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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푸이는 ‘거친 남자’ … 툭하면 내시들 매질 (중앙일보 2014.07.27 04:06)

마지막 황제 푸이는 ‘거친 남자’ … 툭하면 내시들 매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84>

 

푸이(가운데 안경쓴 사람)와 푸제(맨 뒤)는 동생들과 우애가 깊어 여동생들을 끔직히 챙겼다. 뒷줄 오른쪽이 윈잉(?潁). 1926년 텐진. [사진 김명호]


푸이(溥儀·부의)와 푸제(溥杰·부걸)는 연년생이었다. 생긴 것도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비슷했다. 쌍둥이로 착각하는 외국인이 많았다. 성격은 판이했다.

푸이는 세 살 때 등극했다. 어릴 때부터 궁중의 예의범절을 익히고 “황제는 겸허하고 자애로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첫인상은 좋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은 거칠었다. 유아독존이 몸에 배 있었다. 내시들에게 몽둥이 찜질하기를 좋아했다. 핑계거리는 만들면 됐다. 엉뚱한 명령을 내릴 때도 많았다.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개다. 개처럼 네 발로 걸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시들은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멍멍 소리가 작으면 푸이의 몽둥이가 춤을 췄다.

푸제는 형과 달랐다. 겸손하고 말수가 적었다. 내시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부인 탕스샤(唐石霞·당석하)는 남편의 이런 성격을 싫어했다. 미덕이 아니라며 떨어져 사는 날이 많았다. 속으로 청년원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흠모했다. 장쉐량에 비하면 남편이나 푸이 따위는 성에 안 찼다. 옆에 붙어다니는 황족이라는 것들도 무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력거 끌거나 전당포 출입할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장쉐량을 흠모하기는 푸제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20세 때 장쉐량을 처음 만났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다. 나는 이 청년 장군을 하늘처럼 우러러봤다.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것을 보고 대장부는 저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순전히 무력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이 지난날의 영광을 회복하려면, 총잡이들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장쉐량을 찾아갔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털어놨다.”

장쉐량도 푸제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푸제는 사람이 괜찮았다. 나를 잘 따랐다. 나도 남처럼 대하지 않았다.” 탕스샤에 대해서는 험담과 칭찬을 오락가락했다. “훔쳐먹는 과일이 더 맛있는 법이다. 푸제의 첫 번 째 부인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고약한 여자였다. 뒷맛이 씁쓸했다. 매력은 당대에 따를 만한 여자가 없었다. 황후 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금방 들통이 나서 그렇지, 연기력도 뛰어났다. 정치가가 되었더라면, 세상을 우롱하고도 남을 여자였다. 방탕하고 음탕했다며 비난하지만 처신 하나만은 훌륭했다. 방탕이 문제지, 음탕한 건 흠이 아니다.”

군인이 되고 싶다는 푸제의 청을 장쉐량은 선뜻 들어줬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야 하는 직업이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백정과 비슷한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사관학교에 들어가라. 동북에 가면 강무당(講武堂)이 있다. 나도 그곳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우리 아버지가 세운 군사학교다. 입학은 내가 책임지마. 입학만 하면, 동북의 영화관은 모두 무료다.”

탕스샤는 남편 푸제와 함께 베이징 반점에 갔다가 장쉐량을 처음 만났다. 푸제가 옆에 있건 말건 장쉐량을 집으로 초청했다. 거절할 장쉐량이 아니었다. “다음날 푸제의 집으로 갔다. 마침 여동생들도 와 있었다. 하나같이 귀태가 넘쳤다. 범접하기 힘들었다. 특히 막내 여동생 윈잉(온영·?潁)은 도도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내게 눈길 한번 안줬다. 부인이 비단 보자기에 싼 두툼한 물건을 선물이라며 내게 건넸다. 선물을 풀어본 나는 경악했다. 몇 년간 신문에 실린 나에 관한 기사들이 예쁘게 정리돼 있었다. 이 여자가 내게 생각이 있다고 직감했다.”

장쉐량이 탕스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탕스샤도 살짝 눈을 흘기며 화답했다. 푸제는 장쉐량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시를 한 수 지었다며 화선지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날 이후, 탕스샤는 장쉐량의 거처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푸제와는 차도 같이 안 마셨다. 탕스샤가 장쉐량의 정부라는 소문이 베이징 시내에 짜하게 퍼졌다. 푸제 한 사람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던 사람들은 푸제만 나타나면 입을 닫았다. 헛기침하며 키득거렸다.

장제스의 북벌군이 베이징을 압박했다. 장쉐량은 동북으로 철수할 준비를 서둘렀다. 푸제가 전화로 칭얼거렸다. “네가 떠나면, 동북 강무당 입학을 의논할 사람이 없다. 방법을 일러주기 바란다.”

장쉐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인과 함께 톈진으로 가라. 프랑스 조계에 가면 내 둘째 부인이 있다. 그곳에 머무르면 내가 연락하마.” 푸제는 시키는 대로 했다. 탕스샤도 군말이 없었다.

몇 달 후, 장쉐량이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내 둘째 부인과 함께 동북으로 와라. 지금은 전시다. 여자 두 명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둘째 부인은 내가 전쟁터에만 데리고 다닌 전쟁부인이라 겁이 없다. 네 부인은 톈진의 내 집에 머무르게 해라.” 동북으로 가던 푸제는 다롄에서 억류됐다. 그 사이 톈진으로 온 장쉐량은 탕스샤와 동거에 들어갔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탕스샤는 호화판 억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푸제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푸이가 일본의 괴뢰로 전락하고 푸제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라며 황실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그 틈을 일본 군부가 파고들었다. 푸제와 일본 여인의 결혼을 추진했다. <계속>

김명호

죽음을 둘러싼 의문 때문에 사후에도 편치 않을 인물들이 많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 살 때인 1791년 12월 5일에 타계했다. 당시의 기록에는 몸이 많이 붓고 발진과 구토가 심했던 것으로 적혀 있다. 현대의학계에선 이를 토대로 류머티즘이 원인이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천재의 요절은 사인에 대한 갖가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이다. 소설과 희곡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다 1984년에 만들어진 영화 ‘아마데우스’가 흥행에 성공하며 전 세계 대중에게 알려졌다. 라이벌 궁정음악가가 그의 천재성을 시기해 독극물을 몰래 먹였다는 음모론은 살리에리 생존 때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여러 차례 주장해야만 했다.

널리 유포된 다른 설은 비밀결사단체 프리메이슨의 암살설이다. 모차르트가 오페라 ‘마술피리’에 프리메이슨의 의식(儀式)을 드러냈기 때문에 처결됐다는 주장이다. 모차르트가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암살을 입증할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논란들 때문에 모차르트 유해를 분석하여 확인해 보자는 여론도 일었다.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기념재단은 2006년 보관 중인 두개골이 그의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부터 했다. 그의 혈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와 재단이 보관 중인 두개골에서 추출한 유전자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두개골은 모차르트의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됐다.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인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을 함락시킨 소련군이 히틀러 측근들을 조사해 낸 결론이다. 브라운은 음독으로, 히틀러는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친위대원들이 히틀러의 유지에 따라 시신들을 곧바로 불태워 지하 벙커 위 마당에 묻었다는 내용이다. 소련군은 마당에서 유해를 파내 유골의 일부를 가져갔다.

그의 죽음을 명확하게 입증할 법의학적 근거는 없다. 소련군이 가져간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이 때문에 권총 자살의 형태로 숨진 이는 히틀러와 닮은 ‘대역’이었으며, 진짜 히틀러는 다른 나라로 탈출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아르헨티나 기자 아벨 바스티는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잠수함을 타고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지역으로 와 70세까지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근 지역에서 히틀러를 봤다는 이도 있고, 아르헨티나 연안 해저에서 독일 잠수함을 찾아다니는 집단도 있다. 히틀러가 파라과이에서 숨을 거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분명한 근거는 없다.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도 끊임없이 음모론이 생산되는 소재다. 미국 정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빈 라덴은 2011년 5월 2일 미 해군 특수요원들에 의해 사살됐다. 파키스탄 아보바타드 외곽의 은신처를 습격한 ‘넵튠의 창’ 작전의 결과였다. 특수전 요원들은 ‘가급적 생포하려고 노력하되 저항이 있으면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빈 라덴이 건물 3층에서 여러 발의 총상을 입어 숨졌고, 항공모함으로 시신을 옮긴 뒤 곧바로 바다에 수장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언론들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빈 라덴의 사망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의회의 안보 관련 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보여 줬다. 시신 수장 위치도 비밀에 부쳤다. 이슬람 테러조직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따라 빈 라덴을 생포해 어딘가에 구금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그를 생포했으나 구출용 테러가 일어날 위험 때문에 사살로 위장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반면 알카에다는 빈 라덴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