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머리만 들어간 소머리국밥은 이제 옛말!
[맛난 집 맛난 얘기 ] 풍미연 (風味硯)
예전에 다녔던 회사의 연수원이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가끔 교육을 받으러 갈 땐 곤지암 읍내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버스 차창 밖의 소머리국밥집들이 당시엔 퍽 인상적이었다. 교육이 일찍 끝나는 날은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몰래 읍내로 나가 소머리 국밥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연수원 무단이탈은 규칙위반이다. 여기에 음주까지 범하면 가중처벌 감이다. 술에 취해 복귀한 심야의 무법자들에게 연수원 당직자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둥, 아침에 원장님께 퇴소를 건의하겠다는 둥, 새벽녘까지 우린 당직자의 험악한 공갈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교육 마지막 날 수료식에 빠진 동기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당시 광주의 사내 연수원은 우리들에게 직무교육의 전당이라기 보다 소머리국밥으로 각인된 장소였다.
다른 부위 함께 고아 풍부한 맛, 배 터질 만큼 수육도 푸짐
몇 십 년 전에 즐겨 먹었던 소머리국밥을 한동안 잊었다. 먹을 기회도 드물었고 굳이 소머리국밥이 아니어도 먹을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얼마 전에 먹어본 <풍미연>의 소머리국밥은 아련한 추억과 함께 소머리국밥의 모범답안을 만난 듯해 반가웠다. 예전 곤지암에서의 국밥도 나쁘지 않았지만 누린내 나는 집이 더러 있었다. 한창 먹성이 왕성했던 때라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조금은 허전하기도 했다. 요즘 곤지암 소머리국밥은 어떤지 모르겠다.
<풍미연>의 소머리국밥은 한우소머리곰탕(8000원)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한우소머리곰탕은 우선 국물이 맑고 고소하다. 이 집은 소머리국밥만 파는 집이 아니다. 한우 한 마리 전체를 들여와서 설렁탕, 꼬리곰탕, 내장탕, 수육전골, 곱창전골 등 소고기로 만드는 탕류는 모두 취급한다. 그러다 보니 소머리 이외에 다른 부위까지도 활용이 가능하다. 소 뼈와 다른 부위 고기를 함께 넣어 서너 시간을 고아 국물을 낸다. 단순히 소머리만으로 끓이는 집보다 국물 맛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도 않다. 맛을 낸다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넣은 것 같지는 않다. 딱 먹기 좋고 맛이 붙을 정도로만 조연들이 뒷받침해준다.
<풍미연>의 한우소머리곰탕의 미덕은 푸짐함에도 있다. 삶은 사태, 양지, 머리고기를 180g씩 넣어준다. 얼핏 보기에도 국물보다 건더기가 많아 보인다. 건져서 겨자 소스에 아무리 찍어먹어도 뚝배기의 고기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느낌으로는 180g을 훨씬 초과한 듯 하다. 웬만한 사람은 배가 터질 지경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건더기에 우설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우설을 아주 고급요리 재료로 쓰고 우리나라에서도 맛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소머리국밥인 한우소머리곰탕을 먹으면 우설도 맛 볼 수 있다.
우설을 비롯, 고기 부위가 워낙 다양하고 푸짐해 술꾼들은 수육을 안주 삼아 식사와 반주를 함께 즐긴다. 한우소머리곰탕은 서민의 음식이되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질이나 양에 비해 비싸지 않으면서 제대로 한끼 먹을 수 있는 음식. 점심시간을 지나서도 끊이지 않고 손님이 들어왔다. 그들이 원하는 식사 패턴이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말까지는 원래 국밥 값인 8000원에서 1000원을 에누리한 7000원만 받는다고 한다.
샤부샤부와 우동 접목한 다목적 메뉴, 한우 모듬수육전골
한우소머리곰탕으로는 성에 차지 않거나 여럿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다면 한우 모듬수육전골(3만5000원)을 권하고 싶다. 우설, 양지, 사태, 머리고기로 다양하게 수육을 구성했다. 이 수육들을 먹고 나면 남은 국물에 샤부샤부처럼 배추 속, 버섯, 쑥갓, 대파, 부추 등 싱싱한 채소들을 데쳐서 먹는다. 채소들을 먹고 나면 마무리로 우동을 끓여먹는다. 함께 내온 사리를 고기와 채소가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삶아 먹는 재미는 예상치 못한 기쁨이기도 하다. 술과 수육을 먹고 난 다음에 먹는 우동 맛은 그 자체로도 좋지만 일종의 선주후면을 즐기는 방법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여럿이 술을 마실 수 있고 식사 대용으로도 꽤 괜찮은 메뉴다.
넉넉하게 넣은 썬 대파 향이 깔끔한 국물 맛을 더 진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조미료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것도 조미료를 꺼리는 사람에겐 희소식이다. 한우소머리곰탕과 한우 모듬수육전골 은 음식 특성상 장 노년 고객이 많다. 화학조미료라면 질색하시는 어르신들에게 맘놓고 대접할 수 있다. 역시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 단위 손님들이 눈에 많이 띈다. 젊은 청년은 중년의 엄마 아버지를, 중년의 자식은 노년의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 모습들이 참 다복해 뵌다. 하긴 효성스런 자식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무슨 조미료가 더 필요하랴.
샤부샤부와 우동을 접목한 점이 젊은 층과 주부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모양이다. 의외로 20대와 30대가 즐겨 찾는다. 맑고 개운하면서 깔끔한 국물은 연령 불문하고 누구나 맘이 끌리게 한다. 술 먹기 전에, 술 먹으면서, 술 먹고 나서 등, 술과 함께라면 언제나 좋을 국물이다. 수육과 함께 먹는 찬류도 궁합이 잘 맞는다. 젓갈 향 구수한 겉절이, 적당히 익어 맛이 든 섞박지, 담백하고 개운한 알타리 장아찌, 양배추 샐러드 등이다. 양배추 샐러드는 들깨소스로 맛을 냈는데 과일을 갈아 넣어 너무 달거나 시지 않고 들깨 향을 그대로 살렸다. 누구 입맛에나 맞지만 특히 주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이 집은 식당 입구에 커다란 가마솥 세 개를 설치하고 여기서 국물을 고아낸다. 누구나 끓이는 모습과 과정을 볼 수 있도록 공개했다. 밥도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서 짓는다. 밥맛이 그야말로 가마솥 밥맛이다. 식사 뒤 먹는 숭늉은 이 가마솥 밥의 누룽지로 만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면 뱃속과 입안이 편안하고 깔끔하다.
<풍미연>은 꽤 규모가 큰 식당이다. 내부 벽면에는 예서체와 한글 궁체로 쓴 액자가 여기 저기 걸려있다. 취어당(取魚堂)이라는 호(號)를 쓰는 이 집 주인장 김해경 씨의 작품들. ‘풍미연’이란 옥호는 북송시대의 시인 소동파가 애용했던 벼루의 이름이다. 후세에 문명을 떨치긴 했지만 소동파의 삶은 우여곡절과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김씨 역시 부친의 사업 실패와 함께 불우한 성장기를 지내왔다고 한다. 이때의 배고픈 체험이 어쩌면 국밥 집을 내게 된 무의식적 원인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은 배가 든든하게 차서 나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집의 푸짐한 소머리국밥의 비밀은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쌓아 우리 힘으로 우리 그룹을 움직여보자던 맹세. 그날의 의욕과 패기를 뒤로 한 채 장년을 맞이했을 동기생들. 수 십 년의 우여곡절을 겪었을 내 친구들, 이제는 어디서 무엇들을 하시는지? 언제 한자리에 모여 소머리국밥에 수육이라도 한 점씩 하고 싶다. 말년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오다 죽은 소동파에게도 소주 한 잔 따라주고….
<풍미연 (風味硯)> 서울시 노원구 상계2동 323-11 / 02-936-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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