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 영남 남인의 좌절과 TK 소외 (영남일보 2011-06-02 07:48:28)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 영남 남인의 좌절과 TK 소외
대구·경북이 TK 역차별과 소외론으로 들끓고 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10년 동안 소외됐던 대구·경북은 포항출신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고 크게 고무된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 최근 동남권 신공항과 과학벨트 유치 실패로 허탈감과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만약 한나라당과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이 진정 대구·경북의 발전을 염원하고 사랑하였다면 오늘날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후기 대구·경북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고민해보자.
영남의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시기는 인조반정과 경신환국 등 여러 가지 있으나, 특히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은 영남 남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 사림의 우두머리)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이현일(1627~1704)은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윤휴와 함께 노론정권으로부터 가장 철저히 박해를 받아 7년간을 함경도와 전라도를 오가면서 정치적 핍박을 받았다. 이때부터 서애 류성룡의 8세손인 매산(梅山) 류후조(1798∼1876)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이후 영조 4년에 일어난,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한 무신란(戊申亂)은 갑술환국 이후 정치적으로 취약해진 영남 남인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당시 영남 남인의 저항수단은 만인소(萬人疏)였다. 안동 유림이 중심이 되어 1792년 4월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만인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정조의 왕권강화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도 정치적 복권을 꿈꿀 수 있게 되었으나, 정조의 죽음으로 영남인들은 크게 좌절했다. 이후에도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와 대원군의 복귀를 청원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이러한 만인소는 남인의 정계복귀를 염원하는 바가 강했다. 그들은 유배형을 각오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기개는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의병운동으로 떨쳐 일어나는 기반이 되었다.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대통령과 집권당이 영남에 기반을 둠에도 대구·경북이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8세기의 집권층은 수도권에 기반을 둔 서인이라 이해가 되지만, 작금의 현실은 정말 희한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원칙과 소신으로 죽음을 걸고 만인소를 올린 영남선비의 기개가 대구·경북에 기반을 둔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제 대구·경북의 지도자를 선택할 때는 목숨을 걸고 영남을 대변한 옛 선비처럼 훌륭한 인물을 여·야를 불문하고 선택해야만 지역의 미래가 밝아진다고 본다. 내년의 총선과 대선에서는 이런 기개를 가진 대구·경북 정치인이 선출되기를 기대한다.
◇오늘부터 목요일에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과 ‘동추 사랑방’을 각각 격주로 게재합니다. 류동학씨(46)는 단국대 법학과·고려대 대학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혜명동양학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2] 命理學으로 본 임재범
(영남일보 2011-06-16 07:42:20)
영혼을 뒤흔드는 깊은 울림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대중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했던 가수 임재범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국이 난리다. 인터넷에는 온통 임재범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사가 도배되어 있고, 그가 부른 ‘너를 위해’ ‘빈잔’ ‘여러분’ 등의 노래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우연히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눈물이 흘러서 나 자신도 놀랐다. 이런 경험은 나만이 아니고 노래를 감상했던 많은 사람들이 겪은 현상이라고 한다.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을 작곡한 윤항기는 임재범이 부른 ‘여러분’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끝내 울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평탄하지 못한 인생사와 잦은 기행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임재범은, 그의 부친이 유명한 아나운서였던 임택근이고, 그의 이복동생이 가수·탤런트로 유명한 손지창이다. 한국인 최초로 주한 미국대사에 내정된 성김이라는 인물이 고종사촌이 된다는 사실도 관심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임재범은 오랜 방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다시 대중 앞에서 혼신을 다해서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남편을 끝까지 믿어주었던 고마운 아내와 어린 딸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이와같이 ‘가족이 나의 힘’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뒤늦은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대중과 소통하게 하고 대중의 심금을 울리게 만들었다.
그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근접한 49세다. 오랜 방황 끝에 이제 그의 뛰어난 가창력을 모든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본인의 천명임을 안 것이다. 그동안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에 가까워지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음악의 높은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단하는 자평명리학은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그 중 인간의 사는 모습을 보는 이론이 육신론(六神論)이다. 이것은 십신(十神)이라는 용어로 모습을 나타내는데, 일간(日干)을 중심으로 십신을 정한다. 일간이 갑을(甲乙)과 같은 목기운이면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육친을 기재하고, 일간 외 일곱자를 비겁(比劫)-식상(食傷)-재성(財星)-관성(官星)-인성(印星)으로 분류한다.
임재범을 명리학의 육친론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임재범은 보통 예술성을 나타내는 식상과 편인성이 가미된 기운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한을 풀어내듯, 어둡고 칙칙하면서 폭발적인 호소력이 강점이다. 이런 점은 편인(偏印)과 상관(傷官)이라는 육친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편인은 보통 자신의 기준에 따라 해석하고 판단하는 성향으로, 종교계·예술계·스포츠계·방송언론계에 많이 분포한다. 특히 소외감과 고독감이 특징이며 용두사미형의 기질에다 특기분야에서 특별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심리가 내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편인은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다. 편인성이 강한 임재범은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독한 영혼으로 대중과 같이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임재범 가족처럼 아나운서나 연예인이면 창작력과 폭발적인 표현력을 나타내는 식신(食神)이나 상관이라는 육친이 발달돼 있다. 아무튼 그의 성공이 고아원에서 자라고 있는 재능있는 많은 아이들과 어려운 청소년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가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듯이, 어려운 현실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3] 5호16국의 전개와 광개토태왕
(영남일보 2011-06-30 07:42:55)
한 인물의 행동과 사고는 시대적 환경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374~412)이 살았던 4~5세기 동아시아는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격변의 시대였다. 광개토태왕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침 KBS1에서 광개토태왕에 대해 드라마로 방영 중인데, 자칫하면 역사드라마속의 픽션을 사실로 볼 가능성이 있다.
먼저 중국본토의 상황은 400년 이상 유지된 한(漢)이 망하고, 위(조비)·촉(유비)·오(손권)가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들어선다. 이후 제갈량과 경쟁했던 사마의(179∼251)의 손자인 사마염이 265년에 위(魏)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서진을 건국한다. 이후 서진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 겹치면서 결국 남흉노의 유연이 세운 전조(前趙: 304∼329)의 유총에게 망하고, 317년에 사마예(276∼322)가 동진을 세운다.
이후 만주지역과 북중국에 흉노족, 저족, 강족, 갈족, 선비족의 5호가 남침해 5호16국 시대(304∼439)가 시작된다. 16국은 보통 1성(成: 성한), 2조(趙: 전조·후조), 3진(秦: 전진·서진·후진), 4연(燕: 전연·후연·남연·북연), 5량(凉: 전량·후량·서량·북량·남량), 1하(夏)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이 가운데 선비족의 모용부와 운명적인 전쟁을 벌인다. 먼저 모용황(297∼348)이 세운 전연(337∼370)이 342년에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간다. 이후 전연은 370년 전진(351∼394)의 부견과 왕맹의 공격에 의해 망한다.
이후 소수림왕은 전진과 통교하면서 불교 도입,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소수림왕 이후 동생인 이련(伊連)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 인물이 광개토태왕의 부친인 고국양왕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모용황의 아들이자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영웅인 모용수(慕容垂)가 384년에 후연을 세우면서 고구려와 대립한다. 근초고왕과 광개토태왕 드라마에 등장하는 바로 그 모용수다.
광개토태왕은 391년 18세에 즉위한 후, 선비모용부의 모용수→모용보→모용성→모용희로 이어지는 집권자들과 만주·요서를 두고 투쟁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은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 집권기에 수년간에 걸쳐 보복공격을 단행해 숙군성, 요동성 등 후연의 요동땅을 점령한다. 한편 후연에서는 407년 풍발이 모반하여 모용보의 양자인 모용운을 황제로 세우는데, 모용운은 고국원왕 때 전연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고화(高和)의 손자로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고구려인이 후연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광개토태왕은 모용운에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운은 409년에 암살당하고, 광개토태왕 드라마에 후연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풍발(馮跋)이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면서 후연은 사라진다. 이와같이 광개토태왕은 선비모용부가 세운 후연과의 대외항쟁을 결국 승리로 장식한다. 놀라운 점은 광개토태왕이 이룩한 업적이 주로 20~30대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는 21세기의 한반도와 대구·경북를 책임질, 광개토태왕의 기개를 닮은 30~40대 지도자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고대해본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4] 삼원사상과 평창동계올림픽
(영남일보 2011-07-14 07:43:12)
한국을 포함한 동양사상에서는 ‘3’이라는 숫자를 매우 중요시한다. 주역은 괘의 해석에서 천(天)·지(地)·인(人)의 세 변수를 사용한다. 이 세 변수가 변화의 핵심 요소로, 한민족(韓民族)이 예로부터 숭배해온 ‘삼원사상(三元思想)’이나 ‘삼신신앙 (三神信仰)’과도 통한다.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세분이 세운 고조선 건국설화를 바탕으로 삼신신앙이 전해져 내려왔으며, 삼신의 실체인 ‘삼신할머니’가 생명을 점지했다는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은 만물의 변화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사(人事)를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사람의 타고난 그릇을 평가하며 미래의 방향성을 예고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측해 천시를 알아보는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에서도 천·지·인의 삼원사상(三元思想)이 녹아있다. 즉 하늘의 기운을 나타내는 천간의 기운인 천원(天元), 땅의 기운을 나타내며 지지(地支)로 표현하는 지원(地元), 하늘의 기운을 땅에 숨겨놓은 지장간(地藏干)이라는 인원(人元)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음양론에 의하면 1·3·5·7·9의 홀수는 양수(陽數), 2·4·6·8·10의 짝수는 음수(陰數)로, 이 중 홀수가 겹치는 날을 하늘과 땅의 기운이 가득하다고 믿어 3월3일을 ‘삼월삼짓날’이라 하여 길일로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교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불(佛)·법(法)·승(僧)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삼배를 하고,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고 부른다. 또한 탑을 보면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나누는데, 탑신부의 층수는 하늘의 기운인 양을 상징하여 감은사지 3층석탑, 영양 봉감모전 5층 석탑,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황룡사 9층 목탑 등 홀수의 층으로 만들었다.
이런 3의 위력은 지금까지도 일상 깊숙한 곳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 홍어는 돼지고기와 김치와 함께 삼합을 맞춰야 제맛이고, 심마니는 숫자 3과 발음이 같은 산삼을 찾았을 때 “심봤다”를 세 번 외쳐야 한다. 일상의 속담에도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한다’거나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등 이 ‘3’이라는 숫자를 인용한 경우가 많다. 또한 승리를 기뻐하는 뜻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외치는 소리인 만세(萬歲)조차도 삼창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삼세번’은 우리의 인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대한민국이 한국스포츠 행운의 땅인 남아공 더반에서 1974년 홍수환의 챔피언 획득과 2010년 월드컵 축구 최초 해외 16강 진출에 이은 세 번째 ‘더반의 기적’을 일궈냈다. 동계올림픽 유치 ‘삼세번’의 도전 끝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삼원사상으로 하늘과 땅과 지구인을 감동시켜 획득한 우리 민족의 끈기와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5천년 한민족역사의 일대 쾌거다.
아무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평창, 강릉, 정선 등 3곳에서 개최되는 2018년 동계올림픽을 발판삼아 3만불시대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고, 평창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30년이 되는 해이자, 1948년 대한민국정부와 북한정권이 들어서 분단된지 100년이 되는 해인 2048년에는 남북이 다시 합치고 한반도가 세계 3위권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기를 기원한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5] 재미로 보는 당사주(1)
(영남일보 2011-07-28 10:24:37)
어릴적 시골 노인들이 손바닥을 보면서 손가락만으로 남의 운명을 감정해주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술이 바로 당사주(唐四柱)다.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 마디를 음력 출생 연월일시의 순서대로 차례로 짚어 나가는 당사주는, 보는 법이 간단하면서도 제법 적중률이 높아서 인기가 많다. 당사주는 현재도 민간에서는 토정비결 다음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당사주는 특히 전문적으로 운명을 봐주는 역할을 하는 역술인, 무속인, 승려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간단하게 운명 보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 입장에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학술이지만 몇 년에서 수십 년을 공부해도 어려운 것이 명리학인 반면, 당사주는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아직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하여 당사주라는 명칭을 붙였다. 당사주 이론의 창시자는 중국 남북조시대(420~589)의 한족(漢族) 왕조인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왕조가 교체하던 시절인 양(梁: 502~557)의 무제 시기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종을 창시한 달마로 알려져 있다. 그가 창안해서 널리 유포된 사주 학설은 당나라 현종 때 밀교 승려이자 천문학자로 유명한 대혜선사(大慧禪師) 일행(一行: 683~727)이 문서화했다.
당사주의 원래 명칭은‘간명일장금(看命一掌金)’ 또는 ‘달마일장금(達磨一掌金)’으로, 1995년 대만 신문풍출판사에서 발행한 술수총서 제55권에 ‘간명일장금’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간명일장금’에 의하면 이 책은 당나라 시대 일행이 전파하고 명나라 때 호씨(胡氏)가 출판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간명일장금’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당사주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자평명리학은 남녀의 사주가 각각 518가지·400가지 경우의 수와 매우 다양한 이론체계로 학습하기가 매우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당사주는 경우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고, 또한 그림책으로 되어 있어 한글을 알면 누구나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중화되기에 매우 좋은 편이다. 다만 구체적이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인간의 운명을 살펴 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재미로 보는 운명술이라고 본다.
당사주를 보는 법에 의하면, 먼저 각각의 12지지(地支)에 따라서 성(星)의 명칭과 특성이 다르다. 자(子·쥐)는 천귀성(天貴星), 축(丑·소)은 천액성(天厄星), 인(寅·범)은 천권성(天權星), 묘(卯·토끼)는 천파성(天破星), 진(辰·용)은 천간성(天奸星), 사(巳·뱀)는 천문성(天文星), 오(午·말)는 천복성(天福星), 미(未·양)는 천역성(天驛星), 신(申·원숭이)은 천고성(天孤星), 유(酉·닭)는 천인성(天刃星), 술(戌·개)은 천예성(天藝星), 해(亥·돼지)는 천수성(天壽星)으로 지지에 성을 붙여 해석하게 된다. 네 개의 성(星)이 연·월·일·시별로 어떻게 배열되는가에 따라 해석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천귀성이 중첩되면 귀하지 않고, 천권성이 중첩되면 권세가 없다는 식이다. 당사주는 인간의 운명이 12개의 성좌에 의해 주재된다는 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당나라 개국 이후 아라비아 문명과 함께 들어온 점성술이 중국의 사주(四柱)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6] 재미로 보는 당사주(2)
(영남일보 2011-08-11 07:25:39)
당사주(唐四柱)로 인간의 운명을 개략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먼저 12지지별로 대별한 12성좌를 알아야 한다.
쥐(子)는 천귀성(天貴星)의 길성(吉星)으로 부귀와 즐거움이 있고, 여색을 주의하라. 소(丑)는 천액성(天厄星)의 흉성(凶星)으로 조상·부모와 떨어져 타향살이 한다. 속병 등 건강에 주의해야 한다. 배우자와 불화하며, 고난·고통이 수반된다. 호랑이(寅)는 천권성(天權星)의 길성으로 인물이 영리하여 모든 일에 능란하며 권세가 있어 공명을 얻는다. 대인관계가 활달하여 무리를 모은다. 토끼(卯)는 천파성(天破星)의 흉성으로 파괴와 파손의 기운으로 용두사미격이다. 주색에 주의하라.
용(辰)은 천간성(天奸星)의 길성으로 지모가 깊어 타인이 그 속을 측정키 어렵다. 사람을 살리고 구제하는 일을 하게 된다. 뱀(巳)은 천문성(天文星)의 길성으로 학업과 예능에 능하다. 천권성이나 천인성이 함께 들어 있으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말(午)은 천복성(天福星)의 길성으로 복록, 부귀, 문인을 상징하고 이름을 사방에 떨친다. 재물 근원이 샘물 같으니 써도 마르지 않는다. 양(未)은 천역성(天驛星)의 흉성으로 육친간의 덕이 없어 일찍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사는 사람이다. 나중에 영화를 누리리라.
원숭이(申)는 천고성(天孤星)의 흉성으로 육친(六親)의 덕이 없고 일신이 고독하며,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기 어렵다. 활동적인 직업이 많다. 닭(酉)은 천인성(天刃星)의 흉성으로 자기주장이 강하며 남과 다투어서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몸의 상처를 주의하고 신경성 두통을 주의하라. 개(戌)는 천예성(天藝星)의 길성으로 학업이 출중하며 다재다능하고 지혜가 뛰어나다. 초년은 비록 곤고하나 사십 후에 성공하리라. 큰 인물이 이 운을 만나면 문무를 겸전하도다. 돼지(亥)는 천수성(天壽星)의 길성으로 한번 들어 백 가지를 깨우친다. 장수하고 복이 많으며 말년이 태평하다. 그러나 천파성이나 천액성이 함께 있으면 오히려 불운한 운명이다.
당사주 보는 법은 먼저 음력으로 생일을 적는다. 예를 들어 뱀띠 3월4일 진시생인 경우 띠는 천문성이다. 월은 출생한 띠에서 1월을 시작하여 태어난 달까지 짚어간다. 뱀띠 3월이면 1월이 사(巳: 뱀)에서 시작하여 3월이 미(未: 양)에 해당되어 천역성이 된다. 생일은 월의 성좌를 1일로 하여 출생일까지 한 칸씩 짚어간다. 예를 들어 4일생이라면 월의 미(未)에서 시작해 미(1일)-신(2일)-유(3일)-술(4일)로 4일까지 도달하면 술의 천예성이 나온다. 시는 출생일인 천예성을 자시(子時: 밤 11시~1시)로 시작해 자시(술)-축시(해)-인시(자)-묘시(축)-진시(인)로 태어난 시간까지 한 칸씩 짚어가면 진시는 인(寅)의 천권성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사람의 당사주는 천문성(연), 천역성(월), 천예성(일), 천권성(시)이 된다. 연은 초년운, 월은 중년운, 일은 말년운을 보며, 시간은 총운으로 일생을 본다.
위에 예로 든 사람의 당사주는 ‘연에 천문성이니 학업과 예능에 능하다. 월에 천역성이니 육친간의 덕이 없어 일찍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사는 사람으로, 나중에 영화를 누리리라. 일 천예성이니 학문에 밝고 재능이 있으며, 시에 천권성이 있으니 인물이 영리하여 모든 일에 능란하며 대인관계가 활달하여 무리를 모은다’라고 풀이한다. 당사주는 이렇게 간단해 보기가 쉽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7] 명리학으로 풀이한 정주영
(영남일보 2011-08-25 07:46:18)
올해는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개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함께 한국 경제계의 쌍두마차였던 정주영 회장은 1915년 11월25일(음력 10월19일) 새벽 축시(丑時)경에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복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1녀(1남 주영, 2남 인영, 3남 순영, 1녀 희영, 4남 세영, 5남 신영, 6남 상영)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정 명예회장의 천기를 명리학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 한 인물의 천기를 알아보는 첫 번째 단계는 생일에 해당하는 ‘일간’이다. 정주영 회장의 일간은 강철같은 강인한 성격을 나타내는 경금(庚金)이 뿌리를 강하게 내린 모양새인 경신(庚申)일주다. 경신일주는 단단한 바위가 땅에 강하게 뿌리를 내린 모양새로 독립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지니고 성취욕이 강하다. 매사 자신감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며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재생능력을 발휘한다. 주어진 일에 책임감이 강하다. 자수성가형의 인물이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할 단계는 태어난 달이다. 태어난 달은 ‘월령(月令)’이라 하여 선천적인 유전자를 알 수 있고, 타고난 집안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또한 ‘격국(格局)’이라 하여 사주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와 그릇을 알 수 있고, 주인공의 사회적인 활동방향을 알 수 있는 자리이다. 그래서 격국론(格局論)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한 고전인 중국 청대(淸代)의 심효첨(沈孝瞻)이 저술한 ‘자평진전(子平眞詮)’에서는 ‘팔자의 용신격국은 오로지 월령에서 구한다’는 원리를 천명하면서 태어난 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주영 사주의 월령은 식신(食神)이다. 따라서 정주영의 사주는 식신격이다. 식신은 물질로는 의식주에 해당하고, 정신적으로는 봉사와 희생·감사를 나타낸다. 월지가 식신인 사람은 성격이 원만하고 여복이 많으며, 재주가 비상하여 복록이 많다.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취득하기 위해 성실한 경제활동을 하며 남을 돕는 역할에도 충실하다. 또한 창의적이고 분석력과 호기심이 강력하다. 식신격은 베풀어야 성공하는 사주이다. 만약 월지가 식신일 경우는 재성을 상신으로 한다.
정주영의 사주는 다행히 태어난 띠인 연주에 을목 정재가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한 월지와 연(年)지가 해묘로 반합을 형성하여 재물과 여성을 상징하는 재성(財星)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전형적인 사업가의 명인 식신생재격(食神生財格)이다. 상신인 재성이 강하여 큰 그릇의 사주이다. 식신격은 결국 재로 흐름이 전개됨으로 인하여 여자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사주가 바로 식신생재격이다.
식신생재격을 타고난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은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업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업가 정신을 잇고자 최근 범 현대가 11개사가 참여해 5천억원을 기금으로 한 사회복지재단 ‘아산나눔재단’ 설립 방안을 발표한 것은 가뭄 끝에 희망의 단비가 내리는 매우 기쁜 소식이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실천하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8] 공민왕과 ‘왕의 나라’
(영남일보 2011-09-08 07:59:22)
태조 왕건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가 930년에 벌어진 안동의 고창(古昌)전투다. 이 전투에서 안동의 호족인 삼태사 김선평(金宣平)·권행(權行)·장길(張吉, 또는 장정필) 등이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안동이 고려의 국운이 걸린 일에 또 한번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데, 그때가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이끄는 10여만명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시작된 1361년(공민왕10) 10월이다.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 등이 이끄는 4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한 1차 때와 달리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한 홍건적은 11월24일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켰다. 다행히 개경 함락 이전 11월19일 이미 공민왕을 비롯한 왕실은 몽진길에 나선 후였다. 왕의 일행이 몽진(蒙塵)하는 한달 동안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1287∼1379)에게는 왕이 궤장(杖)과 초상화를 선물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잇대어 인교(人橋)를 만든데서 유래했다는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극진하게 환대한 것을 보여주는 전설같은 민속놀이다.
한편, 왕은 안동에 머무는 동안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공신이 됨으로써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다.
이와같이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관련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安東雄府)와 영호루(映湖樓) 현판 등은 물론 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왕모산성 등 다양한 유·무형 문화재가 전승돼 오고 있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안동의 문화적·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다.
지난달 24~28일 성황리에 공연된, 공민왕의 안동 몽진 시절을 배경으로한 산수실경(山水實景) 뮤지컬 ‘왕의 나라’는 출연진에서부터 제작까지 중앙이 아닌 지역의 역량으로 만들어졌기에 지역 공연 및 문화관광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일조하며 지역 문화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앞으로 공민왕 관련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해야 하는지가 우리 후손들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