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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이 만주 대륙등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스머프할배학당(adcsk) 2010.03.29 11:02)

우리 조상들이 만주 대륙등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우선 고조선과 고구려의 지배 영역을 지도로 소개를 하고 설명을 합니다.

 

<1> 아래 지도 인용을 보듯이 고조선이 만주를 지베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대륙이 통일 제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을 정도 입니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훈족()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았습니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하였습니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습니다. BC 195년 연왕() 노관(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위만(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2> 고구려도 중국 대륙에 통일 제국이 형성되지 않은 기간에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 ·)와 통교하였고, 유연() 등 새외()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습니다.

 

<아래 지도와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을 더 읽어 보세요.>

 

 

 

 

제목 : 고조선의 세력 범위
사진크기 : 467*6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대동강, 한반도까지 그 세력범위를 넓혀갔는데,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출토 분포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 설립(372), 율령()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 ·)와 통교하였고, 유연() 등 새외()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 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패사()시켜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아산만()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왕()은 494년 부여()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