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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해전(1)- 왜병 3만명 단 한번 해전에서 전멸 (조선일보 2014-09-27 12:20)

  백촌강 해전(1)- 왜병 3만명 단 한번 해전에서 전멸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東아시아 세계의 질서는 신라의 이니셔티브로 형성되었다

 

663년 백제부흥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도착한 400척 3만의 왜군은 나당(羅唐)연합군에 대패하고 한반도(韓半島)문제에서 손을 뗀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국 신라의 구상대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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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과정을 다룬 KBS '대왕의 꿈' 중 백촌강 전투 부분.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왜병 3만을 상실한 왜국(倭國)의 충격
 
백촌강(白村江) 전투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삼국사기)」·「舊唐書(구당서)」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의 천지(天智) 2년(663) 條의 관련 기사가 가장 리얼하다. 그럴만도 하다. 전쟁을 밥 먹듯이 해 온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달리 일본열도에선 그런 대규모의 해전, 그것도 국제전으로 치러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런 참패를 경험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국(倭國)에게 유사(有史) 이래 최악의 충격이며 비극이었다. 왜국은 백제(百濟)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3만2000명 이상의 대군을 한반도에 밀어넣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왜병 중에는 포로로 唐(당)에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왜국의 인구가 500만 명이라고 추산했을 때 3만 명의 원정군이란 숫자는 참으로 傾國之兵(경국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무리한 대비일는지 모르지만, 인구 1억3000명에 이른 오늘의 일본에 그것을 대입시킨다면 해외파견군 80여만 명을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상실한 셈이 된다.
 
  다음은 「日本書紀」 天智 2년(663) 條에 기록된 「白村江의 전투」 상보이다.
 
 < 秋 8월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良將(양장: 福信)을 목 베어 죽인 것을 듣고 곧바로 백제로 공격해 들어가 먼저 州柔(주유: 周留城)를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이에 백제왕이 신라의 침공계획을 알고서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대일본국의 구원군의 장군 廬原君臣(여원군신: 이오하라노 키미오미)이 용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白村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의 장군들을 접대하리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왕」은 義慈王(의자왕)의 아들로서 660년 백제의 패망 당시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백제부흥군의 군사지도자 복신(福信)의 요청에 의해 662년 5월 왜군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옛 백제땅으로 돌아와 王으로 옹립된 부여풍(扶餘豊)이다. 日本書紀엔 그의 이름이 「부여풍장(扶餘豊璋)」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위의 인용문 중 「大日本」 또는 「日本」은 「倭國(왜국)」으로 표기되어야 정확하다. 왜냐하면 「日本」 이란 국호는 그로부터 7년 후인 670년부터 제정·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황(天皇)」이란 칭호도 670년 이후에 사용된 日本 임금의 칭호이다. 다만 이 글에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통례(通例)에 따라 670년 이전의 日本 임금에 대해서도 천황호(天皇號)를 사용하기로 한다.   
  
  
 빅뉴스―복신(福信)의 주살(誅殺)
  
  
 
  
 

 북신이 부여풍에게 참살당했다―이건 빅 뉴스였다. 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복신은 최고의 군사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적국 지도부의 자기분열과 유혈숙청,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바보는 없다. 나당(羅唐) 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제부흥군의 사령탑인 주류성(周留城)이었다. 주류성만 떨어지면 백제의 옛땅 곳곳에서 봉기하여 여러 성에 할거하고 있던 부흥군들이 제풀에 꺾일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친히 김유신(金庾信)을 비롯한 28將과 대군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향발했다. 당고종(唐高宗)도 좌위장군 손인사(孫仁師)에게 대병(大兵)을 주어 옛 백제땅으로 급파했다. 손인사의 부대는 웅진성에 주둔 중이던 유인원(劉仁願)의 부대와 합류했다.
 
  그렇다면 부여풍은 왜 이런 결정적 시기에 약간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주류성을 빠져 나온 것일까?
 
  『왜국의 장군들을 마중하여, 향응을 베풀겠다』는 그의 말은 출성(出城)의 정당한 이유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나가면 주류성에 농성 중인 부흥군의 장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구원에 나선 왜군으로서도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의 전략적 가치는 낮아지게 마련이었다.
 
  이때 부여풍의 심경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沒(몰)전략적 행보가 백촌강 전투의 승패를 가름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은 이어지는 「日本書紀」의 기록이다.
 
 < 8월17일, 신라군이 이르러 주유성을 에워쌌다. 한편 당군의 여러 장수는 병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주류성과 백촌강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설들이 분분하다. 충남의 홍성 說, 연기 說, 그리고 전북 부안 說 등이 제기되어 확정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학계의 다수설에 따라 주류성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으로 比定(비정)한다. 주류성을 지금의 건지산성이라고 한다면 관련 사서들의 지형 묘사로 보아 백촌강(중국 측 기록에선 白江)은 지금의 금강하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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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하구. 이곳이 663년 羅唐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왜국 원정군 연합이 白村江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현재, 왼쪽이 전북 군산이고 오른쪽이 충남 장항.

   
  적 깔보고 전공(戰功) 서둘러
 
  나당연합군의 작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신라 문무왕과 唐將 손인사·유인원은 나당 육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했다. 유인궤·杜爽(두상)이 이끄는 당의 수군은 금강 하구에 포진했다. 수군의 임무는 주류성을 구원하러 오는 왜국 수군의 금강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의 수군을 육상으로부터 원호하기 위해 신라의 기병부대가 금강하구 방면으로 달려갔다.
 
 < 8월27일, 일본의 水軍 중 처음에 온 부대가 大唐의 水軍과 대전하였다. 일본이 이롭지 못해 물러났다. 당 수군은 견고하게 陣形(진형)을 갖추었다>
 
  금강하구에 먼저 진출한 왜군의 병선이 후속군의 도착도 기다리지도 않고 唐의 수군을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상대의 전력을 깔보았고 그런 안일한 판단하에 전공을 서둘렀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왜국 수군의 통제가 느슨했음을 엿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으로 일본 수군이 받은 데미지는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첫날의 서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은 후속부대가 금강하구에 도착하여 전력을 증강시키자 다시 적을 얕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양국 수군의 전력은 어떠했을까.
 
  「日本書紀」는 당 수군의 전함수를 170척이라고 명기한 반면 왜군 함대의 규모는 생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기록상의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왜군이 당군보다 더 많은 병선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던 만큼 고의적 누락일 수도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신라본기)엔 『왜국 수군 병선의 척수가 1000척에 이르러 白沙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측 기록인 「舊唐書」 유인궤 傳(전)에는 『왜국 수군의 함대 규모가 「400척」으로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속단할 수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던 왜국 수군의 全함대, 舊唐書는 백촌강 전투에 참여한 왜국 수군 함대의 규모만 한정하여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8월28일, 드디어 이틀째 전투가 개시되었다. 唐 함대 170척 대 왜국 함대 400척의 결전이었다. 병선의 수에서 보면 당시의 슈퍼파워인 唐 수군의 규모가 오히려 열세였다. 唐의 전선(戰船)이 큰 데 비해 왜국의 전선은 작았는지는 모른다. 당시, 왜국의 조선 기술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日本書紀」는 이날의 전투경과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8월28일, 일본의 여러 장군과 百濟의 王이 氣象(기상)을 보지 않고, 『우리가 선수(先手)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시 일본은, 대오가 난잡한 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陣을 굳건히 한 大唐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大唐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협격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官軍(관군:왜군)이 패전했다. 水中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이물(뱃머리)과 고물(船尾)을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면서 수십 인을 죽인 다음 마침내 전사했다. 이때 백제왕 豊璋(풍장: 부여풍)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그렇다면 중국 측 기록은 어떤가. 다음은 「舊唐書」 유인궤 傳에 묘사된 白江(白村江)에서의 전투장면이다.
 
 < 유인궤는 왜국 수군과 백강의 하구에서 조우했다. 4번 싸워 4번 모두 이겼다.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다. 그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왜국 수군은 궤멸하고 부여풍은 몸을 빼어 도주했다. 당·신라 연합군은 豊이 소지하던 보검을 손에 넣었다. 가짜 왕자 扶餘忠勝과 忠志 등은 士女 및 왜국군 병사, 耽羅國(탐라국: 지금의 제주도)의 使者를 이끌고 일제히 투항했다>
 
  전투 결과는 위의 인용문와 같이 왜국 수군의 참패였다. 왜군의 패인은 「氣象(기상)」을 무시한 선제공격으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기상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기상이라고 하면 潮流(조류)·海流(해류) 등을 포함한 天候(천후), 즉 하늘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諸(제)현상을 지칭한다. 날씨는 현대의 걸프전쟁에서도 실증되었듯이 승패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날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역사의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특히 범선시대의 해전에서 기상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지배권을 확립시킨 악티움 해전은 북동풍이 승패를 갈랐고,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제1·2차 일본 침공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바람과 해류를 이용한 영국 함대에게 궤멸당했다. 임진왜란 때 元均(원균)은 기상을 무시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다 풍랑 때문에 실패한 다음 회군 중 칠천량에서 궤멸당했고, 李舜臣(이순신)은 명량해전 때 함선수 13척 대 300척의 절대열세에서도 조류를 이용하여 왜군에 승리했다.
 
  최근, 일본의 학계 일부에서는 왜군의 패전 이유로 기록된 「기상」은 단지 天候(천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기상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 군이 선공하면 적군은 물러난다」라고 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한 각개 돌격작전을 채택 또는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확히 해야 「기상」의 정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개별적 돌파를 감행하더라도 적의 전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예단은 전날 전투 때처럼 왜국 수군의 지휘계통이 통합되어 있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백촌강 전투 당시, 왜국 수군은 여러 연안·도서 지방 호족들의 병선들을 끌어모은 연합함대였다. 당연히 전투의지가 넘치는 지휘관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지휘관도 있었을 터이다.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았던 만큼 전투의 의지의 분열은 불가피한 결과인지 모른다.
 
  따라서 「기상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수군지휘관들의 분열된 견해를 사전에 전혀 조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래 「기상」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심리 및 감정, 즉 기질· 기성(氣性)·심기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왜국은 해군·조선 부문의 3류국이었다. 해전의 경험이라고는 소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동북지방의 「에조」라는 미개민족을 정벌했던 정도였다.
 
  더구나 한반도 서해안에의 원정은 애당초 무리였다.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은 12시간 주기(하루 두 번 높고 두 번 낮은)를 보이는 착잡한 해역이다. 간만의 차가 커서 어정거리다가는 배 밑바닥이 갯벌 위로 올라가 버린다. 이런 조건에서 왜국 수군은 전술적으로 통합적인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국 수군의 분열은 언제, 무엇을 계기로 생긴 것일까. 백촌강 전투 전후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백제부흥군의 왕 부여풍이 주류성을 빠져나온 사실이 주목된다.
 
  왜국 수군은 금강 하류 연안에 위치한 주류성을 구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집결했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시라도 바삐 주류성을 구원해야 했다. 그 이유는 주류성이 부흥군의 핵심적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무모한 敵中 돌격을 감행했던 까닭
 
  그러나 부여풍은 오랜 농성생활에 권태를 느꼈을까, 아무튼 주류성을 이탈해 있었다.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에서 농성 중인 병사둘의 전투의지는 감퇴될 수밖에 없다.
 
  왜국 수군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들에게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은 전략적 가치가 반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왜국 수군은 당의 수군에 의해 진로인 금강하구를 차단당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왜국 수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것이다. 그것은 唐 수군에 총공격을 걸어 그 일각을 돌파하여 주류성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唐 수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일시철퇴할 것인가,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합 지휘체계가 미비했던 데다 적을 앞두고 있었던 만큼 충분한 토론이나 정밀한 작전 수립은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면 지휘관들의 의견은 통일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돌격론이 채용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일째 전투 직전, 후속부대가 도착함으로써 왜국 쪽이 함대의 수에서 당군보다 우세하다는 왜장들의 교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류성이 포위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풍왕(豊王)과 왜장들은 조급했을 것이다. 주류성이 함락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왜국 수군은 戰船(전선) 400여 척에 병력 2만7000명의 규모였다. 백촌강 언덕 위에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진을 쳤다. 水戰(수전)보다 육상전투가 먼저 전개되었다. 왜국 수군을 원호하던 백제부흥군의 기병부대와 신라의 기병부대가 격돌했다.
 
  양군의 정예를 투입한 기병전에서 신라군이 이겼다.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에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강가의 적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이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장들은 함대를 당의 함대로 돌진시켰다. 당 수군의 陣形(진형)은 전날의 전투 후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당 수군은 돌격해 오는 왜선을 좌우로부터 협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당 수군은 왜선에 불화살을 날렸다. 왜병들은 전투보다 진화작업에 매달렸지만, 맞바람을 맞은 倭船(왜선)들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것은 唐의 수군이 바람을 등지고 왜군에게 화공을 벌였다는 뜻이다.
 
  왜국 수군으로서는 주류성으로 가려면 좁은 포인트인 금강하구를 불리한 풍향 속에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패전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 兵船에 붙이 붙자 왜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당나라 병사들이 쏜 화살의 좋은 표적이 되든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촌강 하구에서 네 나라의 육·해군이 뒤엉킨 국제전은 나당 연합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 9월24일, 일본의 수군 및 좌평 余自信, 달솔 木素貴子, 谷那晉首, 憶禮福留, 아울러 國民들이 테레城에 이르렀다. 이튿날(25일), 배가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
 
  일본인 학자 요다(依田豊)씨는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와서 일본의 文運(문운)에 기여, 일대 새 모습을 나타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테레城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인원은 잘 모르지만, 전후 합하여 전체 망명자 수는 5500명이 되며,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가산한다면 더 많았던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日本 역사지리 16권 6호).   
  
  
 『조상님들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느냐』
 
  
  왜국이 3년의 세월 동안 국력을 기울여 준비한 원정군은 백촌강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는 사실상 백제부흥군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구려로 달아난 부여풍의 그후 행적은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
 
  비록 주류성이 나당 연합군과 맞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 9월7일,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에 나라사람(國人)이 서로 『州柔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끝났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는가. 오직 테레城에 가서 일본의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여 볼 수 있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전부터 枕服岐城(침복기성)에 있는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날 것임을 알렸다. 11일, 무테로 떠났다. 13일 테레에 도착했다 >
 
  주류성 함락 후의 결말에 대해 이와나미 출판 「일본고전문학대계의 日本書紀의 註解(주해)」는 침복기城, 테레城, 무테에 관하여 모두 『자세히 모르겠다』고 했다. 주류성의 위치가 뚜렷하지 못한 사정인 만큼 그곳들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다만 「무테의 테레城」까지 가면 일본 장군과 軍船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했던 만큼 이곳은 일본 구원군의 안전한 중간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전쟁의 사령탑 주류성이 함락되었지만 아직도 任存城(임존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왜국의 구원군까지 참패한 상황에서 백제의 부활은 불가능했다.
 
  잔존 백제부흥군 지도자들도 이런 절망적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沙相如(사타상여)와 함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저항하던 黑齒常之(흑치상지)도 이미 복신이 주살당하고 백제-왜국 연합군마저 참패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런 흑치상지에게 당 고종이 직접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 대세를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흑치상지는 유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흑치상지를 앞세워 遲受信(지수신)이 버티는 任存城(충남 예산군 大興面 봉수산)을 함락시켰다. 지수신 또한 고구려로 망명했다. (계속)

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백촌강 해전(2) -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복신, 왜에 구원군을 간청하다

 (조선일보 2014-10-03 12:39)

663년 백제부흥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도착한 400척 3만의 왜군은 나당(羅唐)연합군에 대패하고 한반도(韓半島)문제에서 손을 뗀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국 신라의 구상대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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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이 봉기할 수 있었던 배경
 
  이제는 백제 패망 이후 백촌강 패전 직전까지의 과정을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백제부흥운동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660년 7월,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군(唐軍) 13만 명이 백제의 왕도(사비성)를 일거에 공략하여 의자왕(義慈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의자왕의 항복 후 당은 백제의 고토(故土)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했다. 648년 김춘추(金春秋: 후일의 태종무열왕)-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비밀협약」을 어기고 백제를 당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다. 전후 백제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신라에겐 통한의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백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나당 연합군의 기습적이며 압도적인 병력집중으로 왕도(王都)는 함락당하고 말았지만, 백제의 지방군은 건재했다. 이것은 나당연합군이 백제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기보다는 도성 함락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승전군의 행포에 분노한 백제 왕가 출신의 복신(福信), 서부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임존성(任存城)에서 깃발을 들자 10여 일 사이에 3만여 명의 군세가 이루어졌다. 임존성과 인접한 고마노리성(홍성군 홍성읍 고모리)에서는 달솔 여자진(餘自進)이 궐기했다. 
  
  백제부흥군의 응집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소정방의 당군은 본국으로 개선했다. 이때 의자왕 비롯하여 태자 부여효(扶餘孝)·왕자 부여융(扶餘隆)과 관료 등 1만2000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다면 백제의 전영토가 평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정방이 그렇게 철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 공략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도 풍긴다.
 
  소정방은 조국을 되찾겠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백제부흥군과 싸워 보았자 주산(珠算)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병력의 손실만 초래할 뿐이지 그 자신의 전공이 드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소모전이 불가피한 전투는 신라 쪽에 떠넘긴 셈이다.
 
  사비성-웅진성 지구에는 유인원(劉仁願)의 당병 1만 명과 태종무열왕의 왕자 김인태(金仁泰)의 7000 병력이 주둔했다.
 
  10월9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흥군의 거점 중 하나인 이례성(爾禮城: 이례성: 충남 논산시 연산면)을 공략했다. 이례성은 아흐레만에 떨어졌다. 이례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부흥군의 성 20여 개가 대거 항복해 전세는 다시 신라군의 우세로 돌아섰다.
 
  10월30일, 무열왕은 사비성 남쪽에 목책을 친 백제부흥군을 공격했다. 사비성의 진장(鎭將) 유인원(劉仁願)도 부흥군을 협공했다. 1주일 만에 백제부흥군은 22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했다.
 
  사비성 공략에 실패한 복신은 흑치상지가 지키던 임존성으로 들어갔다. 부흥군의 여러 장수들은 낙담하지는 않았다. 왜국의 구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제명(濟明) 6년(660)의 기록이다.
 
 < 동(冬)10월,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좌평 귀지(貴智)를 보내 당병(唐兵) 포로 100여 명을 바쳤다. …또 군사를 빌고 구원을 청하였다>   
  
  
 제명천황의 백제 구원 결의
  
  복신은 한 달 전인 9월에도 사미각종(沙彌覺宗) 등을 왜국에 급파하여 구원군을 요청한 바 있다. 아스카(飛鳥)의 이타부키(板蓋) 궁에서 귀지(貴智)를 접견한 제명(齊明: 사이메이)천황은 구원군 파병의 뜻을 명확하게 표명했다.
 
 < 병(兵)을 빌고 구원을 청하는 것은 예전에 들었다.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국이 궁하여 나에게 온 것은, 본방(本邦)이 망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호소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창을 베개로 하고 쓸개를 맛보고 있다. 꼭 구원해 줄 것을 멀리 와서 말하였다. 뜻을 빼앗기 어렵다. 장군에 명하여 여러 길로 나아갈 것이다.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 같이 백제 땅에 모여 그 원수를 참하고, 긴박한 고통을 덜어 주어라. 유사(有司)는 (사신에게) 넉넉히 주어서 례(禮)로써 보내어라>
 
  우선, 제명천황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여성이며 각종 역사적 기록의 보유자이다.
 
  그녀는 두 번 결혼을 하고, 두 번 천황에 오르고, 그녀의 아들 둘이 천황이 된 매우 특이한 여성이다. 그녀는 원래 용명(用命)천황의 손자 고향왕(高向王)에게 출가해 한(漢)왕자를 낳았지만, 그녀를 연모한 서명(舒明: 죠메이)천황과 재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상당한 미모였던 것 같다.
 
  서명천황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후일의 천지천황)이고 차남이 오아마(大海人: 후일의 천무천황), 딸은 후일의 효덕(孝德)천황과 결혼하여 간인(間人)황후가 되었다. 642년 서명천황이 재위 13년에 죽자 그녀는 황극(皇極: 고교쿠)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왜국의 최고 실력자는 백제계 도래인 가문 출신인 소아하이(蘇我蝦夷:소가 에미시)-입록(入鹿: 이루카) 부자(父子)였다. 특히 에미시는 643년 자신의 사촌인 고인대형(古人大兄) 왕자를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성덕(聖德)태자의 아들로서 유력한 황위계승자였던 산배대형(山背大兄)을 습격, 족멸(族滅)시켰다. 조정 내부에 소아(蘇我)씨에 대한 반감이 점증했다.
 
  서명천황과 제명 사이의 장남인 중대형과 그의 동지 중신겸족(中臣鎌足: 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은 발호하는 소아(蘇我)씨를 타도하기로 모의했다.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던 645년 6월12일, 태극전(太極殿)에서 중대형 황자 등은 이루카를 기습·암살했다. 중대형은 그가 동원했던 무사가 결행을 머뭇거리자 스스로 창을 들고 달려들어 맨 먼저 이루카를 찌를 만큼 과감한 인물이었다.     
  
 대화개혁(大化改新)으로 중앙집권체제 추진
 
  대세가 기울자 이루카의 아비 에미시도 자기 집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로써 소아(蘇我)씨의 종가(宗家)는 멸망했다. 이것을 일본史에서 「을사(乙巳)의 변(變)」 또는 「태극전(太極殿)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직후 황극천황은 물러났다. 퇴위의 이유는 소아가(蘇我家)가 그녀의 친정 쪽이고, 그런 친정가를 그의 아들 중대형이 족멸(族滅)해 버린 데 대한 회한 때문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만약 물러나지 않았다면 아들과 짜고 大臣을 살해했다는 세상의 의심을 받는 것을 꺼려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황극에 이어 그녀의 시동생 경(輕: 가루)황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곧 효덕(孝德: 고토쿠)천황이다. 중대형은 황태자가 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이후 왜국의 체제 변화는 663년 백촌강 전투 때 병력 및 함대의 동원과 관련되는 것인 만큼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즉위 직후, 효덕(孝德)은 중국의 본을 받아 처음으로 「대화(大化)」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대화 2년(646) 정월 초하루 효덕(孝德)천황은 새로 천도한 난파(難波: 나니와)궁에서 4개조로 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내렸다.
 
  이것은 귀족·호족의 세력을 삭감하고 국왕의 권한을 확대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기 위한 개혁조치였다. 이는 중대형과 중신겸족이 주도한 것으로, 일본史에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고 한다. 그 핵심사항은 『지금으로부터 모든 토지와 인민은 국가 소유로서 천황이 지배한다』는 공지(公地)·공민(公民)의 원칙이었다.
 
  물론 이로써 왜국의 중앙집권화가 단번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각 지역 호족들이 자의로 다스리던 단계를 지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정치체제가 다스리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개신(改新)정치의 추진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강화로 훗날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해외파병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개신정치의 모순도 잇달아 빚어졌다.
 
  무엇보다 천황과 황태자가 대립했다. 실권을 장악한 중대형은 653년 효덕(孝德)천황의 반대를 무시, 백관을 이끌고 구도(舊都) 아스카로 돌아와버렸다. 효덕천황은 외톨이로 난파(難波: 지금의 오사카)에 남아 거기서 병사했다.
 
  655년 1월, 효덕천황에 이어 즉위한 인물은 뜻밖에도 제명천황이었다. 그녀는 645년 「태극전의 변」 직후에 퇴위했던 황극천황이었다. 이같은 중조(重祚: 한 사람의 두 차례 등극)는 일본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례이다. 그녀가 다시 즉위하자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15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을 보내 이를 축하했다.
 
  어떻든 백제 구원에 대한 제명천황의 열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12월에 직접 나니와(難波)궁으로 행차했다. 이어 여제(女帝)는 세토 내해(內海)를 통해 남하(南下)하면서 여러 연안지역에 들러 원정에 참가할 병력을 모았고, 규슈의 쓰쿠시(筑紫)에 도착한 이후에는 병사·무기 등을 직접 점검했다. 또 준하국(駿河國: 자금의 시즈오카 지방)에 대해선 군선 건조를 명했다.
 
  군선(軍船) 건조가 거의 마무리된 661년 5월, 제명은 규슈의 조창(朝倉: 아사쿠라)궁으로 행차했다. 백제구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달 후인 661년 7월, 백제 원정군의 출발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661년 정초가 되면서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불어나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공주와 옛 왕도 부여를 계속 압박했다. 당장(唐將) 유인원이 서라벌에 급사(急使)를 날리자 신라는 구원군을 급파했다. 3월5일 이찬 품일의 부대가 두릉산성(豆陵山城)의 남쪽 기슭에 진을 치려 하다가 백제부흥군의 급습을 받고 참패했다. 두릉산성은 지금의 충남 정산면 백곡리 계봉산이다.
 
  3월12일, 무열왕의 제3왕자 문왕(文旺), 대아찬 양도(良圖)의 후속부대가 달려가 두릉산성을 36일 동안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때 신라의 병참부대가 백제부흥군의 습격을 받아 막대한 군수품을 탈취당했다. 
  
 「신무(神武)」로 찬양받은 복신(福信)
 
  두릉산성의 승리 후 복신의 부흥군은 지금의 대전 부근까지 진출하여 서라벌-웅진 간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무열왕은 몸소 백제부흥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의 포위를 풀어야 했다. 이때의 무리한 친정(親征)이 무열왕의 건강을 해친 것 같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59세의 나이로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전북 익산)에서 병사하고 태자 김법민(金法敏: 文武王)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신라로선 위기였다.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속셈은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 그리고 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백제부흥전쟁을 지도한 중심인물은 복신이었다. 그의 권모(權謀)는 「무신(神武)」으로 찬양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무왕(武王)의 종자(從子)이다. 종자란 어머니 자매(姉妹)의 아들 혹은 형제의 아들, 즉 생질과 조카를 의미한다.
 
  「일본서기」에는 복신을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뜰안에 서 있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기공비(紀功碑)에도 「귀실복신」이라고 새겨져 있다. 복신의 성씨가 귀실인 만큼 부여(扶餘)씨인 백제 왕가의 친족은 아니다. 따라서 무왕(武王)의 맏아들인 의자왕과 이종사촌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복신은 왜국에 대해 구원군의 급파와 아울러 왜국에 체류 중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조속한 귀국을 요청했다. 제명천황이 세상을 뜨자 황태자 중대형이 소복 차림으로 칭제(稱制)를 했다. 칭제란 즉위하지 않고 정무를 보는 방식을 말한다.
 
  중대형은 제명천황의 시신을 규슈의 행궁(行宮)에서 수도 아스카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다음 백제 구원문제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다급한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중대형은 그 해(661) 8월, 대화하(大花下) 아담(阿曇)과 소화하(小花下) 하변(河邊) 등에게 일부 병력을 붙여 백제로 급파했다.
 
  이어 이듬해(662) 5월 왜국에 체류 중이던 부여풍이 백제로 귀국했다. 황태자 중대형은 대금중(大錦中) 아담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 등이 병사 5000명과 막대한 군수품을 실은 병선 170척을 지휘, 귀국하는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부여풍이 귀국하자 복신은 절하며 그를 맞았다. 그 모습을 본 『(백제)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부여풍과 일본귀족 여성의 정략결혼
 
  「일본서기」에 보이는 풍장(豊璋: 扶餘豊)에 관한 기사는 약간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즉, 천지천황 즉위 전기(前紀) 9월 조(條)에 따르면 풍장은 661년 9월에 중대형(천지천황) 황태자에 의해 백제왕으로 「책봉」되고 협정빈랑과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이 이끄는 병사 5000명에 호위되어 본국의 땅을 밟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만으로는 부여풍이 직관(織冠: 19단계의 관위 중 제1위)을 받고 백제왕으로 책봉된 날과 병사 5000명을 이끌고 백제로 건너간 것이 같은 날의 일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일본서기」 천지 원년 5월 조에 의하면 부여풍이 아담비라부련)등에 호위되어 고국에 돌아간 것은 662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를 「일본서기」의 편찬 착오로 돌릴 수는 없다. 이것은 부여풍이 661년 9월에 쓰쿠시까지 내려가 중대형 황태자를 만나고 바다를 건너 귀국하려 했지만, 왜국의 국내 사정으로 대기하다가 662년 5월에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부여풍의 귀국에 앞서 왜국은 그에게 왜인(倭人) 출신의 여자를 처로 맞게 했다. 신부는 신관(神官)인 다장부(多蔣敷)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는 백제왕이 된 부여풍과 왜국을 좀더 강하게 맺어 두려는 정략결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多씨의 여성이 부여풍의 처로 뽑혔던 것일까? 물론 그녀는 당시 소문난 미인이었겠지만, 미모의 여성이라면 그밖에도 많았을 터이다. 또한 부여풍을 왜국과 엮어 놓으려면 왕족 출신 신부가 더 적합했을 터인데, 당시 대왕가(천황가)에는 부여풍과 짝을 지을 만한 적령의 여성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시 백제·왜국 왕실 간의 혼인 사례를 좀 짚어보기로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직지왕(直支王)이 여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을 응신(應神)천황에게 시집보낸 바 있다. 개로왕도 왕녀 지진원(池津媛)을 웅략(雄略)천황에게 시집 보냈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몰래 정분을 트는 바람에 웅략(雄略)이 대로하여 두 남녀를 불에 태워 죽이는 사건까지 빚어졌다.
 
  이 사건 이후 왜국 대왕가(大王家)의 혼인은 왕가 내부의 근친혼(近親婚)을 중심으로 하는, 극히 폐쇄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대왕(大王:천황)을 재생산하는 폐쇄적 혈연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多씨 가문의 여성이 부여풍의 처로 선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多씨라고 하면 「고사기」 편찬을 주도한 백제계 도래인 안마려(安萬侶)가 유명한데, 대화(大和: 야마토)를 본거로 하는 재지(在地)호족 중 명가이다. 또한 多씨는 왕가의 제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왕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씨족이다.
 
  왜국의 대왕가는 그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왕가와의 혼인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多씨처럼 제사(祭祀)라고 하는 특수부문을 관장하여 대왕가와 지근(至近)거리에 있는 명족(名族) 중에서 대역(代役)을 고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多씨 출신의 그녀는 대왕가의 왕녀에 준(準)하는 존재로서 부여풍에게 시집을 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국땅에서 외국인 남편과 어떤 결혼생활을 했던 것일까, 또한 백촌강의 전투 후에 어떤 운명에 처해졌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운 백제부흥군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부흥군은 선제공격을 감행, 유인원이 지키고 있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공주)을 포위했다. 유인원은 본국에 급보를 날려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병력을 붙여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복신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웅진성을 포위하는 한편 웅진 어귀에 큰 목책을 세워 유인궤의 증원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웅진성 안팎의 당병에게 협공을 받은 부흥군은 1만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런 패전에도 불구하고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증강되고 있었다. 승려 출신으로 백제 유민들에게 영향력이 강했던 도침(道琛)이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662년 7월, 백제부흥군은 금강 동쪽으로 진출했다. 웅진도독부와 사비성의 통로를 차단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나당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당 고종은 백제부흥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대규모의 원정군을 보내기로 결단했다. 「삼국사기」는 이때 당 고종이 손인사에게 준 병력이 40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0」 하나가 더 붙은 오기이거나 군세의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한 이른바 「호왈(號曰)」인지도 모른다. 그야 아무튼 당의 증원군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도 종군했다. 이제 부여융·부여풍 형제는 서로를 적으로 삼아 맞겨룰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부여풍과 복신의 암투
 
  신라의 문무왕(文武王)도 휘하의 김유신 등 28장(將)을 거느리고 백제부흥군 정벌에 올랐다. 이것은 신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투입했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백제부흥군의 지도부에서 고질적인 적전분열이 발생했다. 내분은 결국 상잠장군 복신이 영군장군 도침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어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여풍은 왜국이 파견한 협정빈랑과 박시전래진에게 주유성 버리고 남쪽 피성(避城: 전북 김제)으로 옮기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왜장은 왜국의 집권자 중대형의 의사를 부여풍에게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면서 호위역·감시역·자문역도 담당했던 것 같다. 두 왜장(倭將), 특히 박시전래진은 강력하게 본거지 이동을 만류했다.
 
  부흥군의 본거지를 피성(避城)으로 옮기려 했던 것은 「식량의 확보」라는 점 때문이었다. 주유상은 방어에는 적합했지만, 농성이 장기간 계속될 경우 많은 병사 및 非전투원에게 배급할 식량의 확보가 곤란했다. 그러나 나당군의 공세가 가중되던 시점이었던 만큼 본거지 이동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피성(避城)으로의 이동은 부여풍과 복신의 공동제안이었다. 적어도 이 단계까지 부여풍과 복신의 견해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후의 전개상황을 살펴보면 근거지 이동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부여풍인 것으로 판단된다.
 
  20여 년의 왜국 체류 중 천황에게 불려가 자문역도 하는 등 상당한 우대를 받으면서 궁정생활에 익숙했던 부여풍으로서는 주유성이란 험한 산성에서의 진중생활이 체질상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주유성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았을 그는 산성생활이 6개월간 지속되자 넌더리가 났을 터였다.
 
  부여풍은 박시전래진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성(避城)으로의 이동을 강행했다. 그러나 겨우 2개월 만에 주유성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663년 2월.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장군 흠순(欽純: 김유신의 동생)과 천존(天存)이 옛 백제 땅에 진군하여 거열성(居列城: 경남 거창)을 공격하여 참수 700여 급의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거물(居勿: 전북 장수)·사평(沙平: 충남 당진)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덕안성(德安城: 충남 논산 은진면)을 공격하여 참수 1700급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도 이때 신라가 백제 구령(舊領)의 남부에 대해 대규모의 공세를 벌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덕안성(德安城)이 있었던 충남 논산은 백제의 구도(舊都) 사비성 동방에 위치, 이곳을 신라군에게 제압당하면 부흥군이 구도 사비성을 탈환하기가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라군에 의해 방어진지가 허약한 피성(避城)까지 습격을 받아 점령될 위험도 있었다. 
  
  부여풍 등이 주유성으로 되돌아온 것은 「일본서기」가 기록한 대로 신라군이 피성(避城)에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부여풍 등의 결단은 군사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부여풍과 복신의 협조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