 감사할 사람이 많았다. 그녀는 “먼저 고시촌 음식이 맞지 않아 매번 도시락을 싸주셨던 엄마, 꼭 자기가 시험보는 것처럼 더 마음 졸이고 기도해주었던 아빠, 그리고 항상 누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던 동생. 항상 옆에서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신 가족들과 친구들 정말 감사하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또한 “저를 도와주신 선생님들이 없으셨다면 저는 지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신 모교와 교수님들, 그리고 이민수선생님, 이진우 선생님, 성종환 선생님, 모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외무고시 영어능통 정중섭씨의 비결은?
(법률저널 2013년 06월 11일 18시 04분)
“절박한 마음이 비결이라면 비결”
“한국을 빛낼 외교관 되는 것이 꿈”
올해 외무고시의 마지막 영어능통직렬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가 차지했다. 통상 영어능통직의 경우 여성이 강세를 보였지만 올해는 남자 모두 차지해 관심을 끌었다.
화제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은 정중섭(25·사진)씨. 능곡고를 거쳐 현재 한양대 국제학부 3학년에 재학 중에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법률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얼떨떨합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합격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비교적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한 것이 합격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핸드폰과 컴퓨터 없이 공부할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학원 자료를 읽고, 학원에서 원룸까지 걸어가는 시간에도 국제법 조문을 외웠다. 이처럼 마지막 외무고시라는 사실에 드는 절박한 마음이 비결이었던 셈이다.
정 씨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 그리고 국제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예전부터 국제정치학적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 나라이고, 이러한 외부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느꼈던 점이 외시를 준비하게 된 계기였다.
그가 영어능통분야를 지원한 것은 대학교 때 대부분의 과제를 영어로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영어로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의 전반적인 수험생활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던 와중에 외시를 본격적으로 결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공익생활 동안 제2외국어를 합격권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공익근무 기간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신림동에서 거주를 하며 경제학, 국제법 그리고 국제정치학 세 논문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PSAT 공부는 2차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와중에, 하루에 기출문제를 20문제씩 풀면서 PSAT 시험이 1주일 남아있을 때까지 입시를 제외한 모든 기출문제를 풀어본다는 계획을 세워 공부했다. 또한 틀린 문제에 대해 해설을 보면서 하루에 2~3시간씩 PSAT 공부를 했다.
2차 공부는 혼자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학원 강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학원에서 모의고사와 수업을 듣고, 혼자 공부할 때 복습을 철저히 하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특히 주요 세 과목은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매일 보면서 내용을 반복적으로 숙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어의 경우 평소에 신문을 읽으며 모르는 단어를 체크 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서 2차 시험을 앞둔 시점에서는 실전처럼 번역을 하면서 시간관리 연습을 했다.
체력관리는 잠을 많이 잔 것이 비결이었다. 잠을 많이 자니 잔병치레도 없었고, 체력적으로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 했다.
답안작성에 대해 그는 처음 20분 동안 답안에 꼭 써야할 키워드, 목차를 정리하고,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무조건 20분 이후에는 써나가는 방법으로 연습했다. 가장 중요한 점이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 그리고 두괄식으로 작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는 수식, 그래프, 판례, 조문, 사실(fact) 들을 풍부하게 기재하여 자신의 글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면접 대비는 여타 합격생들과 마찬가지로 스터디를 하면서 준비했다. 면접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에 스터디 외에도 따로 법률저널 주관 모의면접 컨설팅을 받으며 준비를 했다.
외국어면접대비는 영어로 토론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집에서 혼자 유명인들의 연설을 보면서 따라 읽는 연습을 하고, 신문을 볼 때에도 큰소리를 내면서 읽는 연습을 했다.
면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에 대해선 전체적인 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면접이 끝난 이후에 문을 조용히 닫는 것, 다른 분들과의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경청하는 자세 등을 꼽았다. 특히 자신이 얼마나 외교관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젊은 나이에 합격한 그였지만 혼자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생각만큼 모의고사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게 된 것 같고,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은 날에는 새벽에 PC방을 가 음악을 듣곤 하면서 힘든 과정을 극복했다.
시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들과 편안하게 웃으면서 만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그는 “항상 겸손하고 어떠한 일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외교관이 되고자 한다”며 “앞으로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여 우리나라를 빛낼 수 있는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현재 수험생에게는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기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라며 진심으로 응원해 드리고 싶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저를 가장 응원해주시고 믿어주신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외무고시 지방대 약진
(법률저널 2013년 06월 21일 14시 19분)
부산대 전남대 한동대 각 1명
올해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외무고시(5등급 외무) 최종합격자 37명 가운데 지방대 출신은 3명으로 약진했다.
외무고시에서도 지방인재채용목표제가 적용되고 있지만 지방대 출신의 합격자는 가뭄에 콩나듯 찾기 어려웠다. 그것도 우수한 인재들이 들어가는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출신들이 지방대로 적용되어 이들 대학이 대부분 차지했다. 이들 두 대학을 제외하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인천대와 제주대가 각 1명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최근 지방인재 합격자를 보면 2007년에는 카이스트 1명에 그쳤고, 2008년에는 한 명의 합격자도 내지 못했다. 2009년에는 카이스트와 제주대에서 각 1명의 합격자를 냈지만 2010년에는 1명(포항공대)에 불과했다. 2011년에도 1명(인천대)에 그쳤고 지난해는 3명까지 늘었지만 카이스트가 2명을 차지해 실질적 지방대는 아주대 1명 뿐이었다.
하지만 올해 마지막 외무고시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부산대, 전남대, 한동대에서 각 1명의 합격자를 내면서 지방대 선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이들 대학들이 최근 6년간 합격자를 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방 대학 가운데 이슬(25)씨는 전남대 영어교육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이씨는 전남대 사대부고 출신으로 2006년 전남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으며, 4년여 간의 준비 끝에 합격의 영예를 안고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이씨는 “국민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외교관이 되겠다”며 “외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만큼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다정함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좋은 활동 보여 드리겠다”고 합격 소감을 밝혔다.
정햇님(27)씨는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출신이다. 정씨는 대일외고를 졸업하고 2005년도에 한동대학교에 입학하여 국제어문학부에서 국제지역학과 영어를 복수전공 하였으며 지난 3년 동안 외무고시를 준비하였으며 이번에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정씨는 “한동대에서 영어와 국제지역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100% 영어로 진행하는 전공 수업과 국제호관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국제 개발 협력 분야와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려운 나라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서 경력을 쌓고 기여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한편, 1968년에 시작되어 46년간 1,361명의 외교관을 배출한 외무고시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대신 ‘국립외교원’이 외교관을 배출하는 시대가 개막했다.
법률저널이 최근 7년간(2007∼2013년) 외무고시 합격자 총 240명의 출신대학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지만 점차 감소세를 보였다. 또한 SKY 출신의 비율이 10명 중 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년간 240명의 합격자 가운데 서울대가 43.8%(105명)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서울대는 2010년까지는 매년 40∼50%선을 유지했지만 2011년에는 37.9%로 뚝 떨어지면서 외무고시 맹주로서의 자존심이 꺾였다. 지난해 40%대를 회복하면서 명예를 되찾은 듯 했으나 올해 또 다시 32.4%로 역대 최저치로 추락하면서 서울대의 아성이 흔들렸다.
서울대 다음으로 연세대가 2위를 차지했다. 연세대는 최근 7년간 총 47명인 19.6%로 고려대(15.8%, 38명)에 비해 3.8% 포인트 높았다. 2009년까지는 연세대의 강세가 두드러졌지만 2010년부터 고려대가 두각을 드러내 3년 연속 2위를 차지하면서 두 대학간의 격차가 좁혀졌다.
외무고시에서 SKY의 비율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이들 대학이 차지한 비율은 79.2%(190명)에 달해 여타 고시에 비해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연도별로 보면 2007년에는 93.6%에 달했으며 2010년에도 91.4%의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다만, 최근 3년간은 2011년과 2012년에는 각각 75.9%, 78.1%로 크게 떨어졌고, 올해 마지막 실시에서는 서울대와 연세대가 약세를 보이면서 67.6%(25명)로 근래 최저치였다.
2007년부터 지방소재 대학의 누적인원이 11명(4.6%)에 불과했으며, 외국대학 출신은 9명(3.8%)으로 나타났다. 외국대학이 많은 것은 영어능통직 때문으로 보이며 북경대가 5명으로 가장 많았다.
올해 첫 考試 외무고시
(법률저널 2013년 06월 14일 15시 39분)
외무고시 고려대 9명...연세대 4명
서울대 추락...SKY 비율도 감소
우리나라 사학의 ‘영원한 라이벌’ 고려대와 연세대의 올해 첫 고시 맞대결에서 고려대가 압승을 거두면서 먼저 승기를 잡았다.
법률저널이 올해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마지막 외무고시 최종합격자 37명의 출신대학을 조사한 결과, 고려대와 이화여대의 선전이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됐다.
올해 고려대 출신의 합격자는 총 9명으로 24.3%에 달하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연세대를 큰 격차로 따돌리고 2위 자리를 수성했다. 이는 지난해(18.8%, 6명)에 비해 5.5% 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최근 6년간 고려대 출신의 비율을 보면, 2009년까지는 ‘한 자릿수’에 그치면서 연세대에 크게 밀렸다. 하지만 2010년에는 23.6%(10명)로 껑충 뛰면서 연세대를 누르고 2위로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났다. 2011년에 또 다시 연세대에 2위 자리를 내줬으나 지난해부터 선전하면서 2위 자리를 지켰다.
반면 연세대는 10.8%(4명)로 지난해(15.6%, 5명)보다 줄면서 올해도 2위 탈환에 실패했다. 2009년까지는 연세대의 강세가 두드러졌지만 2010년부터 고려대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올해 마지막 외무고시에서 또한 서울대의 약세가 눈에 띄었다. 서울대 출신 합격자는 32.4%(12명)로 지난해(43.8%, 14명)보다 10% 포인트 이상 감소하면서 서울대의 아성이 흔들렸다.
최근 6년간 서울대 출신의 비율을 보면 2007년 50.0%(15명), 2008년 54.3%(19명), 2009년 41.5%(17명), 2010년 48.6%(17명) 등으로 40∼50%선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2011년에는 37.9%(11명)로 40%선이 무너져 최근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지난해 40%대를 회복하면서 명예를 되찾은 듯 했으나 올해 또 다시 역대 최저치로 추락했다.
서울대와 연세대가 약세를 보이면서 소위 ‘SKY' 출신의 편중도 다소 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3개 대학의 비율은 67.6%(25명)로 지난해(78.1%, 25명)보다 10% 포인트 이상 감소하면서 근래 최저치였다.
최근 SKY 출신의 비율을 보면 2007년에는 93.5%로 열의 아홉은 이들 대학의 출신들이 차지했다. 2009년에 68.3%로 주춤했지만 2010년에 또 다시 91.4%에 달하면서 명문대 쏠림이 지속됐다. 하지만 2011년부터 올해 마지막까지는 70%대에 머물면서 이들 대학의 편중이 다소 완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마지막 외무고시에서 이화여대도 선전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화여대는 올해 3명으로 지난해(1명)에 비해 크게 증가하면서 서강대를 밀어내고 4위를 꿰찼다. 반면 서강대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2명에 머물면서 5위로 한 단계 내려앉았다.
이밖에 지방인재 추가합격 2명을 포함해 3명이 합격했으며 부산대, 전남대, 한동대가 배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양대와 한국외대도 각 1명의 합격자를 냈으며 북경대, 토론토대 등 외국대학 출신이 2명이었다.
'공직자 > 고 시 열 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 법원행시 지원자 폭락...왜? (법률저널 2013년 06월 21일 14시 01분) (0) | 2013.06.21 |
---|---|
국회사무처, 입법고시 최종 합격자 18명 발표 (서울신문 2013-06-21) (0) | 2013.06.21 |
진화하는 고시제도… 변천사 살펴보니 (서울신문 2013-06-10) (0) | 2013.06.10 |
[고시열전] (11·끝) 행시 31회 합격자들 (서울신문 2013-06-10) (0) | 2013.06.10 |
역대 고시 3관왕 13명, 지금은 뭐하나 (중앙일보 2013.06.09 00:50) (1) | 2013.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