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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년 전, 빌딩숲 자리엔 구석기 사람들 움막이 있었다 (전남일보 2013. 01.11. 00:00)

4만년 전, 빌딩숲 자리엔 구석기 사람들 움막이 있었다

광주 아시아 기행 ② 광주에 남은 인간 최초의 흔적, 치평동 유적

 

인류는 빙하시대의 자연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최초의 문화를 이룩한다. 이 문화는 석기의 제작과 인간의 진화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 시기를 우리는 구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인류가 언제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35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의 출발은 이보다 훨씬 늦은 70만 년 전이고,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광주ㆍ전남의 경우는 이보다 더 늦다.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직립이 가능해짐에 따라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돌을 깨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생산도구였던 석기를 다듬는 기술을 기준으로 구석기 시대는 전기(350만~12만5000년 전), 중기(12만5000~4만년 전), 후기(4만~1만년 전)로 나뉜다.

전기는 큰 석기 하나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고, 중기는 큰 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해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크기도 점점 작아지고 하나의 석기가 하나의 용도만을 가지게 된다. 후기에는 쐐기를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들 수 있었다.

최근까지도 한반도 곳곳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 유물이 계속 발굴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전반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굴 조사되기 전까지 한반도는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1935년 함경북도 동관진 유적에서 몇 점의 석기와 동물뼈가 조사되었지만, 한국사의 단계적 발전을 부정하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70년대 말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의 발굴을 시작으로 한반도 곳곳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굴 조사된다. 이는 한반도가 구석기인들의 삶의 보금자리였음의 증거들이다.

인류 최초로 등장한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지 궁금하다. 구석기인들은 불을 사용하였고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면서 무리를 이루어 사냥을 하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 후기에는 슴베찌르개가 사용되었고,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상원 검은 모루 동굴,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70만년 동안 한반도의 주인공이었던 구석기인들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광주 최초의 인간 흔적이 남아 있는 서구 치평동(92-1번지) 유적은 극락강과 그 지류인 광주천 주변의 동남쪽에 형성된 30~40m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1996년 조선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9개의 지질층을 갖고 있었고, 그 지질층에서 2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1문화층에서는 몸돌 1점, 조각돌로 만든 긁개 2점이, 그리고 구석기 2문화층에서는 몸돌 2점, 격지, 찍개, 여러면석기, 조각돌이 각각 1점 등 지표에서 채집된 유물을 포함하여 총 12점이 확인된다.

이 유적의 연대는 토양쐐기를 마지막 빙하기의 추운 시기에 형성된 언땅트기(mud crack)의 결과로 볼 때, 산소동위원소에 따른 시기구분상 2기(24110±4930~12050±3140)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를 치평동 유적의 지층에 적용해보면, 구석기 2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의 늦은 시기에 해당되고, 구석기 1문화층은 이보다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구석기 1문화층의 연대는 구석기 2문화층에 이르기까지 쌓인 약 3m에 이르는 퇴적 두께와 그 사이에 적갈색 모래질찰흙층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도 있다.

광주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점, 제1문화층이 중기 구석기 단계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 광주의 신도심은 시청이 버티고 있는 상무지구다. 한 때 이곳은 대한민국 군 장교 양성의 요람이기도 했다. 1994년, 상무대가 장성으로 옮겨가면서 지금 전남중학교 주변인 치평동 92-1번지 일대가 구석기인들의 보금자리였음이 밝혀진다.

시굴된 유적은 다시 흙으로 덮어지고, 그리고 그 위로 고층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수 만년이 흐르면서 구석기인들의 주거지였던 막집은 이제 21세기의 주거지인 아파트로 변해버렸다. 아파트 빌딩 속에서 수만 년 전의 구석기인들의 막집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치평동 유적은 광주에 남은 인간 최초의 흔적임은 분명하다.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ㆍ 광주 국제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