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료

한의사-약사 ‘밥그릇 싸움’ (한겨레 2013.08.14 22:20)

수퍼보이 2013. 8. 14. 23:09

한의사-약사 ‘밥그릇 싸움’
한약 건보적용 물건너갈판

10월 첩약 건보 시범사업 앞두고
두 단체 다툼, 구체안 마련 못해
부담 줄여줄 환자 편의는 뒷전에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당뇨 환자 정아무개(52·서울 동대문구)씨는 2010년 2월 집 근처 한의원 문을 두드렸다. 병원 약을 한달가량 먹어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던 데다 “합병증을 막으려면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겁까지 났기 때문이다. 한의원 방문 당시 혈당은 아침 공복 상태에서 190㎎/㎗이어서 당뇨 기준(126㎎/㎗)을 넘었다. 식사 2시간 뒤 혈당은 300㎎/㎗로 역시 당뇨에 해당됐다. 정씨는 2주치 한약 첩약을 2번 처방받아 먹었다.

이후 석달 뒤인 5월 중순 한의원을 다시 찾아 혈당을 잰 결과 식사 2시간 뒤 혈당이 132㎎/㎗로 크게 개선됐다. 하지만 정씨는 한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형편상 한달에 40만원이나 하는 한약값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약은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 약값 100%를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탓이다.

허리통증 환자 이아무개(65·경북 예천)씨도 마찬가지다. 정형외과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뒤 찾은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처방받은 한약을 먹던 중 일주일치에 10만원이나 하는 비용이 큰 부담이 돼 결국 한약을 끊었다. 이씨는 “한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증상이 좋아져 계속 먹고 싶지만 비용 부담으로 끊을 수밖에 없었다. 건강보험 적용이 되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정씨나 이씨처럼 치료를 위해 한약을 처방받으려는 환자들은 많다. 하지만 상당수는 비싼 한약값에 큰 부담을 느낀다. 201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한방의료기관을 이용하는 환자 5500여명과 한방의료기관 471곳, 한약취급기관 863곳을 대상으로 ‘한방의료 이용 및 한약 소비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한방 진료비에 대해 응답자의 43%가 비싸거나 매우 비싸다고 답했다. 싸거나 매우 싸다고 답한 이는 14%에 그쳤다. 건강보험을 우선 적용해야 할 한방 분야로는 68%가 한약 첩약을 꼽았다. 물리치료 요법(13%)과 틀어진 골반과 척추를 바로잡아주는 추나요법(6%)이 뒤를 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치료용 첩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은 시범사업조차 물 건너갈 형편이다.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관련 단체들의 합의를 전제로 올해 10월부터 첩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을 하기로 결정했으나,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할 한의사와 약사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시범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안조차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한의사 쪽은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에서 한약조제약사를 배제하라고 요구한다. 한약조제약사는 1993년 약사도 한약을 조제할 수 있게 하려는 정책에 반발해 한의사들이 전면적으로 들고 일어난 ‘한-약 분쟁’ 사태 뒤 한 차례에 한해 시험을 통과한 기존 양약사에게 한약을 제조할 자격을 준 제도다.

최혁용 대한한의사협회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 티에프티’ 홍보위원장은 “한-약 분쟁의 산물로 탄생한 한약조제약사는 일종의 경과조치 성격의 자격증일 뿐이다. 과거의 경과조치를 미래의 제도에 포함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약사 쪽은 적법하게 한약조제 자격을 갖춘 한약조제약사를 시범사업에서 배제하라는 한의사 쪽의 요구는 ‘직역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대한약사회는 최근 낸 성명에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한약 첩약에 대해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을 결정한 것은 첩약의 표준화와 과학화를 촉진하겠다는 의도다. 한약조제약사의 참여를 반대하는 것은 한방 분업을 피하고 한의사의 독점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태도”라고 반박했다.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커지자, 의료계에서는 20년 만에 2차 ‘한-약 분쟁’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한의사들 내부에서조차 시범사업을 두고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어차피 시범사업에서 약사를 배제할 수 없을 테니 아예 시범사업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한방조제약사를 제외한 시범사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부딪치고 있다.

여기에 한약의 부작용이 많다고 보는 의사들이 한약을 건강보험 제도권으로 포함하려는 사업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앞으로 갈등을 키울 수 있는 요소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해관계가 걸린 단체들의 합의를 전제로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합의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의사와 약사 등 의료 공급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 때문에 한약의 건강보험 적용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환자들만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