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료

특별히 부탁받았는데… 운명하셨습니다 (한겨레 : 2013.04.19 15:04)

수퍼보이 2013. 4. 20. 20:50

특별히 부탁받았는데… 운명하셨습니다

 

수술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6) 공포의 VIP 신드롬

필자처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종종 부탁을 받는다. 병실을 마련해 달라거나 진료일을 앞당겨 달라는 등 정말 난감한 부탁들도 많다. 그러나 아마도 “내 지인이 어느 병원에 누구 앞으로 입원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연락을 해서 신경을 좀 써 달라고 얘기해 달라”는 게 가장 많이 받는 부탁이다. 담당 의사에게 신경을 더 써 달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서 부탁을 하는 것이겠지만, 의사들은 누구나 그런 부탁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탁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더 많이 신경쓰는 환자에게 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현상을 의사들은 ‘브이아이피(VIP) 신드롬’이라고 한다. 일종의 징크스에 대한 공포도 있다. 의사들이 자신의 가족을 직접 수술하지 않는 이유도 브이아이피 신드롬 때문이다.

의사들이 가장 많이 받는
누구누구 신경써달라는 부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뜻하지 않은 부작용 가져온다
신경을 쓸수록 위험한 역설

아들 담임선생님 아버지가
가슴 통증으로 입원했다
수술 마치고 퇴원하는 날
짜장 색깔의 변이 나왔다
두번의 위출혈 지혈했지만
세번째는 수술이 필요했는데…

 

의사들이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이유  

내가 처음 브이아이피 신드롬을 겪은 것은 20여년 전 전공의 시절이었다. 내가 소속된 과장님과 친분이 있는 어느 신부님이 심장판막수술을 받으신 뒤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 심장수술 후 감염이 비교적 흔하던 시절이었다. 심장수술 후 생기는 세균감염은 매우 위험하다. 심장 주위로 염증이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 후 신부님의 염증이 깊어 가슴 상처를 다시 절개한 뒤 여러 날 동안 상처 소독을 했다. 정성을 들여 치료한 덕택에 염증은 가라앉았고, 개방을 해놓았던 상처를 다시 닫았다. 며칠 관찰한 결과 염증이 확산되는 징후는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환자에게 미열이 생겼다. 상처는 괜찮아 보였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신부님은 며칠간의 특별외출을 부탁했고, 과장님은 미열 때문에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부님은 ‘밀린 일이 많다. 신부에게 성탄절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느냐’며 꼭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잘 아는 사이인데다 간곡히 부탁하니 과장님은 곤란해했다. 미소 띤 얼굴의 간곡한 부탁에 과장님은 끝내 “그렇게 하시죠. 대신 열이 오르면 곧장 병원으로 오셔야 합니다” 하고는 차트에 외출 사인을 하셨다. 실수였다. 얼마 뒤 야간에 신부님은 고열로 병원을 찾았다. 상처는 그사이 벌겋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잠깐 사이 염증이 확 퍼진 것이다. 패혈증에 빠진 신부님은 약 2주 뒤 돌아가셨다. 과장님을 비롯한 의료진들이 환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브이아이피가 아니었다면 매몰차게 거절했을 것이고 어쩌면 신부님은 패혈증에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번째 기억나는 브이아이피 신드롬은 내 환자다. 의사들은 모든 환자들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가지지만, 특히 지인에게 사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더욱 힘들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약 15년 전, 한 대학병원 교수로 있을 때 일이다. 68살 남자가 자주 찾아오는 가슴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검사 결과 진단명은 관상동맥이 좁아져서 생긴 ‘협심증’이었다. 혈관이 여러 개 좁아져 있고 당뇨병도 있어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 환자는 보통 환자가 아니라, 당시 내 아들이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부친이었다. 그 담임선생님은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작은 교회였고 나는 선교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분이었다. 환자는 내게 ‘최고의 브이아이피’였다.

환자에게는 좁아진 관상동맥에 우회도로를 만들어주는 관상동맥우회로술이 필요했다. 내 전문 분야였고 수술 성적도 좋았으므로 환자도, 환자의 딸인 아들의 담임선생님도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그가 브이아이피여서 각별히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럴수록 평범한 환자처럼 대하려 애썼다. 브이아이피 신드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다. 네 곳의 관상동맥에 우회로를 만드는 관상동맥우회로술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수술 뒤 경과도 좋았다. 수술 뒤 8일째 되는 날, 나는 아침 회진에서 인사를 나누고 퇴원을 지시했다. 뒤돌아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환자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저 오늘 아침 변을 봤는데요. 색깔이 꼭 짜장 색깔처럼 새까만 변을 봤어요….”

짜장 색깔의 변. 그것은 상부 위장관, 즉 식도나 위 혹은 소장 윗부분의 출혈을 암시했다. 그중에서도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 가장 흔하다. 안 그래도 환자는 위궤양으로 치료받은 전력이 있어서 수술 직후부터 위궤양 치료제를 투여하던 참이었다. 환자들에겐 ‘심장수술’이라는 큰 수술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에서 나오는 코르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들로 인해 위궤양이 악화되기도 한다. 즉시 퇴원을 취소하고 검사를 지시했다.

몇 시간 뒤 위내시경 검사 결과가 나왔다. 위궤양이 악화돼 그곳에서 출혈이 있다고 했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위내시경을 통한 ‘클리핑’으로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클리핑이란 일종의 호치키스(스테이플러)처럼 클립을 이용하여 출혈을 일으키는 혈관의 양쪽을 집음으로써 지혈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뒤 며칠 동안 관찰을 하였으나 추가적인 위 출혈 소견은 없었다. 나는 다시 퇴원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도 퇴원 당일에 또다시 위출혈이 발생했다. 즉시 소화기내과에 연락했고, 환자는 두번째 클리핑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았다. 이번에는 환자에게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말했다. 주말 동안 병원에서 잘 지켜보고 괜찮으면 주초에 퇴원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다량의 출혈… 내가 그냥 배를 열까 말까

일요일 오후 호출기가 울렸다.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이번에는 환자가 피를 토해내는 토혈까지 했다는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토혈의 양이 많아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복부수술을 담당하는 일반외과에는 응급수술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연락을 해놓고, 또다시 응급으로 클리핑을 시행할 소화기내과 당직 스태프를 찾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당직 내과의사는 이번이 벌써 세번째니 아예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외과에 다시 연락을 했다. 잠시 후 답변이 왔다. 외과 당번 교수가 당장 달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일반외과 의사에게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말은 해두었지만, 환자의 상태는 외과의사를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내과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또 한번 클리핑을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환자를 부리나케 내시경실로 옮겼다.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다시 클리핑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소화기내과 의사가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혈을 하려면 클립으로 출혈을 일으키는 작은 혈관을 잡아야 하는데, 숨이 가쁜 환자가 헐떡이는 바람에 그 작은 혈관을 잡아 지혈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점차 쇼크 상태로 빠져들었다.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위궤양으로 인해 위벽이 많이 헐게 되면 위벽 안에 있던 혈관이 노출돼 출혈을 일으킨다. 위내시경 모니터에는 위궤양과 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혈관이 보였는데, 동맥혈관에서 나오는 출혈은 높은 압력으로 인해 반대쪽 위벽을 강하게 일직선으로 때리고 있었다. 화면을 통해 엄청난 출혈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축축해진 환자의 손을 잡았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혈관이 잡히지 않자, 내과의사는 환자에게 더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숨을 참으셔야 해요! 숨을 못 참으시면 잘못하면 위에 구멍이 난다구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속으로 “위에 구멍이 나면 어떤가. 이러다 돌아가실 판인데 좀 과감하게 하시지…”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끝내 그 말을 못했다.

수십분 동안 땀에 흠뻑 젖도록 힘을 썼지만 내시경을 이용한 지혈은 실패했다. 내과 전문의는 결국 클리핑을 포기했다. 그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는 장갑을 벗고 내시경실을 떠났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 환자를 다시 이동식 침대에 태우고 나는 수술실로 침대를 밀었다. 외과 교수는 도착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술 준비를 모두 마치고도 점점 쇼크 상태에 빠져드는 환자를 지켜보면서 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외과 스태프를 마냥 기다렸다. 사실 굳이 일반외과 교수가 왔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생각됐다. 단순히 위를 열어 지혈하는 것은 그리 고난도의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외과 전공의(레지던트)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공의가 수술 책임을 지지 않도록 되어 있는 병원의 원칙상 어쩔 수 없이 교수를 기다려야만 했다. 비록 내가 가슴을 여는 흉부외과 의사지만, 생각 같아서는 내가 그냥 배를 열고 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위를 손으로 누르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흉부외과 의사들은 주로 가슴을 수술하지만, 복부 대동맥 등의 수술을 위해 배를 여는 개복수술도 흔히 한다. 위를 절개하는 것은 일반외과 의사의 영역이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병원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1분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이윽고 일반외과 스태프가 도착했다. 그동안 환자의 출혈을 따라가기 위해 계속 수혈이 돼야 했다. 일반외과 의사가 배를 열자마자 부풀어오른 위가 튀어나왔다. 위를 절개하자 1000㏄가 넘는 혈종(혈액이 한곳으로 모여 혹과 같이 된 것)이 나왔다. 일반외과 스태프는 혈종을 제거한 뒤 위를 떼어내지 않고 그냥 출혈을 일으키는 혈관을 단순 봉합했다. 그저 그뿐인 것을… 이렇게 간단한 것을… 나라도 그렇게 할걸 하는 후회가 순간 들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혈압도 다행히 안정적이었다. 의식도 깨끗이 돌아왔다. 다만 많은 양의 출혈 때문에 받은 다량의 수혈이 마음에 걸렸다. 수혈의 부작용만 없다면 아무 일 없이 퇴원할 상황이었다. 다량의 수혈 후에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급성폐손상이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다. 염려하던 대로 수술 후 환자의 폐가 급속히 나빠졌다. 다량의 수혈로 인해 급성폐손상에 이어 급성호흡기능부전에 빠진 것이다. 수술 당일 밤부터 나빠진 폐 기능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악화됐다. 사흘째 되는 날, 급기야 환자는 인공호흡기로 100% 산소를 공급받는 상황에서도 폐 기능이 유지되지 않았다. 결국 체외막 산소공급기(ECMO: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혈액을 밖으로 빼 산소를 공급한 후 다시 혈액 안으로 넣어주는 장치)를 달았다. ‘에크모’를 달고 이틀 만에 환자는 사망했다. 심장수술 뒤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의 합병증 때문이었다.

집에 못 들어간 6일, 그러나 후회와 자책뿐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걸어 들어온 환자가 하얀 천에 싸여 실려 나가는 일은 가족도 의료진도 절대 겪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아들의 담임선생님이자 같은 교회 교우의 아버님께. 일요일에 불려나가 금요일 돌아가시기까지 단 하루도 집에 가지 못하고 24시간 환자 곁을 지켰다. 내 모습을 본 환자의 가족들은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진료 현장에서 최선은 쓸모가 없다. 병원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런 가족들이 내게 책망조차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팠다.

생각할수록 후회되는 일이 많았다. 내시경으로 클리핑을 시도하던 내과 전문의에게 좀더 과감하게 하라고 강력히 말할걸 그랬나.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일반외과 교수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일반외과 전공의에게 수술을 하라고 명령해야 했나. 역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일반외과 스태프가 도착하기 전 내가 배를 열고 위를 누르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나치게 원칙을 고수하거나 다른 과에 대한 예의를 차리느라 환자가 더 많이 기다리게 됐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피를 수혈받게 되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건 아닌가. 이런 자책들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15년이 지난 뒤 이 글을 쓰고 있으니 환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너그럽고 인자한 표정을 지으시던 그분이 마치 “괜찮다. 그것은 내 운명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오늘도 많은 환자들이 병원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나보다 훨씬 용기있고 지혜로운 의사들이 더 많은 환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

*타인의 수혈에 따르는 부작용들 때문에 요즘은 많은 병원에서 응급수술이 아닌 경우 자가수혈을 이용하여 수술을 한다.

 

 

그 45분간, 할머니의 영혼은 어디에 있었을까

 (한겨레 2013.04.07 23:03)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⑤ 심장을 멈추고 하는 수술

무리한 관상동맥우회술 결정
나는 수술을 피하려고 숨었다
연신 호출기가 울려댔다
85살 환자는 마취 상태라 했다
아아, 결국 집도를 하고 말았다

수술 도중 대동맥 벽이 터졌다
발생확률 0.1% ‘대동맥 박리’
뇌로 가는 피를 멈추게 하고
인조혈관을 이식해야 했다
심장과 폐호흡이 정지됐다
부활 가능한 시간은 45분…

두 가지 궁금증. 권위 있는 웹스터 사전에는 사망의 정의를 ‘심장박동과 호흡 등 활력 징후의 영구적 정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의 목을 졸라 뇌에 피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불과 몇분 만에 뇌가 손상돼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한 시간 가까이 심장박동과 호흡이 중지되고 뇌에 산소공급조차 중지되었다가 깨어났다면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궁금한 것. 그동안 그의 영혼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 몸의 생명의 주관자는 심장과 두뇌다. 현대의학은 심장과 두뇌가 멎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싸워왔다. 심장과 두뇌를 산 채로 보존하거나 되돌릴 수 있다면 생명의 역사는 다시 쓰일지 모른다. 서울지역의 119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수술 잡힌 날에 교수님이 휴가를 떠난다고?

약 10여년 전, 한 대학병원 흉부외과 조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 주전공은 ‘관상동맥 우회로 조성술’과 ‘대동맥 수술’ 등 성인 심장 수술 분야였다. 관상동맥은 심장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의 모양이 임금님이 쓰던 관(冠)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상동맥이 좁아지면 심장에 공급되는 혈액량이 적어져 심장근육에 쥐가 난다. 이 증세는 대개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환자가 느끼기 때문에 ‘협심증’이라는 병명이 붙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어느 순간 관상동맥이 꽉 막혀 심장근육에 피가 전혀 배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를 ‘심근경색’이라고 부르고 심장근육의 세포가 죽게 되는 것으로 생명이 위험한 상태다. 북한의 김정일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심증을 치료하는 이유는 심근경색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관상동맥이 부분적으로 막혀 피가 잘 흐르지 않을 경우 치료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가장 흔히 하는 게 ‘스텐트 시술’이다. 즉, 혈관의 좁아진 부분을 풍선으로 넓힌 뒤 다시 좁아지지 않도록 스텐트(혈관 안에 삽입해 혈관을 벌려주는 원형·금속망 형태의 기구)를 그 자리에 넣는 방법이다. 이것은 가슴을 절개하는 수술을 하지 않고 허벅지나 팔의 동맥 혈관을 통해 하는 편리한 시술이다.

관상동맥이 너무 많이 망가진 환자나 당뇨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가운데 일부는 가슴을 열고 관상동맥우회로조성술(관상동맥우회술)이라는 수술을 한다. 도로가 막히면 돌아가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것처럼, 혈액이 혈관이 막힌 부위를 피해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다른 팔이나 다리 혈관을 이용하여 만들어주는 수술이다. 혈관이 좁아진 정도가 가볍거나 심장근육이 이미 많이 손상된 경우에는 약물치료만 하기도 한다. 스텐트 시술과 약물치료는 심장내과 의사가 하고, 관상동맥우회술은 흉부외과 의사의 몫이다. 내가 일하던 대학병원은 흉부외과 교수가 넷 있었는데, 과장님과 내가 관상동맥 수술을 담당했다.

협심증 환자에게 적합한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통상 심장내과 의사다. 내과적인 스텐트 삽입술과 가슴을 여는 외과적 수술인 관상동맥우회술 중 어느 게 환자에게 적합할지 심장내과 의사와 심장외과 의사가 함께 모여 의논하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심장 콘퍼런스를 열어 이런 논의를 했다.

어느 날,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는 만 85살 여자 환자의 사례가 콘퍼런스에 올라왔다. 관상동맥이 여러 곳 많이 좁아져 있고 관상동맥의 전반적인 상태가 워낙 안 좋아 스텐트 삽입술이 부적절한 환자였다. 게다가 두차례 심근경색이 발생한 적이 있어 심장근육이 많이 손상돼 있었다. 환자의 나이가 비교적 적고 심장근육 상태가 괜찮았다면, 가슴을 열고 하는 수술이라도 환자에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환자의 주치의였던 심장내과 의사가 “스텐트 삽입술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콘퍼런스에 올렸지만 수술도 적합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동의하시죠?”라고 물으며 다음 사례로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흉부외과의 ㄱ교수님이 갑자기 손을 드시더니 “수술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내 얼굴은 저절로 일그러졌다. 당시 그는 건강과 다른 몇 가지 이유로 수술의 대부분을 내게 맡기던 상황이었다. 본인이 수술을 하겠다 해도 그 환자의 수술은 내 몫이 될 게 틀림없었다. 수술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교수님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무리한 결정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하는 게 맞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또 한번 재고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는 이 환자 수술 안 합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며칠 뒤, 그 환자는 심장내과에서 흉부외과 환자로 소속이 바뀌었고 곧 수술 일정이 잡혔다. 나는 이 환자만큼은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혼자서 결심했다. 이윽고 수술 당일, 여느 때처럼 아침 7시 환자들의 엑스레이를 다 함께 보는 것으로 흉부외과의 아침 회진이 시작됐다. 나는 나보다 연배가 높은 ㄱ교수님이 이 위험한 환자의 수술을 분명히 내게 맡길 것으로 생각해, 회진 직후 호출기를 끄고 잠적할 작정이었다. 약 30분에 걸친 엑스레이 보고가 끝나자, 교수는 나를 돌아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 선생, 나 오늘 휴가를 좀 가야겠어. 내 환자 노 선생이 수술했으면 하네. 보호자 설명은 다 되었으니, 그냥 수술만 하면 되네.”

이럴 수가… 자신의 환자를 수술하는 날에 휴가를 떠난다니…. 수술이 부담스러웠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즉시 수술실로 전화해 “그 환자 수술을 취소할 테니 마취를 진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이미 마취가 되었다고 답했다.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누르고 아무 말 않고 회진을 떠났다.

회진이 끝나자마자 수술실에서 나를 찾지 못하도록 동료 연구실에 숨었다. 업무의 특성상 호출기를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0여번의 호출을 계속 무시했다. 끝내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비록 내 환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마취가 된 환자를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고민고민 하다 결국 수술실로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수술 준비된 지 한참 됐어요.” 나는 과장님을 찾으라고 했다. 간호사는 과장님은 휴가를 떠나셨다고 답했다.

 

 

순식간에 검붉은 큰뱀처럼 변한 대동맥

피하고 싶었던 환자는 결국 내 몫이 되었다.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을 끝낸 뒤 수술실에 들어갔다. 하필 그날 수술의 제1조수는 그날 처음 전임의(전공의를 마친 뒤 교수가 되기 전 단계의 전문의) 생활을 시작하는 흉부외과 전문의였고, 제2조수는 1년차 흉부외과 전공의(레지던트)였다. 제1조수를 하게 된 의사는 전문의를 취득하고 3년간 군대를 다녀온 뒤 2년간 개업을 했다가 다시 대학병원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군의관 3년에 개업의 2년, 즉 최근 5년 동안 수술실 경험이 없었다. 5년 만에 수술실에 들어온 의사를 데리고 위험한 환자의 수술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당시 젊은 혈기에 수술 실력에 지나친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경험이 부족한 조수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만이고 교만이었다.

여느 때처럼 환자의 가슴을 열었다. 요즘은 심장이 뛰는 상태에서 수술 부위만 고정을 시킨 채 하는 관상동맥우회술, 즉 무심폐관상동맥우회술(OPCAB·Off-Pump Coronary Artery Bypass Grafting)이라는 수술을 많이 하지만, 당시는 이 방식이 부분적으로 도입된 때라서 비교적 위험이 적은 환자들에게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이 환자에게는 심장을 멈춘 뒤 심장의 기능을 대신하는 인공심폐기를 사용하면서 해당 혈관에 우회도로를 만든 뒤 다시 심장이 뛰게 하는 일반적인 관상동맥우회술을 시행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대동맥에 혈액을 공급할 굵은 관을 삽입해야 했다. 심장 가까이 있는 압력이 높은 대동맥에 관을 삽입하면 관을 꽂은 주위로 혈액이 흘러나올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관이 들어갈 부분의 대동맥의 벽에 가는 실로 복주머니 입구 모양을 떠놓은 뒤 이 안에 관을 꽂고, 복주머니 입구를 조이듯 관 주위를 실로 지그시 당겨주면 관 주위로 피가 새지 않는다.

할머니의 대동맥 벽은 매우 얇았다. 조심스럽게 대동맥 벽에 복주머니 입구 모양을 만들었다. 이제 내가 관을 꽂고 그 즉시 조수가 실을 조이면 된다. 관을 꽂았다. 조수가 실을 지그시 조인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조금 세게 조인다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얇디얇은 할머니의 대동맥 벽이, 잡아당기는 실의 압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대동맥의 벽이 순식간에 찢어지기 시작했다. ‘대동맥 박리’라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대동맥 박리란 세 겹의 층으로 이뤄진 대동맥의 벽 중 안쪽 층이 파열되어 대동맥의 벽이 세로로 쭈욱 찢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파열된 곳으로 높은 압력의 혈액이 빠져나가면서 쭈욱 찢어지는 것이다. 대동맥 박리는 고혈압 등으로 자연 발생할 수도 있고 드물게는 외상에 의해서 발생할 수도 있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이 대동맥 박리가 수술 중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심장 수술 중 대동맥 박리가 발생할 확률에 대한 국내 연구자료는 없다. 외국의 연구로는 발생 확률이 약 0.1%로 보통 1000번의 수술 중 1번꼴로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 연구를 보면, 고령, 동맥경화, 얇은 대동맥벽 등이 있을 때 잘 생긴다고 하는데, 모든 조건을 갖춘 85살 할머니에게 바로 그 일이 발생한 셈이다. 대동맥은 순식간에 검붉은 큰 뱀 모양으로 변했다.

나는 곧 서혜부(허벅지)의 동맥을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대동맥 박리는 허벅지까지 이미 진행된 상태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동맥 박리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심장 근처의 대동맥을 모두 인조혈관으로 바꾸고 머리로 가는 혈관을 이식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3분만 혈액 공급 차단돼도 뇌세포는 죽는데…

휴가를 간다고 했지만 교수님은 걱정이 되었는지 수술실에 들어와 계셨다. 그는 손을 소독한 뒤 조수 자리로 들어왔다.

예정됐던 관상동맥우회술 외에도 대동맥을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우선 대동맥 혈관을 바꿔주는 ‘대동맥혈관치환술’을 해야 했다. 허벅지의 동맥과 정맥을 이용하여 인공심폐기를 돌렸다. 신속히 환자의 체온을 섭씨 37도에서 18도로 낮췄다. 심장 근처에서 찢어진 상행대동맥(머리 쪽으로 올라가는 대동맥)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머리, 즉 뇌로 가는 혈류를 잠시 중단시켜야 한다. 관상동맥우회술을 하려면 ‘생명의 주관자’인 심장을 잠시 멎도록 해야 하는데, 더 나아가 대동맥혈관치환술을 위해서 또하나의 생명의 주관자인 뇌로 공급되는 혈액까지 막아야 했던 것이다.

뇌는 3분만 혈액 공급이 차단돼도 뇌세포가 죽는다. 뇌세포의 죽음을 잠시 지연시킬 방법은 있다. 체온이 18도 이하로 내려간 상태에서는 뇌세포가 약 45분 정도 혈액 공급을 받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체온을 18도 아래로 내린 뒤 혈류가 없는 상태에서 45분 안에 혈관 교체를 완료하고 다시 체온을 올리는 방법으로 수술을 할 수 있다.(초저체온하 순환정지요법이라고 하며, 요즘은 다양한 기술이 발달하여 체온을 많이 내리지 않는 방법도 많이 사용되지만, 14년 전인 당시는 대부분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

체온이 내려가자 나는 인공심폐기를 중단시켰다. 이제 심장도 정지되었고 폐호흡도 정지됐다. 펌프가 없어졌으니, 피의 흐름이 멈춘 ‘전신순환정지’ 상태다. 물론 뇌로 가는 혈류도 없다. 환자는 사망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45분 안에 끝내야 했다. 실수도 주저함도 용인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찢어진 대동맥을 잘라 떼어내고 인조혈관으로 대체했다. 뇌로 가는 혈관들을 인조혈관에 이식했다. 이른바 대동맥을 인조혈관으로 바꾸는 대동맥치환술이 척척 진행됐다. 그사이 교수는 관상동맥우회술에 사용할 정맥혈관을 다리에서 떼어냈다.

40분이 좀 넘었을까? 대동맥을 인조혈관으로 바꾸는 대동맥치환술이 끝났다. 꺼두었던 인공심폐기를 다시 돌리면서 체온을 서서히 올렸다. 사망 상태와 다름없던 환자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이었다. 이후 다리에서 떼어낸 정맥혈관으로 인조혈관과 관상동맥의 막힌 부위 너머를 연결시켰다. 관상동맥우회술도 완료됐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심장근육 회복이 관건이었다. 인공심폐기를 돌리면서 조금 더 심장근육의 회복을 기다렸다.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지만 끝내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몇 시간 뒤 환자는 심장보조장치를 달고 중환자실로 나가게 되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며칠 뒤 할머니의 심장기능은 크게 회복됐다. 결국 인공호흡기와 심장보조장치도 제거했다. 그러나 고령으로 인해 뒤늦게 폐 기능에 문제가 생긴 할머니는 다시 인공호흡기 신세를 지다가 두 달이 넘어서야 일반 병실로 올라갔고 그로부터 한두 달 뒤 퇴원하셨다.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은 환자들이 보통 수술 뒤 하루이틀 만에 병실로 올라가고 일주일 안팎에 퇴원하는 점을 고려하면 할머니와 가족은 너무 많은 고생을 하며 수술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뼈아픈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고 돌아와 주신 할머니가 지금도 고맙다.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초저체온하에서 수술을 할 때 환자는 심장과 폐 그리고 뇌 기능이 함께 멈춰 있는 상태로 사망한 상태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사망 상태에서 수술이 진행되는 45분 동안 할머니의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의사는 “살고싶다”는 소년의 호흡기를 떼고…

 (한겨레 2013.03.22 23:02)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결핵인마을 풍경. 1965년 결핵 전문병원인 시립서대문병원이 설립되면서 전국에서 온 결핵 환자들이 모여 자연스레 형성됐다. 마을엔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2000년대 중반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추진되면서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탈바꿈됐다

 

인공호흡기를 떼고, 나는 지옥을 빠져나왔다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④ 가슴에 묻은 폐결핵 환자

폐결핵 후유증과 기흉으로
호흡곤란 호소하던 19살 청년
다시 보지 말자는 당부에도
그는 병원에 오고 또 왔다
갈비뼈도 부러뜨린 흉곽성형술
수술 뒤 반대쪽 폐가 문제였다

“선생님 살고 싶어요”라는 글씨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엄마도 울기 시작했다
가래 뽑는 횟수를 줄였다
그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가래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1989년 여름,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차였던 나는 어느 지방도시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됐다. 당시 서울 본원의 근무 여건은 주당 1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것이어서 주당 80시간 내외의 근무가 가능한 지방병원의 파견근무는 휴식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곳에서 2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묻게 될 환자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판자촌에서 형도 아빠도 결핵으로 떠난 뒤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장마가 막 시작되던 6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젊은 청년이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들어왔다. 나이 19살. 소년의 티를 벗지 않는 키가 큰 젊은이였다.

호흡음을 들어보니 양쪽의 호흡음이 모두 감소되어 있었다. 흉부 엑스선 검사 결과, 오른쪽 폐는 완전히 하얗게 변해 있었다. 폐결핵으로 폐조직이 완전히 망가져(destroyed lung), 폐(허파)는 전혀 기능을 하지 못했다.

숨이 찼던 이유는 왼쪽 폐에 갑자기 생긴 기흉 때문이었다. 기흉은 공기가 들어 있는 폐에서 바람이 새어나와 시작된다. 흉강 안에서 빠져나갈 곳이 없는 바람이 다시 폐를 누르고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것이다. 새어나온 바람의 양이 적으면 대부분 위험하지 않지만, 양이 많거나 폐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응급처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 환자는 기흉이 발생한 쪽에서 심한 폐기종 양상도 보이고 있었다. 폐기종이란 허파꽈리가 많이 망가져서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환자는 바람이 샌 양도 많았던데다 양쪽의 폐기능이 워낙 떨어진 상태였다. 숨이 찬 환자는 몹시 괴로워했다. 차트를 보니 예전에도 기흉을 앓은 적이 있었다. 두번째였던 것이다.

 

 

 

나는 폐를 누르고 있는 바람을 빼기 위해 왼쪽 가슴에 흉관(흉강에 넣는 튜브 모양의 기구)을 삽입했다. 여기저기 폐가 흉벽에 붙어 있는 유착이 있어서 폐가 다치지 않도록 흉관을 넣는 것도 어려웠다. 흉관을 통해 폐를 눌렀던 바람이 빠지자마자, 환자의 호흡곤란 증상은 바로 좋아졌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앓은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병에도 불구하고 잘 웃고 농담도 잘하며 매우 쾌활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나를 그는 형처럼 따르며 살갑게 대했다. 며칠 뒤 폐에서 새던 바람이 멎었다. 나는 “다시 보지 말자”며 웃으며 그를 퇴원해 보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약 보름 뒤, 아이는 응급실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증세가 발생했다. 지난번과 똑같은 왼쪽 폐의 기흉으로 진단이 내려졌지만, 상황은 더욱 심했다. 환자는 전보다 더 힘들어했고 의식마저 혼미했다.

이번에도 흉관을 가슴에 넣어 바람을 뺐다. 환자의 상태는 금세 좋아졌다. 나는 기흉의 재발을 막기 위해 흉막유착술을 시도했다. 흉막유착술이란 폐와 흉벽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을 일으키는 약물을 주입하는 시술이다. 이렇게 하면 염증이 폐와 흉벽 사이에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하여 기흉의 재발률을 떨어뜨리는 시술이다. 관을 통해 약물을 흉강에 주입하는 간단한 시술이지만, 흉막이 자극된 환자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시술을 잘 이겨내고 이번에도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약 열흘 뒤 퇴원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다시 보지 말자며 나는 그를 퇴원시켰다.

내 바람과는 달랐다. 그는 며칠 뒤 또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번에도 매우 급박하고 심각한 상태였다. 또 흉관을 넣었다. 상태는 좋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폐에서 새어나오는 공기량이 많았고, 며칠을 기다려도 바람이 멎질 않았다.

자꾸 기흉이 반복되고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자 과장님은 수술을 고민하셨다. 결국 갈비뼈를 부러뜨려 망가진 폐를 주저앉히는 흉곽성형술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망가진 폐가 흉조직화되면서 수축하여 반대쪽 폐의 과팽창을 일으켜 폐기종과 기흉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망가진 폐가 더이상 수축하지 않도록 폐를 주저앉히는 수술을 결정한 것이다. 환자의 폐 상태가 워낙 나빠서 수술의 안전성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결국 과장님은 보호자인 아이의 엄마를 불러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엄마는 수술 설명을 듣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환자의 형도, 아빠도 결핵으로 잃고, 환자는 마지막 남은 아들이라고 했다.

과장에게 ‘가망없는 퇴원’을 지시받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그런데 수술 뒤 반대쪽 폐, 즉 그나마 기능이 남아 있던 폐에 염증이 생겼다. 망가진 폐를 주저앉히는 수술을 위해서는 환자가 옆으로 돌아누워야 하는데, 염증으로 망가진 오른쪽 폐의 감염된 분비물들이 왼쪽 폐로 넘어온 것이 원인으로 생각됐다. 수술 뒤 인공호흡기를 떼었지만, 늘어나는 가래로 인해 호흡곤란이 와서 다시 인공호흡기를 걸어야 했다. 폐의 염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염증도 염증이었지만 가래가 늘어나는 게 문제였다. 처음에는 30분 간격으로 가래를 빼면 됐지만, 점차 10분, 5분, 2~3분으로 간격을 줄여야 했다. 물처럼 흘러나오는 가래농은 5분만 놔두어도 환자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심했다. 이 때문에 간호사 한 사람이 아무 일도 못하고 환자의 바로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고단위 항생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래가 차면 아이는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가래를 빼면 아이의 의식은 즉시 또렷하게 돌아왔다. 인공호흡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종이와 펜으로 나와 대화를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폐기능은 더욱 떨어졌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환자는 매일 열번도 넘게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면서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의 엄마가 과장님을 찾아갔다. 잠시 뒤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가망없는 퇴원’(hopeless discharge)을 지시하셨다. 환자 가족이 더이상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망없는 퇴원이란 죽음이 확실시되는 환자를 집에서 운명하도록 조처하는 것을 말한다. 2년 전 내 아들도 가망없는 퇴원을 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병원의 파견의이자 유일한 흉부외과 전공의였던 나는 가족의 결정과 과장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이 괴로웠다. 생명이 위태롭고 회복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직 의식이 멀쩡한 아이를, 가래가 차서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호흡기를 떼라니.

몇 시간을 끌던 나는 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환자와 함께 앰뷸런스에 올랐다.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인공호흡을 하면서 나는 계속 뿜어져 나오는 가래를 주사기를 이용해서 뽑아줘야 했다. 단 몇 분만 가래를 뽑지 않아도 의식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의식이 가물거리던 아이는 가래를 뽑으면 곧바로 또렷한 눈망울로 애원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덜컹거리던 구급차는 어느 판자촌 후미진 곳에 멈췄다. 이윽고 도착한 것이었다. 아이를 방으로 옮기고, 나는 계속 앰부(인공호흡에 이용되는 럭비공 모양의 고무주머니)를 잡고 있었다.

아이는 손으로 내게 쓸 것을 달라는 표시를 했다. 엄마가 펜과 수첩을 건네주자 아이는 수첩에 흔들리는 글씨로 “선생님 저 살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이미 붉어진 내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엄마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앰부를 이용한 인공호흡과 주사기로 가래를 뽑아내기를 계속했다. 아이 엄마의 슬픈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구급차 기사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와 “이제 가셔야죠” 하며 눈치를 줬다. 정말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30여분이 지났다. 내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구급차 기사의 재촉은 계속됐다.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의사도 가족도 포기한 마당에 환자를 데리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가래를 뽑는 횟수를 줄였다. 아이의 의식은 곧 가물가물해졌다. 그렁그렁하는 가래 소리가 내게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눈물에 젖은 나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아이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몇 분이 지나자 호흡도 멈췄다. 나는 인공호흡을 위해 삽입했던 기관 내 튜브를 제거했고 아이는 천국으로 갔다. 나는 지옥을 빠져나오듯이 그 집을 빠져나왔다.

왜 그는 최선의 치료를 끝까지 못 받았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담벼락에 붙어 있던 포장마차로 걸어갔다. 혼자서 소주 한병을 들이켰을 즈음, 어떻게 아셨는지 과장님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내 소주잔을 채우셨다. 둘이서 말없이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세병쯤 들이켜고서야, 나는 그 아이와 헤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올 때마다 긴장성 기흉이라는 위험한 상태로 내원했다. 양쪽 폐가 모두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졌기 때문에 굳이 수술을 하지 않거나 가망없는 퇴원을 하지 않았어도 오래 살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또렷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에게서 기관 내 튜브를 제거하는 것은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의 전기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일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의사라는 직업이 너무 싫었다. 아이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어도 숨졌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돈 때문에 최선의 치료를 끝까지 받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 아이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중증의 폐결핵인가, 치료비를 감당 못한 가난인가. 아니면 서민의 치료비를 해결하지 못한 사회의 제도인가. 어쩔 수 없이 냉정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엄마인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 과장님인가 아니면 어떤 용기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그를 떠나보낸 나였는가.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가끔씩 그날의 일을 돌이킬 때마다 그의 검은 눈망울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내가 아이에게 한 마지막 약속은 평생 기억하겠다는 것이었다. 부디 좋은 곳에서 잘 있기를.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결핵으로 잃은 그의 어머니도 잘 계시기를.

우리나라는 아직도 결핵의 발병률과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24년 전 내 품에서 떠난 아이의 비극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료비의 지출 규모는 적지만 치료비의 개인부담률이 매우 높다. 다른 나라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세금에서 의료비를 지원하는데, 우리나라는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가정이 가계소득의 40%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할 때 이를 ‘재난적 의료비’라고 한다. 의료비로 인해 재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난적 의료비 발생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1위다. 국가의 지원이 적고 의료비 부담을 국민에게 미루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이 달린 의료비에 대한 국고지원이 대폭 늘어나야 할 것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