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짙어지면, 그녀의 입술은 더 붉어진다
ㆍ유명 화장품 매출 뚝뚝 떨어지는데 립스틱 판매는 쑥쑥
ㆍ다시 돌아온 불황기 지표 ‘립스틱 효과’
지난 30일 회사들이 밀집한 여의도 근처의 점심시간.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 20대 직장 여성들이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바른다. 회사원 조여경씨(28)는 이렇게 말했다. “5월 가정의달에 지출이 많아 점심은 라면이나 햄버거로 때워요. 스트레스도 많고 기분도 꿀꿀한데 이렇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면 확실히 마음이 상쾌해지거든요.”
여성들에게 립스틱은 마법의 변신 도구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립스틱을 몇 개씩 갖고 있다. 어떤 색을 바르느냐에 따라 얼굴 분위기가 달라진다. 립스틱 하나로 관능미 넘치는 입술로 변한다. 청순하고, 정숙한 입술이 되기도 한다. 여성들은 립스틱으로 예뻐지고 싶은 욕망과 사랑을 입술에 입힌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비디비치 화장품을 만드는 이경민씨는 “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입술은 빛이 없는 램프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립스틱은 여성들에겐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라고 말했다.
■ 고가 제품은 안 팔리는데 립스틱은 불티
립스틱 판매가 늘고 있다. 요즘 화장품 매장에서 영양크림 등은 잘 안 팔려도 각 브랜드마다 립스틱은 불티나게 나간다. 화장품 전문 조사기관인 보떼리서치의 수입 화장품 브랜드의 백화점 매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동안 전체 메이크업 시장은 -11.5%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립스틱은 -1.3%로 그나마 선방했다. 특히 립스틱으로 유명한 맥(MAC)의 경우 전체 메이크업 시장이 두 자릿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와중에도 2012년 한 해 동안 립스틱은 10%에 가까운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선 매월 평균 40% 가까이 판매가 늘었다.
백화점만이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에서의 립스틱 판매도 상승세다. G마켓이 1월25일~2월24일 한 달간 조사한 결과 립스틱·립글로스 판매량이 전년 대비 5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파크에서도 최근 3개월(2012년 11월27일~2013년 2월26일)간 립스틱 매출이 전년 동기대비 15% 늘어났다.
2500~3500원으로 저렴한 아리따움의 모디 네일은 지난해 6월 출시 이후 6개월 만에 판매량 360만개를 돌파했다.
황동희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움 TM팀장은 “20만원 이상 고가제품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해 립스틱이나 네일 같은 저가의 컬러메이크업 제품은 전년대비 30% 이상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불황기 지표인 ‘립스틱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립스틱 효과는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말로 불황기에 립스틱 같은 저가 화장품 매출이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미국의 화장품 업체인 에스티로더사는 자사의 립스틱 판매량과 경기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립스틱지수’(Lipstick Index)를 만들었다. 이 지수에 따르면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립스틱 판매량은 많아진다. 불경기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으로 값비싼 화장품을 구입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 상대적으로 저렴한 립스틱을 구매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립스틱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흥태 KB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우리나라도 현재 저성장 국면이 이어지면서 사치품을 찾기보다 비교적 저렴한 제품으로 자신을 꾸밀 상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립스틱 효과’는 여성들의 바뀐 소비방식 보여줘
립스틱 효과는 소비자들이 불황기를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황 팀장은 “화장품은 여성 고객들에겐 즐거움을 주는 필수품”이라면서 “아무리 불황이라도 소비를 하지 않을 순 없는 게 화장품인데 립스틱 효과는 여성들이 소비방식을 알뜰하게 바꾸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화장품 전문 블로거인 이민정씨는 “불경기에 소비자들이 그만큼 실용적이고 합리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백만원 대 샤넬 가방은 구입하지 못해도 3만~4만원 하는 샤넬 립스틱은 쉽게 살 수 있다. 비용 대비 효과는 크다. 립스틱 색상은 얼굴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비교적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강렬한 자기표현을 할 수 있고, 유행도 따라갈 수 있다.
립스틱 효과를 생존 본능과 연결시키는 시각도 있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등 연구팀은 립스틱 효과의 본질이 불황기에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불황일수록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욕구가 커지고 이로 인해 립스틱 효과가 발생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즉 불황기에 립스틱으로 여성적 매력을 강조해 경제력 있는 남편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박민영 문화평론가(44)는 “눈에 보이는 걸로 불황에 따른 결핍감을 메우려는 욕구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강렬한 색깔 표현으로 간접적이나마 해소하려는 심리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의 화장품 소비행태도 바뀌고 있다.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거 6~10단계로 이어지는 각종 화장품을 바르는 대신 로션과 비비크림만으로 간단한 밑화장을 하고, 립스틱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전문네일숍을 찾는 대신 매니큐어를 사서 직접 손톱에 바르며 기분 전환을 한다. 그 립스틱마저도 가능하면 저렴한 것, 혹은 세트로 구매하는 게 추세로 자리 잡았다.
‘저렴이 화장품’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고가 화장품과 색깔과 느낌은 비슷한데 가격은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로드숍 브랜드 제품을 가리키는 저렴이 화장품은 이용자의 체험기를 통해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저렴이 화장품이 재발견되면서 인터넷에선 럭셔리 화장품의 저렴이를 잘 골라 쓰는 사람이 진정한 뷰티 전문가로 인정받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조아영씨(28)는 “예전에는 백화점 제품을 썼는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부담이 돼 요즘에는 로드숍 브랜드를 많이 이용한다”면서 “촉촉함이나 지속력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저렴이 화장품도 색상이나 느낌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불황으로 지갑이 얇아진 여성들이 고가 브랜드 제품보다 실속형 제품으로 소비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황기에 달라진 소비자들의 구매행태에 대응하기 위한 업체들의 발걸음도 빠르다.
화장품 매장이 밀집한 서울 명동의 경우 립스틱을 1+1, 혹은 2~4개를 묶어 판매하는 프로모션이 일상적으로 진행된다. 아리따움, 홀리카홀리카 등 브랜드 매장도 예외가 아니다. 황동희 팀장은 “프로모션이라도 해야 고객들이 ‘한번 들어가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지갑을 닫고 알뜰, 실속형으로 바꾼 고객들의 소비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들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 ‘TV 속 그녀처럼…’ 스타마케팅도 후끈
‘립스틱 전쟁’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스타마케팅 경쟁도 치열하다.
한국의 경우 립스틱의 인기나 유행은 브랜드나 제품 특성보다 스타가 좌우한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CF에서 유명 연예인이 바른 립스틱은 바로 다음날 인기 상품이 된다.
라네즈는 지난 2~4월 ‘송혜교 효과’를 톡톡히 봤다. 송혜교의 5년 만의 안방극장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SBS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송혜교가 바른 립스틱이 대히트를 한 것이다. 송혜교가 극에서 바른 라네즈 실크 인텐스 립스틱은 ‘송혜교 립스틱’으로 불리며 그 다음날 바로 품절됐다. 드라마 속 송혜교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촉촉한 핑크 립스틱이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한 것이다.
권성혜 아모레퍼시픽 홍보팀 과장은 “송혜교가 6년간 라네즈 모델로 활동한 인연이 있어 이 드라마에 적극적으로 PPL(간접광고)을 한 게 적중했다”며 “송혜교 효과로 라네즈 매출이 500%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현재 방영 중인 MBC 수목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여주인공 신세경이 바른 레드오렌지 색상의 ‘프로방스 롱라스팅 립스틱’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신세경이 화장품 매장에 들러 제품을 둘러보다가 상큼하고 매력적인 레드오렌지 색상의 립스틱을 발라보는 모습이 방영된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 등에서 ‘신세경 립스틱’이 화제가 됐고, 판매량이 방송 전에 비해 236% 상승했다.
송혜교나 신세경처럼 자사 모델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PPL 형식으로 립스틱을 노출시키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이와 반대로 연예인이 바른 제품 덕분에 모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윤은혜는 최근 세계적인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맥의 공식 모델이 됐다. 맥이 국내 연예인을 브랜드 공식 모델로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은혜는 올해 초 종영된 MBC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입양된 패션디자이너 역을 맡아 ‘핫핑크 립스틱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윤은혜의 메이크업을 담당한 맥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 변명숙씨는 “윤은혜씨의 입술 모양과 컬러는 어떠한 립스틱도 아름다운 상태로 보이게 해 작업이 수월했고 일반 여성들에게 파급력이 크다”고 설명했다.
뜻밖의 횡재를 한 브랜드도 있다.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이 열렸던 지난 3월 중순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상위권에 난데없이 ‘김연아 립스틱’이 올랐다. 김연아 선수가 조 추첨을 기다리는 도중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이 팬들의 시선을 끈 것이다. 포털사이트와 온라인 뷰티 카페엔 해당 립스틱을 문의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김연아 덕분에 디올 브랜드의 립스틱은 추가 주문에 들어가기도 했다.
스타들의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각 화장품 브랜드들은 스타마케팅에 사활을 걸다시피 한다. 전속모델을 활용한 PPL은 기본이고,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나 전속 스타일리스트에게 제품을 선물하고 각종 행사에 초대하며 환심을 사기도 한다. 또 유명 연예인이 바르고 나온 제품은 곧바로 ‘아무개 립스틱’ ‘아무개 로션’같이 연예인의 이름을 붙여 홍보에 열을 올린다. 스타급 연예인은 브랜드 행사에 그저 참석해 사진을 찍어주는 것만으로도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의 사례비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비용을 감수해도 스타가 바른 립스틱이나 화장품은 다른 제품에 비해 몇 배나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최창호 박사는 “마릴린 먼로의 빨간 립스틱 덕분에 당시 여성들은 빨간 립스틱만 바르면 다 먼로처럼 섹시해진다는 착각을 했다”며 “여성들에게 스타가 바른 립스틱은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멋지고 섹시한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했다.
실용적 소비방식이든, 생존 본능이든, 스타 효과 때문이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불황의 그늘 속에서 여성들의 입술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여성들의 입술이 붉어지면 마케팅 전문가들의 한숨도 깊어진다. 빨간색 등 짙은 색은 경기 불황기에 유행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연분홍 립스틱이나 파스텔톤의 의상 등 가볍고 연한 색깔이 많아진다. 황동희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움 TM팀 팀장은 “불황기에는 베이지 같은 수수한 색보다 오렌지나 빨강 같은 화려한 색상이 인기를 끈다”고 말했다.
빨간 립스틱은 경제적이다. 다른 화장품을 쓰지 않아도 빨간색 립스틱만으로 화장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박민영 문화평론가는 “빨간색엔 변화를 원하거나 열정과 힘을 북돋는 의미도 있다”면서 “강렬한 빨간색을 통해 불황에 대한 불만과 위축되고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려는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만이 아니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조인성처럼 대담한 빨간색 바지를 입는 남성들도 늘어났다. 빨간 바지와 더불어 넥타이, 셔츠는 물론 팬티 등 속옷까지 남성패션에 빨강 열풍이 불고 있다. 스타일리스트 윤혜미씨는 “경기가 좋을 때는 의상 선택 폭이 넓어져 넥타이 색상이 비교적 수수해지는데 불황기에는 여러 제품을 살 수 없어 빨간색 한 가지로 포인트를 주려는 심리가 있다”면서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동안 심리가 어우러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과거엔 주로 하얀색이나 검은색 일색이던 스포츠화나 골프채도 요즘은 빨강, 오렌지 등 강렬한 색깔이 대세다. 코오롱스포츠의 조은주 부장은 “밝은 색상을 활용한 컬러 마케팅으로 위축된 소비심리를 극복하고 사회 분위기도 밝게 전환해보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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