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가운데 자리한 섬 위화도
의주시의 압록강변 삼각산 위에는 관서8경의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이 있다. 임사홍의 『통군정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주성(州城)이 압록강에 임하였으니, 그 북은 여진씨(女眞氏)의 지역이고, 그 서쪽은 중국의 경계다. 섬들이 둘러 있고 언덕과 산들이 높고 험하며, 대창ㆍ소창ㆍ송골이라는 여러 산이 멀고 가까운 데서 층층이 나타나고, 겹겹이 보여 중화(中華)의 산하와 성곽의 장려함을 연상할 수 있는데, 바로 주(州)의 북쪽에 산봉우리가 뾰족이 서 있어 사방에 통하여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위에 정자가 있어 통군이라 하는데, 어느 때 세웠는지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통군정에 대해 조위는 “사방을 둘러보니 막힌 것 하나가 없어, 망망한 만상들이 분주하구나. 한 조각 마음은 우주의 끝까지, 두 눈엔 하늘땅이 좁네. 해가 지니 강광(江光)이 흔들거리고, 연기가 사라지니 해기(海氣) 짙구나”라고 하였고, 허굉은 “관하(關河)가 멀고먼데 내 마음 어떠한가. 연연(燕然)에 올라가 이름 새기고 싶네. 땅은 압록강에 다했는데 봄물은 넓고, 성은 위화도에 임했는데 저문 구름 평평하네. 연래(年來)로 나라에 몸을 바치니 마음만 부질없이 있고, 밤 고요한데 군악기 소리 들리니 꿈이 저절로 깨네. 기둥에 기대어 낮은 소리로 읊조리니 고향에 돌아갈 생각 간절한데, 기우는 달빛 추녀에 이르러 밝게 하네”라고 노래하였다.
한편 이 정자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임진왜란 때 이곳까지 온 선조가 명나라에 도움을 호소하여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도착하여 선조를 만났는데 임금의 키가 작고 생김생김이 보잘것없자 “이렇게 못난 사람을 임금으로 삼는 나라는 구해줄 가치가 없다”라고 하면서 군사들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그것을 지켜본 선조는 너무도 슬퍼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를 보던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선조에게 통군정에 올라가 큰 독을 쓰고 울라고 하였다.
선조가 통군정에 올라가 큰 소리로 울었더니 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돌아가려던 명나라의 장수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서 “임금의 위엄은 보잘것없으나 과연 임금다운 위엄이 있구나” 하고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조선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왕이 울었다고 해서 통군정을 통곡정(痛哭亭)이라고도 부른다. 이곳 의주 압록강 남쪽에 객사인 의순관(義順館)이 있다. 옛 이름은 망화루(望華樓)인데,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으로 조선 세조 때 누(樓)를 철거하고 관(館)을 두었다.
말을 달려 유유히 패강(浿江)에 오니,
배신(陪臣)이 곧 관광을 하고 싶구나.
집 떠나 천 리 마음은 차차 깨닫고,
술을 드니 팔황(八荒)이 좁은 것을 알겠구나.
말간 강 물가에는 산 겹겹이요.
요양성 아래에는 길 망망하네.
밤 깊은데 역려(逆旅)에서 잠 못 이루는데,
한 곡 어가(漁家) 소리는 짧고도 길구나.
정몽주가 의순관을 두고 노래한 글이다.
또 하나 의주의 명물이 ‘의주 금강’이다. 의주 금강산은 일명 석숭산이라고도 하는데, 산세가 날카롭고 험준하며 빼어나 금강이라고 불렸으며, 의주 땅에 있다고 하여 의주 금강이라고도 한다. 이 산 중에 금강사, 천왕사를 비롯해 명찰로 이름 높은 추월암이 있다.
압록강 가운데에 자리한 위화면에는 위화도가 있다. 위화도는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요한 현장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위화도는 검동도(黔同島)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컬으며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위의 세 섬은 그 땅이 모두 기름지고 넉넉하여 백성들이 많이 경간(耕墾)했는데, 천순 5년(1461) 신사에 농민들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들에게 잡혀가는 일이 생겨 그 뒤부터는 관(官)에 경간을 금하였다.
고려의 신우(우왕)가 그의 재위 14년 5월에 요동 정벌의 명을 이성계에게 내렸다. 그때 이성계는 군사 6만 명을 거느리고 위화도에 머물고 있었다. 한데 장마가 들어 크게 곤란해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성계는 다시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사람을 보냈으나 오히려 빨리 진군하라는 명령뿐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장군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상국(上國)의 지경을 침범한다면 천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므로 나라와 백성에게 큰 재앙이 올 것이니, 어찌 경들과 임금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아뢰고, 임금 곁의 간신들을 제거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까 보냐.”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모여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이 편안하고 위태한 것은 공의 한 몸에 달렸는데, 어찌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가 흰 말을 타고 활과 흰 깃 화살을 가지고서 물가에 서서 여러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모든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서로 말하기를 “고금(古今)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에도 어찌 이러한 인물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당시에 장맛비가 며칠 동안 내렸어도 강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군사가 겨우 다 강기슭에 닿자 큰물이 몰려와서 온 섬이 잠기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본 병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이성계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이성계는 백성들로부터 술과 고기 등의 대접을 받으며 송도로 진군했고, 이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송도에서 군사를 모으려 했으나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해 결국 이성계에게 패하고 최영도 그의 손에 피살되고 말았다. 그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으나 얼마 후 왕위를 물려받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압록강 가운데 자리한 섬 위화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10.5,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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