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명리학(命理學)으로 풀어 보는 주원장의 책사 유기(劉基) (대기원 2013.02.21 15:24)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명리학(命理學)으로 풀어 보는 주원장의 책사 유기(劉基)
장쑤 성은 남한 크기의 면적에 13개 지급행정구(地級行政區)로 나뉘어 있으며 1개의 부성급시와 12개의 지급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주시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동양의 베네치아에 해당하는 ‘운하의 도시’ 이자 ‘정원의 도시’이다. 중국 4대 정원으로 이화원, 승덕(承德)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留園)과 졸정원(拙政園)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두 개가 소주에 있으니 소주가 정원 도시로 유명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소주의 정원은 명청대(明淸代)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많은 원림 예술가와 유명한 원림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송(宋:960~1278), 원(元:1271~1368), 명(明:1368~1644), 청(청:1644~1912)이라는 4개 왕조(王朝)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 창랑정(滄浪亭), 사자림(獅子林), 졸정원(拙政園) 그리고 유원(留園)다. 그래서 이들을 소주의 4대명원(蘇州 四大名園)이라 칭한다.
유네스코는 소주 고전원림의 설계 이념을 높이 평가하여 1997년과 2000년에 졸정원(拙政園), 망사원(網師園), 유원(劉園), 사자림(獅子林), 창랑정(滄浪亭), 환수산장(環秀山莊), 예포(藝圃), 퇴사원(退思園), 우원(偶園)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한편 위에 언급한 고전원림들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개국공신인 유기(劉基, 1311~1375)가 말년에 머물렀던 정원(定园, 띵위엔)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원 안에 보면 제갈량과 쌍벽으로 비교되는 책사 유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 비문의 전면을 보면 ‘대명 성의백 홍문관 학사어사중승 겸 태사령 유기백온지묘 장자 유련 맹조 차자 유경 중경 홍무 8년 을묘일 6월 세움’이라고 적혀 있고 묘비 후면에는 약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해(辛亥, 1311)년 6월 15일 청전출생, 홍무 8년(乙卯, 1375) 4월 16일 향년 65에 사망, 6월에 호구산 남쪽에 안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기(劉基, 1311~1375)이전에 주의 문왕과 무왕의 책사 강태공, 춘추전국시대 제 환공의 책사 관중, 한고조 유방의 장자방, 유비의 제갈량, 당 태종의 위징, 조광윤의 조보 등 뛰어난 책사나 참모가 있었듯이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1328∼1398)에게는 유백온(劉伯溫) 이라는 걸출한 책사가 있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책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출중한 능력은 다음과 같은 세간의 평가가 말해 준다.
전조군사제갈량(前朝軍師諸葛亮) :
전 황조의 군사는 제갈량이요
후조군사유백온(後朝軍師劉伯溫) :
후 황조의 군사는 유백온이다
삼분천하제갈량(三分天下諸葛亮) :
천하를 셋으로 나눈 것은 제갈량이요
일통강산유백온(一統江山劉伯溫) :
강산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유백온이다.
위의 언급과 같이 주원장도 유백온을 평가하면서 ‘나의 자방’이라고 불렀을 만큼 최고의 책사였다. 그는 절강성의 여수시 청전현에서 태어나 원의 벼슬을 하다가 낙향해 은거하던 중 주원장의 거듭된 요청에 응하여 주원장의 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원간섭기와 공민왕 재위시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살았던 유백온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군사전략가, 정치가, 문학가, 철학가이다. 그는 23세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나섰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결국 48세 되던 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한편 주원장은 승려가 되어 떠돌다가, 1352년 25세 때 홍건적의 무리인 곽자흥의 병사가 되어 곽자흥의 양녀 마수영과 결혼, 진무-총관-원수-승상-오국공-오왕을 거쳐 황제가 된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홍건적이 전국적으로 할거했는데, 이 당시 주원장은 홍건적 군벌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 세력(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의 하나로 발돋움한다.
유백온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주원장의 부름을 받아들여 응천(지금의 남경)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의 ‘융중대책’을 논했듯이 주원장에게 계책을 논한다. 그 내용은 소명왕인 한림아를 받들지 말고, 먼저 진우량을 치고 장사성을 쳐서 중원을 평정하라는 내용의 ‘시무십팔책’이었다. 이 계책에 따라 1363년 계묘년에 세계 수전사상 최대의 전투인, ‘파양호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는 나관중의 삼국지 적벽대전의 모티브를 제공한 전투이다. 진우량의 65만 병력과 주원장의 20만 병력이 서로의 운명을 걸고 혈전을 벌였으나 유기의 계책에 의해 주원장이 승리한다.
명의 건국 후 유백온은 성의백(誠意伯)이 되고 어사중승, 태사령 등을 역임한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술과 바둑 및 저술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후에 호유용의 음모에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제갈량과 같이 천재 군사로서 숭배를 받아 명나라 초기를 무대로 하는 소설, 희곡 등에 등장하는 것이 많다. 소설이나 희곡에서는 그의 자인 유백온(劉伯溫)으로 불리면서 사랑받고 있다.
백온은 1368년 무신년에 명 건국 후 성의백이 되고 임자년에 홍무 4년 홍문관 학사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낙향한다. 아마 이 기간에 하늘의 비밀을 흘린다는 내용의 자평명리학 최고의 고전 적천수(適天髓)를 저술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기의 사주팔자는 비문에 근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주는 교육과 학문성이 강한 을목 일간이 월지에 미토(未土) 편재로 격국을 형성하였으나, 연지와 월지및 일지가 해묘미(亥卯未) 삼합 목국(木局)으로 변했다. 다시 말하면 돼지, 토끼, 양이 뭉쳐 중심오행인 일지의 토끼의 동물로 상징되는 묘목의 기운으로 뭉쳤다. 이럴 경우 사주의 중심오행인 자오묘유 가운데 묘목이 월지를 장악하지 못하여 삼합이 약하나 월간과 일간에 을목이 투간하여 을목 일주가 지지에 뿌리를 매우 강하게 내렸다.
즉 편재격이 건록격으로 변했다. 따라서 매우 에너지가 강한 신왕사주가 되어 정관을 용신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나, 편관이 연간에 투출하여 이것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주는 신금이 없었다면 목으로 이루어진 곡직격이 될 수 있었으나 신금이 투출하여 곡직격(曲直格)이 되지 못했다. 일지가 건록이라 건록은 자수성가형의 인물에게 많은 요소로서 공직이나 관록을 암시한다. 신금이 뿌리가 약한 것이 흠이나 시지의 오(午)중 기토(己土)가 능히 을목을 배양한다. 1361년부터 10년간은 기토와 축토가 주도하는 기축대운으로 토가 신금을 생하니 신금이 능히 강한 을목을 벌목한다. 따라서 기축대운이 가장 황금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61세 이후인 무자대운의 임자 계축 갑인년인 1372년부터 1374년까지에는 수목(水木)이 사주에 해가 되니 호유용의 간계에 의해서 모함을 받는다. 결국 1375년 을묘년에 일주와 ‘천지동(天地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백온 사주에서 아쉬운 점은 관운을 상징하는 관살이 사주자체에서 약하고 운마저 30대와 40대는 관살운을 나타내는 경금(庚金), 신금(辛金)이 신금(申金)과 유금(酉金)같은 지지에 뿌리를 내리고 못하고 인목(寅木)이나 묘목(卯木)의 절지에 앉아서 관살의 금이 힘을 얻지 목하여 펴지 못한 점이다.
그나마 토생금(土生金)하여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관살(官殺)을 보강하는 재성운인 기축대운에 주원장을 만나 생애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유기와 같이 사주에 일간과 같은 오행인 비견(比肩)과 겁재(劫財)가 많으면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굽히기를 싫어하니 직장생활이 힘들다. 만약 관살이 강력하게 자리를 잡으면 비견과 겁재를 조절하나 그렇지 못하면 경쟁자들에 의해서 시기와 비방을 자주 당하게 되는데, 유기의 사주가 그렇다.
한편 유기를 독살한 호유용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인물로 明나라 성립 후 재상인 이선장의 추천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관리를 거쳐 좌승상(左丞相)까지 올랐다. 그러던 중 1380년 호유용은 日本과 北元(明의 건국이후 北方으로 돌아간 몽골)과 내통해 모반을 일으키려고 한 죄로 주원장에 의해 처형당했다. 당시 호유용의 무리들이 모두 살해됐는데, 그 수가 무려 1만 5000여명에 달했다. 호유용사건으로 호유용과 절친했던 이선장도 자결을 하고 그와 관련된 인물 1만 5000명을 또 처형했다.
이후 공신인 장군 남옥(藍玉)도 모반죄로 처형당했는데 그와 연루된 사람들이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명 초기의 공신들은 한 고조보다 더욱 잔인하게 주원장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하여 중국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인물열전의 저자 혜명 류동학 선생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대전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이며 현재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과 대전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이다. 영동방송(강원)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매일신문(대구)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등 각종 매체에 다수의 저작을 연재했으며, 2012년까지 대구 영남일보에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을 연재했다. ―편집부 |
혜명 류동학 donghak88@hanmail.net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태호복희씨
(대기원시보 2012.06.06 10:13)
중국 역사는 三皇五帝로부터 시작한다. 삼황오제설에 관하여는 몇 가지 계열로 나뉘어져 있는데, 3황에 관해서는 『尙書』大傳에는 수인(燧人)·복희(伏犧)·신농(神農), 『史記』「三皇本紀」에는 포희(庖犧)·여와(女禍)·신농(神農), 『史記』「秦本紀」에는 天皇·地皇·泰皇로 기재되어 있어 통일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삼황이란 정사인『史記』「三皇本紀」의 포희(庖犧)·여와(女禍)·신농(神農)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황의 신들은 사실상 후세에 천(天)․지(地)․인(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이들을 사실이라기 보다는 신화로 파악하고 있다.
복희씨가 중국의 황하(黃河)주변에서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황하에서 머리는 용이요 몸은 말의 형상을 한 신비로운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이 용마(龍馬)라고 불리어 지는데, 이 말의 등에 1에서 10에 이르는 수를 나타낸 무늬가 선모(旋毛)형태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복희씨가 연구를 하여 만든 것이 하도(河圖)이다. 도서관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도서를 모아둔 건물이 된다. 여기서 도서란 원래 ‘하도낙서(河圖洛書)’를 줄인 말로서 『역경(易經)』「계사전(繫辭傳)」에 있는 “하출도 낙출서 성인측지(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하도를 보고 복희씨는 우주만물이 오직 1에서 10까지 10수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팔괘의 획을 그었다. 복희씨가 팔괘를 그려 팔방에 배치하니 이것을 복희씨의 선천팔괘(先天八卦)라 부르며 주역팔괘의 시초이다. 선천팔괘는 복희팔괘(伏犧八卦)라고도 한다.
용마는 하늘을 상징하는 동물로 하도가 하늘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늘의 이치를 말하고 있는 하도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것을 복희씨가 새롭게 연구하여 정리한 것이다.
주역(周易)은 복희씨가 그린 괘에다가 문자가 생긴 이후에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이 괘를 설명한 ‘괘사(卦辭)’, 문왕의 아들인 주공이라는 성현이 괘를 구성하는 효에다가 설명을 부가하여 ‘효사(爻辭)’를 만든 것을 말한다. 괘사를 일명 단사(彖辭)라고 한다. 하도의 도는 질그릇에 그려진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도문(圖文)이라고 부릅니다. 이 도문이 동물의 뼈에다 글을 새긴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고, 다시 대나무를 쪼개어 거기에다 글을 새긴 방책죽서(方策竹書)로 발전했다.
하도 안에 있는 1에서 5까지의 수를 ‘생하게 하는 수’라 해서 ‘생수(生數)’라 부르고, 밖에 있는 6에서 10까지의 수를 ‘이르는 수’라고 해서 ‘성수(成數)’라고 한다. 생수 가운데 홀수인 1․3․5는 하늘의 수인 양이고, 짝수인 2․4는 땅의 수인 음이다. 이를 삼천양지(參天兩地)라고 한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우리의 선조들은 탑을 세웠는데 예를 들어 보면 국보 9호인 백제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 국보 112호인 경주의 감은사지 3층석탑, 경북 영양의 국보 187호 봉감 모전 5층 석탑, 국보 16호인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의성 탑리 5층 석탑, 구례 화엄사의 4사자 3층 석탑, 고려시대의 예천 개심사 5층 석탑,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 등이 주로 기단부가 음이라면 탑신부나 상층부는 주로 양의 수인 3, 5, 7, 9를 활용하여 세워졌다. 홀수로 탑을 올리는 것도 홀수는 양이고 하늘의 수이기 때문이다. 홀수인 양의 수를 합하면 9이고, 음의 수를 합하면 6인데, 이것이 주역본문의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모두 구육(九六)으로써 설명하는 원리이다. 즉 하늘의 수는 세 자리이고 땅의 수는 두 자리라는 뜻이다.
하나의 양(−)속에 삼천이 들어 있고 하나의 음 속에 양지가 들어 있어서, 양 하나를 삼(3), 음 하나를 양(2)으로 놓고 보면 건삼련(☰)은 3×3은 9로 하늘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니 노양(태양)이고, 곤삼절(☷)은 2×3은 6으로 땅이자 어머니에 해당하니 노음(태음)이다. 이 부모 밑에서 아들딸이 나오는 데 양괘(陽卦)는 소양으로 아들에 해당한다. 즉 장남인 진하련(☳)우레, 중남인 감중련(☵)물, 소남인 간상련(☶)산은 모두가 소양괘이다. 음괘는 소음으로 딸에 해당한다. 즉 장녀인 손하절(☴)바람, 중녀인 이허중(☲)불, 소녀인 태상절(☱)못은 모두 소음괘이다. 이와같이 삼천양지법이 하도와 팔괘에서 모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도의 그림을 보면 중앙에는 태극이 있고, 안에 1에서 5의 생수가 있고, 밖에 6에서 10의 성수가 있습니다. 또한 삼천양지의 음양이 있고, 여기에서 사상이 나오고 사상에서 다시 팔괘를 낳고, 팔괘가 십육괘를 낳고, 십육괘가 삼십이괘를 낳으며, 이 삼십이괘가 다시 육십사괘를, 육십사괘가 384효를 만드는 자연법칙을 낳는다는 것을 하도는 보여주고 있다.
팔괘는 괘서와 괘명과 괘상을 차례로 붙여서 일건천一乾天(양, 아버지), 이태택二兌澤(음, 삼녀), 삼리화三離火(양, 중녀), 사진뢰四震雷(양, 장남), 오손풍五巽風(음, 장녀), 육감수六坎水(양, 중남), 칠간산七艮山(양, 소남), 팔곤지八坤地(음, 어머니)라 한다. 태극에서 음양인 생수와 성수가 합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발생시킨다. 오행을 어머니의 잉태에 비유하면 처음에는 액(水)이 생기고, 다음에 기혈(火)이 흐르고 모발(木)이 생기고 골격(金)이 생기고 피부(土)가 생기면서 사람이 되는 이치와 같다. 오행의 생성하는 순서는 수화목금토이지만 생성된 오행이 상생하는 이치는 수가 목을 낳고(水生木), 목은 불을 낳고(木生火), 불이 흙을 낳고(火生土), 흙이 금을 낳고(土生金), 금이 물을 낳는다(金生水).
이와같이 역은 문자 이전부터 현재까지 모든 역사를 초월할 만큼 뛰어난 사상이며, 복희․문왕․주단공․공자가 완성한 모든 동양사상의 근본이 되는 정신적 지주로써의 학문이다. 중국최초의 천문학자인 복희씨의 위대성이 역을 탄생시켰다. 현재 중국에는 많은 복희묘와 복희씨의 사당이 있다.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가장 큰 규모의 하남성 회양현 복희묘, 가장 최초로 세워진 신락시 인조묘, 『환단고기』에 나온 산동성 미산현 복희묘, 그 외에도 하남성 맹진현의 용마부도사, 감숙성 천수시의 복희묘, 괘태산 복희대, 서화현 구지애가 있다.
이와 같이 복희씨는 중국,한국,묘족 등의 시조로 보고있는데, 이 가운데 천수시의 복희묘를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왕고리(羲王古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섬서성의 시안(서안)을 출발하여 약 350km 서쪽으로 가면 감숙성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도시가 감숙성에서 난주 다음으로 큰 도시인 톈수이(天水)이다.
천수시는 서울시와 인천시, 경기도를 합친 면적의 도시로 무위시, 장액시, 돈황시과 더불어 감숙성의 중국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이 천수시가 바로 중국의 삼황오제의 하나인 태호복희씨의 탄생지로 ‘희황고리(羲皇故里)’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16일 복희의 탄생일에 성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왜는 천지개벽의 여신으로서, 중화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복희(伏羲)의 누이로 전하여진다. 여왜씨는 풍성(風姓)으로서 복희씨처럼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人首蛇身인수사신)이었으며, 신성한 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중화민족의 어머니로 받들어지고 있다. 복희와 여왜는 부부가 되어 중화민족문명의 전설상의 시조로 각인되어 있다.
인물 열전의 저자 혜명 류동학 선생은 현재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과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명리학 고전반 교수, 대전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동방송(강원)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매일신문(대구)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등 각종 매체에 다수의 저작을 연재했고, 현재 대구 영남일보에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을 연재 중입니다. ―편집부 |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최우와 김준
(대기원시보 2012.06.14 11:27)
고려 무신 정권기,노비 출신으로 최고권력자가 되는 김준과 그를 둘러싼 무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MBC 역사 드라마 ‘무신(武神)’의 최우와 김준. (사진=MBC)
고려시대를 크게 양분하는 시기가 1170년에 발생한 무신의 난이자 정중부의 난이다. 경인년에 발생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문벌귀족들이 지배했던 전기를 청산하고 고려후기의 시작점을 알린 무신들의 난은 이후 무려 100년간 무신들이 지배자를 교체하면서 집권했다. 이 시기에 왕들인 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 등은 무신들에 의해서 교체되던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무신정권은 크게 3기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무신정권 1기(1170년~1196년)는 이고, 이의방, 정중부(1170~1179)→경대승(1179~1183)→이의민(1183~1196)순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무신정권2기(1196년~1258년)는최충헌(1196~1219)→최우(=최이, 1219~1249)→최항(1249~1257)→최의(1257~1258)로 교체되면서 최씨무신정권이 무려 62년간 지배했다. 최씨 정권은 1258년 최의가 김준에게 살해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신정권 3기 (1158년~1270년)는 유경과 김준(1158~1268)→임연(1268~1270)→ 임유무(1270~1270)로 교체되다가 결국 1270년에 왕정으로 복귀하면서 원간섭기(1270∼1351)에 들어가게 된다.
최충헌(1149∼1219)과 김일성(1912∼1994)은 모두 무인출신으로 24년간과 47년간(1948∼1994) 권력을 장악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아들에게 권력을 계승한 공통점이 있다. 최우와 김정일(1942∼2011)은 모두 문인의 기질이 강하여 최우는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하여, 김생, 유신, 탄현 등과 더불어 신품사현의 한명이면서 이규보와 최자등의 문신들을 서방(書房)이라는 기구를 활용하여 등용했다. 김정일은 신상옥감독과 배우 최은희를 납치할 만큼 영화광에다가 음악적인 취미도 있는 인물로 최우와 같이 문인의 기질이 강했다.
최우는 정실인 하동정씨 정숙첨의 딸과 혼인하여 딸 최송이를 낳았다. 하동정씨는 1231년 죽고, 최송이는 김약선과 혼인하여 아들인 김미와 나중에 원종의 비가 되는 정순왕후를 낳았다. 정순왕후는 충렬왕의 모친이다. 김약선의 동생이 김경손장군이다. 김경손장군은 1231년 살리타이의 몽고 1차 침입때 자주성의 최춘명장군과 귀주성에서 박서장군과 더불어 대몽항쟁의 영웅이었다. 살리타이는 몽고 2차 침입때 처인성에서 승장인 김윤후에게 사살당한다.
최우는 하동정씨 부인이 죽자, 계실로 과부였던 대집성(大集成)의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대집성의 사위이자 최우의 동서가 상장군 주숙(周肅)이다. 최우는 최선의 손녀를 후실로 들였다. 그러나 결국 천기 서연방(瑞蓮房)에게서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낳는데, 이들은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만전이 최항(崔沆)으로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하면서 김경손장군, 주숙, 최우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을 모두 죽인다. 권력투쟁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김정일은 1966년 홍일천과 결혼했으나 영화배우 성혜림(1937∼2002)과의 사이에 김정남(1971∼현재)을 낳았다. 그후 김영숙과의 사이에 김설송과 김춘송을 두었다. 그후 재일교포 출신의 무용수 고영희(1953∼2004)사이에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은딸인 김여정을 낳으면서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역할을 한 인물이 고영희이다. 고영희사후 김옥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의 3남인 김정은체제가 들어섰다. 과거 최우의 아들과 손자인 최항과 최의로 이어지는 정권이 1258년 김준과 유경에 의해서 10년만에 무너졌듯이 북한정권도 어떤 변화가 있을 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권력의 수성이 매우 힘들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다.
1948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65년간의 김씨가의 북한정권의 원조격인 1196년부터 1258년까지 유지되었던 최충헌·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진 62년 간의 최씨무인정권을 종결시킨 인물은 다름아닌 최충헌의 가노출신인 김윤성의 아들 김준(金俊)이었다.
김준은 박송비(朴松庇)와 송길유(宋吉儒)의 천거로 최우의 호위무사가 된다. 최항이 최우의 동서이자 상장군인 주숙(周肅)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이공주·최양백·김준 등 70여 명의 최씨가의 가노(家奴)들이었다. 이후 이공주·최양백·김준 등은 별장이 되어 최항정권을 지탱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그러나 최항이 1257년에 죽자 최양백을 위시한 류능·선인열·채정·최영 등이 야별초·신의군·서방·도방을 이용하여 최의가 집권하는데 공헌한다.
집권한 최의는 김준을 소외시키자, 불만을 품은 김준은 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인 김승준, 아들인 김대재·김용재·김식재 등과 유경.박희실.이연소.박송비.임연을 모아놓고 선수를 치기로 작전모의를 한 다음 휘하의 신의군과 야별초 및 도방을 동원하여 최의의 집을 급습하여 최의를 참수하고 최양백을 제거한다. 이 사건이 ‘무오정변(戊午政變)’으로써 최씨 4대 62년간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난이다.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유경과 박희실 등을 제거하여 권력을 독점한다. 또한 임연등을 소외시킨다. 1264년 8월 원종이 몽골에 가자 최충헌때 설치하여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최고기관이었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장(長)인 교정별감(敎政別監)에 임명되어 왕의 부재시에 국정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최고 권력자로서 10년 간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나 전횡을 일삼아 도처에 정적(政敵)을 만들었다.
이에 왕권강화를 위해 대몽관계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원종은 김준을 없애기로 결심,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임연(林衍)과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김준을 살해하도록 했다. 이 정변이 1268년에 일어난 ‘무진정변(戊辰政變)’이다. 현재 모방송국에서 방영중인 무신의 김준은 이러한 김준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각색하여 보여주고 있다.
김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임연은 처음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고, 1258년(고종 45년) 유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원종을 폐하여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죽고 아들인 임유무가 권력을 계승했다. 1270년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은 그동안 최우 이후 천도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였다. 그러나 임유무는 원종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러자 원종에 의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송송례, 홍문계(洪文系) 등에게 살해당했다. 홍문계는 임연의 사위이자 임유무의 매형이었다. 한편 임유무의 어머니 이씨와 형 유간(惟幹), 아우 유거(惟柜)‧유제(惟提) 등은 모두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고려는 원의 간섭기에 접어들어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행되기 까지 반식민지상태에 놓였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중화민족의 시조 황제(黃帝)
(대기원시보 2012.06.20 19:56 )
기원전 221년 진·초·연·제·한·위·조의 전국칠웅 가운데 산동지역의 제(齊)를 마지막으로 여섯 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에 버금가고, 덕이 오제(五帝)를 능가한다며 삼황오제에서 ‘황(皇)’자와 ‘제(帝)’자를 따 자신을 ‘황제’라고 처음으로 칭했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이 사라지기까지 무려 2100여 년간 중국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던 인물을 제외하고 공식적인 역사 자료에 기록된 406명의 황제들에 의해 통치됐다.
이와 같이 진시황이 본받고자 했던 삼황오제 가운데 오제를 열었던 인물이 황제(黃帝)이다. 황제(皇帝)와 달리 황제(黃帝)는 중국 신화상 오방의 신 가운데 중앙을 다스리는 상제(上帝)를 말한다. 오행 가운데 土에 해당하고, 흙을 상징하는 누런색(黃)이며, 얼굴이 네 개여서 사방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며 , 중원 각 민족의 선조로 받들고 있어서, 중화사상의 핵심인물이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탁월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삼황오제의 이야기를 역사속으로 편입시켰는데, 삼황은 제외하고 황제·전욱·제곡·요·순의 오제부터 기술했다. 황제릉에서 가까운 섬서성 위남시 관할의 한성시가 고향인 사마천은 황제의 천하통일 사업을 기리고자, 중국문화의 서광을 개척한 황제의 이야기부터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오제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역사를 신화적이고 신령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오제의 장사지낸 장소까지 기술함으로써, 역사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마천은 총 130편 52만 6500자에 이르는『사기』를「本紀」12편,「表」10편,「書」8편,「世家」30편,「列傳」70편 등으로 편재하여 저술하였다. 사기의 이런 분류 방법은 기전체라 하는데, 천지자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12본기는 역법으로 볼 때 12간지와 관련되고, 10표는 천간의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관련이 있으며, 8서는 四方八方 등 방위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30세가 역시 이 중에서 열전에 삽입시켜도 무리가 없는「공자세가」와「진섭세가」를 뺀다면 28편으로 별자리인 28수(宿)와 일치하게 된다. 70열전은 맨 마지막인 「태사공자서」를 「태사공열전」으로 볼 수 있고,「공자세가」와「진섭세가」를 집어넣으면 72열전으로, 천지와 음양의 성수(成數)관념에서 보면 역법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후예들인 중국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현재 중국 곳곳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신화인 3황5제를 현실화시켜 중국의 핵심인 한족(漢族)만이 황제의 후손이며, 이외의 모든 민족은 동이(東夷)·남만(南蠻)·북적(北狄)·서융(西戎)이라는 화이관(華夷觀)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그동안 중국은 황하유역의 하- 상(은)- 주나라로 이어지는 고대국가단계를 역사의 진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 정설을 깨뜨리는 유적이 요서지역의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7000-BC6500)를 필두로 무려 6곳에서 발견됨으로서 역사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곧 한·당과 같은 중화제국주의의 부활이다.
황제의 찬란했던 대일통의 시대로 중화제국주의의 부활을 알리고 싶은 중국의 욕망은 대륙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염황의 조상(彫像)과 황제릉이다. 이번에 만리장성을 신장자치구에서 혜이룽장성까지 확대한 것도 그런 정신의 일환이다. 중국 중원문화의 중심지인 하남성 정주시 근교의 황하풍경구에는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보다 8m 높은 황제와 염제의 조상(彫像)이 서있다. 중국인들은 이 상을 보며 염제와 황제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으며, 염·황 자손이 한 가족이라는 민족의 응집력을 강화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황제릉(黃帝陵)은 헌원이 죽은 뒤 교산(橋山)에 묻혔다(黃帝崩, 葬橋山)는『사기』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한(前漢) 한무제(漢武帝)가 교산(橋山)을 찾아 황제묘를 가묘 형식으로 성역화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섬서성의 황제릉은 서안시(西安市)에서 북쪽으로 200㎞ 떨어진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섬서성의 연안시(延安市) 황릉현(黃陵縣) 북쪽으로 3㎞에 있다. 서안시는 기원전 1000년에 서주(西周)의 수도로 시작해 이후 진(秦)·서한(西漢)·서진(西晉)·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西魏)·북주(北周)·수(隨)·당(唐) 등 중국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황제릉은 우리나라 ‘단군왕검’과 같은 중화민족의 시조 황제(黃帝)의 묘지로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나라에 오른 곳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능묘는 의관총(衣冠冢)이다. ‘천하제일릉(天下第一陵)’으로 불리는 황제릉은 중국인에게 단순한 능원이 아니라 한족의 구심점이자 마음의 뿌리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는 교산이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현 온천둔향내 호구촌 서남의 교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황제의 선조는 웅씨(熊氏)였다. 웅국의 우두머리 소전(少典)과 부보(附寶)사이에서 태어난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았기 때문에 성을 희(姬)와 공손(公孫)으로 하고, 헌원씨(軒轅氏)라 했다. 지금의 하북성의 탁록(涿鹿)에 정착한 황제는 중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염제와 연합하여 구려족(九黎族)의 우두머리인 치우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탁록의 뜰에서 치우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치우는 후세에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았으며, 한국인들은 그의 얼굴을 대문 문고리나 기와에 조각해 놓아 악귀를 물리쳤다. 치우씨를 일명 ‘독아비’라 불렸는데, 이 용어는 뒤에 도깨비라 불리게 되었다. 치우천왕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응원기에도 사용될 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전설상의 인물이다.
한편 치우천왕을 물리친 황제와 염제는 다시 중원의 패권을 놓고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3차에 걸친 결전을 하여 황제가 중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원의 거주민들은 황제와 염제를 조상으로 섬겼으며 스스로를 염황자손(炎黃子孫) 이라 부른다. 황제는 창힐(蒼頡)로 하여금 문자를 제작하게 하고, 대요에게는 십간과 십이지를 만들어서 육십갑자를 만들게하고, 영륜에게는 악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한편 부인인 누조는 여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후세 중국인들은 거의 모든 문물제도의 건립을 황제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황제를 ‘인문초조(人文初祖)’라 부른다.
황제릉이 있는 연안시, 염제릉이 있는 보계시, 진시황릉의 서안시를 포함하는 한반도 면적의 중국 섬서성 일대는 중국 문명의 원류라고 칭해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강력한 한나라와 융성한 당나라의 재현을 표방한 개막식 주제가 강한성당(强漢盛唐)이다. 한·당의 수도였던 서안을 포함한 섬서성은 그만큼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섬서성은 진시황 병마용갱과 주변의 진시황릉, 유방과 항우의 운명의 순간이 됐던 홍문연 유적지, 당 태종 이세민과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대안탑, 당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 스토리가 나온 화청지, 중국 최대의 모스크인 청진대사, 중국 최대 규모의 평지성인 서안성, 제갈량이 순직한 보계시의 오장원 등 많은 역사유적지가 있다. 특히 서안의 흥교사는 현장법사의 묘탑과 현장의 두 제자인 규기와 신라의 학승이자 유식학의『해심밀경소』를 저술하여 티벳불교에 영향을 미친 원측(圓測, 613-696)의 묘탑이 있다. 올해는 꼭 지인들과 함께 섬서성으로 역사문화탐방을 떠나고 싶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조선 최초의 방계승통 군주 선조(宣祖)
(대기원시보 2012.06.27 15:11)
올해 임진년은 임진왜란 발생 7주갑(周甲)이 되는 해이자 한반도의 운명을 주도할 제 18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매우 중요한 해이다. 임진란이 발생한 선조집권기는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활약한 시대이자 사화(士禍)로 얼룩진 훈구정치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사림(士林)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붕당정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조선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자 중요한 시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조의 왕위계승은 조선왕조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첫 케이스이다. 선조 이전은 비록 대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쟁이 있었으나 방계혈통이 대권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선조 이전의 왕위계승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는 신의 왕후 한 씨 소생의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등의 6남과 신덕 왕후 강 씨 소생의 방번․방석이 있었다.
그런데 태조는 겨우 11세의 막내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방원이 1398년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 휘하 부하들을 동원하여 방석과 방번 및 정도전·남은 및 방석의 장인이었던 심효생을 제거한 ‘1차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후 태조는 상심하여 9월에 세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2대 군주 정종이며, 태조는 상왕(上王)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1400년(정종2년) 일명 ‘방간의 난’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 부르는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방원이 박포와 동복형제인 방과를 제거한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함으로써 정종은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런 골육상잔의 결과는 이성계가 현실적인 힘을 무시하고 대권을 막내 이방석에게 물려주고자 한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다.
태종(재위 1400.11~1418.8)은 정비인 원경왕후 민 씨 사이에 4남(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성녕대군) 4녀와 후궁 효빈 김 씨(경녕군), 신빈 신 씨(함녕군․온녕군․근녕군) 등의 9명의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두어 총 12남 17녀의 총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숫자는 조선왕조에서 최고로 많은 자녀수를 기록한다.
태종은 1404년(태종 4) 10세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1418년 세자를 3子인 충녕대군으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세종이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대권을 장악하여 이후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태종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역사적인 선택이었다.
이후 문종이 조선왕조 처음으로 장자로써 왕위를 계승했으며, 이후 문종의 외아들인 단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1453년 세조의 계유정란과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의해서 단종이 물러나고,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 노태우 세력이 1979년 10·26사태 이후 12·12쿠데타에 의해서 집권하여 많은 국민적인 저항을 받았듯이,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많은 저항세력을 양산했다.
이후 조선의 정치세력은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구치관 등의 공신과 윤임과 윤원형 등의 외척으로 구성된 훈구세력이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선조가 집권하기 전까지 조선정치를 좌우한다.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써 1년 2개월 집권했다. 예종은 한명회의 여식인 장순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 대권을 계승할 인성대군을 두었으나 아쉽게도 인성대군이 일찍 죽었다. 예종은 다시 한백륜의 여식인 안순왕후와의 사이에 왕위 계승권자인 제안대군과 나중에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임사홍의 며느리가 되는 현숙공주를 두었다.
그러나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결탁에 의해서 왕위계승 1순위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둘째아들인 성종이 집권하게 된다.
성종이 형인 월산대군 대신 왕위를 계승한 것은 한명회의 사위인 것이 크게 작용했다. 왕위계승 1순위였던 제안대군과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결국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세력과 훈신의 각축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성종 이후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 씨의 외아들로 집권하고, 1506년의 중종반정에 의해서 성종과 정현왕후 윤 씨의 외아들인 중종이 집권한다.
중종 이후 집권한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으나 1년도 집권하지 못하고 일찍 붕어한다. 이후 중종과 문정왕후에서 난 명종(재위 기간 1545.7~1567.8)이 12살에 집권했으나 실질적으로 문정왕후에 의해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수렴청정이 8년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선조가 즉위하기까지는 장자계승원칙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적자계승의 원칙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런 적자계승의 원칙이 결국 명종대에서 무너졌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 씨(人順王后 沈氏, 1532년∼1575년)의 외아들이자 왕위계승 1순위인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18년)10월 23일 열세 살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선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의 상태로 만든 국가적인 중대사이자 비극이었다. 결국 22년간 재위했던 명종은 정비 1명과 순빈 이 씨, 숙의 신 씨 등 6명의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후계자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1567년(명종22년) 34세에 갑자기 훙(薨; 죽음) 했다.
이후 인순왕후 심 씨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1499년∼1572년)의 합의에 의해서, 중종과 친정의 배경이 없는 후궁인 창빈 안 씨의 둘째아들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 이균이 꿈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용상에 오르는 조선왕조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 분이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1552~1608)이다. 선조는 1552년(명종7년) 11월 11일
(임자년 임자월 기축일생) 중종의 7남인 덕흥군 이초(李岧)와 정인지의 증손녀인 하동부대부인 정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덕흥군은 하원군 정, 하릉군 인, 하성군 균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하성군 이균이 조선 최초로 후궁의 후손으로써 대권을 차지하여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 되었다. 이번에 민주통합당 대표가 된 이해찬 대표의 13대조가 바로 선조의 백형인 하원군 정이다.
하성군이 군주가 된 것은 조모인 창빈 안 씨(昌嬪安氏, 1499~1549)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 씨,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 씨,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 씨 등의 3명의 왕후를 두었다. 후궁으로는 모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와 대립각을 세웠던 복성군의 생모이자 ‘뭬야?’라는 용어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탤런트 도지원 씨가 열연한 경빈 박 씨,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나중에 조광조를 제거한 기묘사화를 주도한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 씨,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 씨, 해안군의 생모인 숙의 홍 씨, 덕양군의 생모인 숙의 이 씨 등 9명이 있었다.
경빈 박씨와 반대로, 창빈 안 씨는 문정왕후와 관계가 좋아서 명종과 창빈 안 씨의 자손들인 영양군과 덕흥군의 소생인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인연이 결국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하성군이 후궁의 손자로써 군주로 등극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다. 후궁인 창빈 안 씨 후손은 선조 이후 조선왕조를 이은 왕이 되었다. 이것은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 씨의 음덕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창빈 안 씨의 묘소는 명당으로 유명한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데, 후궁 가운데 유일하게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창빈 안 씨 사후 460년이 지난 현재 좌청룡 자락에는 고 이승만 대통령 묘소가 우백호 자락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 묘소가 있다. 현재도 전직 대통령을 좌우에 거느린 복이 많은 인물이 창빈 안 씨라고 볼 수 있다.
이제 18대 대권을 잡을 인물이 결정되는 것도 6개월도 남지 않았다. 현재는 여론상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선출될 가능성이 높으나, 여론은 항상 바뀌는 법이라, 여야의 잠재적인 대권후보 가운데 누가 18대 대통령이 될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는 일이다. 누가 천명을 받아 대한민국의 운명을 짊어질지 흥미진진한 12월 19일이 기대된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대권후계자 구도에 실패한 군주 선조
(대기원시보 2012.07.04 17:31)
조선시대의 대권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가계와 왕실과 인연을 맺은 외척 및 유력 권세가의 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선조는 40년 7개월 재위(1567∼1608)하면서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총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선조는 정비로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로 인목대비 김씨를 두었고, 후궁으로 공빈 김 씨·인빈 김 씨·순빈 김 씨·정빈 민 씨·정빈 홍 씨·온빈 한 씨·귀인 정 씨·숙의 정 씨·숙용 김 씨·소원 윤 씨를 두었다. 이 가운데 공빈 김 씨는 임해군·광해군, 인빈 김 씨는 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과 정신옹주, 순빈 김 씨는 순화군, 정빈 민 씨는 인성군·인흥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 정빈 홍 씨는 경창군과 정정옹주, 온빈 한 씨는 흥안군·경평군·영성군·정화옹주를 낳았다.
25명의 자녀수는 태종(12남 17녀)과 성종(16남 12녀) 다음으로 많고, 정종(17남 8녀)과 같다. 선조 다음으로 세종대왕(18남 4녀)과 중종(9남 11녀)이다. 대체적으로 조선전기 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후손이 귀했다.
즉 광해군 1남 1녀, 인조 6남 1녀, 효종 1남 7녀, 현종 1남 3녀, 숙종 6남 2녀, 영조 2남 7녀, 정조 2남 2녀, 순조 1남 5녀, 헌종 1녀, 철종 5남 1녀(다섯 왕자는 모두 일찍 죽음), 고종 6남 1녀를 두었고, 마지막 군주인 순종은 자녀가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대권경쟁은 장자상속보다는 형제계승과 방계승통으로 대권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는 즉위 후 2년 6개월 만에 반남 박 씨 가의 증흥조 박소(朴紹)의 손녀인 의인 왕후를 왕비로 둔다. 의인왕후 박씨(1555~1600)는 그 당시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릴 만큼 후덕하고 미모도 출중했으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석녀였다. 정식 왕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왕위후계구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결국 후궁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심한 경쟁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특히 공빈 김 씨와 인빈 김 씨의 경쟁은 치열했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명종의 3년 탈상이 끝날 때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청년기에 궁중요리를 담당하는 소주방 나인인 공빈 김 씨와 사랑에 불이 붙어 서장자인 임해군(1574~1609)과 서차자인 광해군(1575~1641)을 낳는다. 사실 선조와 공빈 김 씨는 학역재 정인지를 매개로 친인척이 된다. 즉 정인지의 4남 정경조의 아들 정승우의 딸이 공빈 김 씨의 할머니이다.
또한 정인지의 5남 정상조의 아들인 정세호가 선조의 외조부이다. 이와 같이 공빈 김 씨의 할머니와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대부인은 6촌간이다. 따라서 공빈 김 씨의 부친인 김희철과 선조가 8촌간이니 공빈 입장에서는 아버지 외가인 진외가의 9촌 아저씨뻘인 선조와 부부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첫사랑인 공빈 김씨(1553~1577)는 1577년 산후 후유증으로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생모이자 강력한 후원자인 공빈 김 씨의 죽음은 광해군이 1592년부터 1608년까지의 세자 시절을 불안하게 보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공빈 김 씨와 라이벌 관계였던 인빈 김씨(1555~1613)는 공빈 김 씨가 죽은 해에 첫 아들인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낳았다. 이후 신성군은 광해군의 대권 경쟁자로 부상한다.
인빈 김씨는 4남 5녀(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정신옹주․정혜옹주․정숙옹주․정안옹주․정휘옹주)의 많은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첫째 의안군은 1588년 열두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둘째 신성군(1578~1592)이 결국 인빈 김 씨의 장남의 역할을 담당했다. 신성군은 그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던 신립장군의 자녀와 결혼한다. 이때까지 대권 후보는 공빈의 자녀인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의 자녀인 신성군 등 3명으로 압축되었으나 임해군은 성격상의 문제가 많아 결국 광해군과 신성군의 양자구도로 되었다.
결국 1591년 2월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의 의정부 3정승 체제하에서 세자책봉문제인 ‘건저의’가 정국현안으로 부각된다. 이후 광해군으로 책봉해야 한다고 정철이 먼저 주장하다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으로 정철의 서인이 몰락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는 ‘건저의(建儲議 )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신성군에게 애정이 많은 선조의 마음을 간파한 이산해가 인빈 김 씨의 오라버니 김공량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워 신성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결국 '정여립옥사'로 피해를 본 동인이 서인을 몰락시킨 사건이 바로 '건저의 사건'이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 그리고 1591년의 건저의 사건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동인들은 서인을 배척할 때 기축옥사를 처리한 정철의 처리문제로 이발·이산해·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류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때부터 강경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부른다. 남인과 북인이라 부른 이유는 그 당시 북인의 이발이 북악산 아래에 거주하고 남인의 우성전이 남산 아래에 거주했기 때문에 남인이라 불렀다. 한편 선조의 사랑을 받던 신성군이 임란 시 피란 중에 병을 얻어 병사한다. 결국 임진왜란은 신성군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고 전란 중에 많은 공적을 쌓아 대권에 더욱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
한편 의의왕후 박 씨는 아들을 두지 못하여 선조의 애정을 받지 못하다가 1600년 죽는다. 결국 1602년 51세의 선조는 다시 김제남의 딸인 19세의 인목왕후 김 씨를 계비로 맞이하여 1606년 영창대군(1606~1614)을 낳았다.
영창대군의 탄생은 또 다른 대권경쟁에 불이 붙었다. 임란 후인 1599년 주로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구성된 북인은 이산해·홍여순·이이첨·정인홍·이경전·기자헌·허균 등의 대북파와 류영경·남이공·김신국·유희분·박승종 등은 소북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대·소북의 분열은 영창대군의 출생 이후에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602년 이후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던 류영경은 인빈 김 씨의 5녀인 정휘옹주의 남편이자 자신의 손자인 류정량을 통하여 선조가 광해군과 갈등의 골이 깊다는 것을 간파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한다. 이후 정인홍·이이첨·이경전 등의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고 류영경으로 대표되는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나 갑자기 선조가 서거하는 바람에 류영경의 소북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정인홍과 이이첨으로 대표되는 대북파의 지원 하에 집권한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 동복 형인 임해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마저 서궁에 유폐시킴으로써 선조 후손들의 대권경쟁은 결국 골육상쟁으로 결론이 났다.
한편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인 정원군(1580~1619,나중에 원종으로 추존됨)은 구사맹의 다섯째 딸인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와 결혼하여 능양군 종·능원군 보·능창군 전을 두었다. 장남인 능양군 종이 바로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인조이다.
결국 공빈 김 씨와 인빈 김 씨와의 경쟁은 처음에는 광해군이 집권하여 공빈 김 씨가 승리했으나 결국 인빈 김 씨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후궁인 창빈 안 씨의 손자로서 집권한 선조는 적자승계를 원했으나 선조의 바람과 달리 선조 이후의 대권은 후궁인 공빈 김 씨의 자식인 광해군과 후궁인 인빈 김 씨의 손자인 인조가 차지한다. 이것이 선조의 운명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태평성대의 대명사 요(堯)임금
(대기원시보 2012.07.12 10:24)
남한 면적의 1.5배 정도의 크기를 가진 산시성(山西省)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의 서쪽에 있어서 산시성이라 칭한다. 타이항 산맥의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이다. 산시성의 간칭(簡稱)은 춘추전국시대에 진이 차지한 지역이라 진(晋)이다. 산시성은 화하문명(華夏文明) 발상지 중의 하나로 전설에 의하면 요(堯)는 평양(平陽:현재의 임분시), 순(舜)은 포판(蒲板:현재의 운성시의 현급시인 영제시), 우(禹)는 안읍(安邑: 지금의 운성시 하현)에 도읍을 정하여 산시성은 중국 오천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중국의 현대를 보려면 상하이를, 중국의 근대 5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을, 중국의 5000년 역사를 보려면 산시성으로 가라’는 말이 생겼다. 이와 같이 산시성은 삼황오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요· 순임금과 하왕조를 시작한 순임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현재 산시성에는 중국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대동·평요·신강·대현·기현이 선정되었고, 대동의 운강석굴, 평요고성, 오대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상북도 면적보다 조금 큰 면적을 가진 산시성의 린펀시(임분시)는 남쪽지역에 붙은 운성시와 더불어 화하 문화의 발상지로『제왕세기』에 따르면 요가 도성을 둔 평양(平陽)이 현재의 린펀이다. 린펀은 우의 구주 설치 때 기주가 설치된 곳이다. 춘추시대에는 진(晋)의 수도로 전국시대에는 진에서 갈라져 나온 한(韓)이 초기 도읍을 두고 통치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린펀시 길현에는 베트남과의 변경에 있는 덕천폭포, 귀주성의 황과수폭포와 더불어 중국 3대 폭포인 호구폭포(壺口瀑布)가 있다.
린펀시에 화하문명(華夏文明)을 기념하는 건축물인 화문과 요임금의 무덤인 요릉이 있다. 화문은 린펀시의 인민정부가 있는 요도여유구(堯都旅遊區)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문으로,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 ‘임분화문(臨汾華門)’이라 부른다. 49.6m의 파리의 개선문보다 높아, ‘천하제일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50m의 높이는 현재를 기준으로 전후의 중국역사 5000년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이는 세 문은 각각 요(堯), 순(舜), 우(禹)임금을 상징한다. 가운데 문이 높이 1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문이며, 이 문은 요임금이 중화문명을 열었음을 상징한다. 화문 내부에는 화하문명과 민족문화를 주제로 하는 10가지의 경관이 조성되어 있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지도
이와 같이 중화문명을 상징하는 요임금은 어떤 인물인가? 요임금의 가계도를 보면 황제에 연결된다. 황제와 부인인 누조사이에 난 자식이 현효와 창의이다. 현효와 창의는 왕이 되지 않고, 황제의 손자이자 창의의 아들인 전욱제 고양이 황제의 뒤를 이었다. 전욱은 북방의 신으로 북방은 오행으로는 수에 해당하며, 숫자는 1과 6이며, 계절로는 겨울이고 색깔로는 검은색이다. 지지로는 해자축(亥子丑)을 말한다. 중국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그의 후예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전욱제의 아들은 궁선(窮蟬)이다. 그러나 궁선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제의 맏아들인 현효, 즉 청양의 손자인 고신(高辛)이 제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바로 제곡(帝嚳)이다. 제곡은 30살에 제왕에 등극해 도읍지를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휴양일대인 박(亳)에 정했다. 제곡은 황제의 증손으로, 즉 그 계보는 황제→현효→교극→제곡으로 연결된다. 제곡은 중국 고대 제왕의 시조들을 등장시킨 인물이다.
예를 들어 첫째 부인인 강원(姜原)사이에 후에 주(周) 의 시조인 후직 기(棄)를 낳았고, 둘째 부인인 간적(簡狄)사이에 상 왕조의 시조인 설(契), 추자씨(娵訾氏)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고,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방훈(放勳)을 낳았다. 먼저 지가 왕으로 즉위했으나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동생 방훈이 제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요(堯)임금이다. 요임금이 스무 살 나이에 천자가 되어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의 서남쪽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했고, 어진 정사를 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높은 순을 발탁하여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선양하였다. 이 요·순의 치세는 지금까지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불리며 두 임금은 성군의 이상형으로 높이 추앙되고 있다. 역대 제왕들이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할 때 이상적인 군주가 요․순이었다.
특히 영조는 요순과 같은 성왕을 자처하면서 임금인 동시에 스승이라는 소위 군사(君師)의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고자『書經』洪範條의 정치이념으로 탕평책을 쓰기도 했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인격체가 바로 요․순이었다.
공자가『書經』제1편 우서(虞書)편에서 제요(대략 기원전 2357년~기원전 2258년 무렵)를 제일 첫 머리에 둘 만큼 공자와 맹자가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평가한 인물이 요와 순이다. 즉 유가들이 주장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사회를 요임금이 이룩하였다고 본 것이다. 요 임금의 이상 정치를 표현한 성어가 남송(1127~1279)말에서 원초에 활약한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역사서인『십팔사략(十八史略)』제1권에 나오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이다. 배를 두드린다는 고복(鼓腹, 두드릴고, 배복)과 흙덩이를 친다는 격양(擊壤, 칠격, 흙덩이양)을 한데 붙여 태평성대를 즐긴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날짜 개념이 부족해 어느 때 파종하고 수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요는 대대로 역법과 사시를 관장하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을 내려, 공손히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해와 달과 별의 운행법칙을 헤아려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시기를 알려 주었다. 즉 희중(羲仲), 희숙(羲叔), 화중(和仲), 화숙(和叔)을 각각 동쪽․남쪽․서쪽․북쪽에 파견하여 춘분, 하지, 추분, 동지를 정하게 하여 정밀한 관측을 통한 역법을 제정했다. 요는 1년을 366일로 정하고 윤달로 사계절의 오차를 바로 잡았다.
즉 366일은 대체적인 날짜 수로 사실은 365일과 4분의 1일이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는 29여일이 걸리므로 음력에는 큰달(30일)과 작은달(29일)이 있다. 이 대·소월을 합쳐도 1년 354 또는 355일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데 비하면 10여일이 모자라므로 음력은 윤달(閏月)로서 보충하여야 한다. 그래서 음력에는 19년 동안에 일곱 달의 윤달이 있게 된다. 요는 이렇게 윤달을 두어 시차를 조절했다.
요는 왕위계승문제를 논의하면서 아들 단주(丹朱)와 공공(共工)이 거론되었으나 자질부족을 들어 거절하고, 허유라는 인물에게 제위를 양위하고자 하나 허유도 거절했다. 황하의 홍수를 다스릴 인물로 곤을 등용하였으나 실패했다.
요가 재위 70년 만에 우순(虞舜)이 추천되어 요는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우순에게 보내어 그의 덕행을 관찰하게 했다. 요는 부자세습을 거부하고 능력과 인품을 기준으로 삼아 후계자로 순을 선정하니 이러한 정권 이양을 선양(禪讓)이라 한다. 요는 공공과 환두를 유배시키고, 반란을 일으킨 삼묘족(三苗族)을 서쪽으로 이주시켰으며, 홍수조절에 실패한 곤(鯤)을 사형에 처했다. 이상 네 명을 처형시키자 천하가 복종했다. 이러한 사실은 북적,남만,서융,동이라는 중국의 사이관(四夷觀)이라 볼 수 있다.
이번 7월 25일부터 8월 8일까지 보름간 광서장족자치구의 계림부터 호남성의 장사와 하남성 및 산시성을 거쳐 내몽고까지 역사문화탐방이 계획됐다. 중국 5000년의 문화를 볼 수 있게 되니 벌써 가슴이 설렌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덕치의 대명사 순(舜)임금
(대기원시보 2012.07.18 14:49)
경기도 보다 1.4배 큰 면적에 인구가 500만 명인 윈청시(運城市)는 산시성의 지급시(우리나라 광역시도급)로『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함께 최고의 주인공이자 현재 중국인들이 무신으로 추앙하는 관우의 고향이다. 윈청시 염호구는 황제와 염제가 싸운 ‘판천지전’의 장소라는 설이 전하는 곳으로, 윈청시는 우의 안읍(安邑),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의 도성이 세워져 있었던 곳이다.
춘추시대에는 진(晋)에 속했고 기원전 669년에 진 헌공(재위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은 강(현재의 운성시 장현)에 도성을 정했다. 전국시대에 위나라의 도성이 안읍(샤현 우왕성 부근)에 정해져 있었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하동군이 설치되었고, 이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사용되었다. 윈청은 중국 제일의 염호가 있어 소금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다. 순의 도성인 포판(蒲坂)이 바로 윈청시다.
순(舜)은,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신화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이다. 대부분 선대의 요(堯)와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요순’과 같이 함께 묶어 많이 사용한다. 이 말은 주로 뛰어난 군주를 찬양하거나 먼 옛날의 이상적인 군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는 표현으로 유학의 도통의 계보에 들어가는 덕치의 대명사가 요순이다. 현재까지 순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중화(重華)이고 우순(虞舜) 또는 제순유우(帝舜有虞)로도 부른다. 사마천의『史記』에 의하면 우순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즉 황제-창의-전욱-궁선(窮蟬)-경강(敬康)-구망(句望)-교우(橋牛)-고수(瞽叟)-순으로 황제와 연결된다.
순은 황제의 8세손이나 5대조인 궁선부터 순까지는 모두 지위가 낮은 백성이었다. 순의 아버지는 눈 먼 장님이라는 뜻의 고수이다. 고수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약했다. 순이 6~7세 되는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고수가 재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상(象)이었다.
고수는 고집 세고 덕이 없었으며, 계모는 남의 험담을 잘하고, 이복동생 상은 교만 방자하여 모두 순을 죽이려고 했다. 즉 지붕위의 화염속과 우물속에서의 구사일생 일화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순은 순종하며 자식된 도리를 잃지 않았고, 동생에게도 자애를 베풀어서 언제나 공손하고 집안일을 착실하게 했다고 한다. 상당히 민화적인 이야기이다.
순은 스무살 때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른 살에는 요에게 등용되었으며, 요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아내로 맞이했다. 또한 요의 아들 아홉명과 같이 살면서 아홉명의 요의 아들들이 온순하고 말이나 행동이 모두 의젓하게 되도록 했다.
순이 쉰 살이 되던 해에는 요를 대신하여 정사를 대행했다. 요가 돌아가자, 순은 요의 아들 단주에게 천하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갔으나 모든 백성들이 단주를 따르지 않고 순의 공덕을 찬양하니 순은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한 뒤에 예순한 살에 요를 이어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렇게 임금의 자리를 덕 있는 분에게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 이라고 한다.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행하며 시찰하다가 과로로 길에서 갑자기 사망했는데, 그곳은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융저우(永州)시 영원현 남쪽인 창오(蒼梧)이다. 부근의 구의산(九疑山)에 안장했다. 구의산은 『사기』오제본기의 ‘순남순수, 붕우창오지야, 장우강남구의, 시위영릉(舜南巡狩,崩于蒼梧之野,葬于江南九疑,是為零陵)’이라는 기사에 있는, 순이 매장되었다는 영릉(零陵)이다.
순의 아들 균은 상(商) 즉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河南省 商丘市) 동남의 우성(虞城)의 제후로 봉해져 상균(商均) 이라 칭한다. 한편 순의 두 왕비는 순이 죽자 비통해 하면서 상강 변의 푸른 참대를 쓰다듬으며 대성통곡 하면서 상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상강 변의 얼룩진 참대를 상비죽(湘妃竹) 혹은 반죽(班竹) 이라 했다. 후대에 두 여인의 묘가 세워 졌는데 황릉묘라 이름 지었다. 그녀들을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 이라 칭한다.
순임금대에 우(禹), 고요(皐陶), 설(契), 후직(后稷), 백이(伯夷), 기(夔), 용(龍), 수(垂), 익(益), 팽조(彭祖) 등의 인물들과 12주의 군장들이 모두 직책을 분담 받아서 정무를 시행했다. 즉 백우(伯禹)는 물과 땅을 관장하는 관직인 사공(司空)의 직을 맡아서 정무를 총괄했다. 기(棄)는 농업을 관장하는 후직(后稷)을 맡아 백성들에게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쳤다. 상나라의 조상이 된 설(契)은 백성을 교화하는 사도(司徒)를 맡아 백성을 교화 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법관인 고요(皐陶)는 형법을 관장하는 사(士)를 맡아 형법을 제정하고, 정확하게 사건을 판결했다. 우는 고요에게 선위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고요가 우보다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는 고요의 후대를 육에 봉해 제후로 삼았다.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安徽省 六安市)가 육(六)이다. 지금도 고요의 묘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매년 많은 분들이 참배하고 있다.
수(垂)는 기술공을 담당하는 공공(共工)의 직책을 맡아 기술공을 훈련시켰다. 익(益)이 주호, 웅비를 보좌로 삼고 산과 연못을 관장하는 우관을 맡았다. 백이(伯夷)가 하늘과 땅,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삼례(三禮)를 관장하는 질종(秩宗)을 맡았다. 기(夔)는 음악을 관장하는 전악(典樂)을 맡아 악곡을 창작하고 연주하면서 순을 도와 천하를 평안케 했다. 그래서 기하나면 족하다는 ‘기일족(夔一足)’ 이라는 말이 나왔다. 용(龍)은 의견을 수집하는 관리인 납언(納言)에 임명되어 여론을 수렴했다.
순은 5년에 한 번씩 순행하고, 제후들은 4년에 한 번씩 조회를 하러 왔다. 즉 5년에 한 번씩 자오묘유월인 2, 5, 8, 11월에 동남서북의 산인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에 순행하고 돌아와서 종묘에 고하는 형식의 순행이었다.
전국을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형주(荊州)·양주(揚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병주(幷州)·유주(幽州)·영주(營州) 등의 12주로 나누고 강을 준설하였다. 12주의 지방장관들에게 제왕의 덕행을 실행하게 했다. 순은 상을 제후로 삼고 아들 상균이 어리석어 하늘에 우를 추천했다.
순은 그 후 17년이 지나 세상을 떠나고 우가 순의 아들 상균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했다. 이와같이 황제부터 순, 우까지 모두 같은 성에서 나왔으면서도 자신들의 국호를 달리해 밝은 덕을 빛냈다. 황제는 유웅(有熊)이고, 전욱은 고양(高陽)이며, 제곡은 고신(高辛)이고, 요는 도당(陶唐)이고, 순은 유우(有虞)이고, 우는 하후(夏后)라서 씨는 달리하지만 성은 모두 사씨(姒氏)이다. 설은 상(商)이고 성은 자(子)씨였다. 기는 주(周)이고 성은 희씨(姬氏)였다.
순임금은 우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때에 이르러 세습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왕조가 이어진다.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는 중국 역사상 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각종 시, 노래, 민요, 상소문 등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한비자』와『죽서기년』에 의하면 요와 순의 선양은 가짜이며 순이 요를 우가 순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자신들이 제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맹자는 순(舜)을 동이족의 한 갈래로 파악하고, 헌원은 주족의 가계로 파악하였다. 오제의 가계가 실제로 연결되고, 왕위을 세습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붕당정치의 단초를 연 심의겸(沈義謙)
(대기원시보 2012.07.25 21:34)
사림정치가 1575년(선조8년) 동인과 서인으로 분파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는데 바로 붕당정치의 단초를 연 인물이 심의겸과 김효원이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 부른다.
심의겸의 청송 심 씨는 고려 때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한다. 청송 심 씨가를 명문에 반열에 올린 증흥조는 심홍부의 증손자이자 심룡의 아들인 심덕부(沈德符, 1328년~1401년)이다.
심룡의 아들인 심덕부와 심원부(沈元符) 형제대에서 크게 두 파로 갈린다. 큰 집인 심덕부의 후손을 경파(京派),경북 청송군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작은 집인 심원부의 자손을 향파(鄕派)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경기도 안성시 당왕동 비봉산 아래에 있는 심룡의 산소는 대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심룡의 아들은 조선건국을 두고 입장을 달리한다. 동생인 악은(岳隱) 심원부는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한다. 이후 심원부의 자손들은 대대로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덕천마을은 99칸 부자집으로 유명한 송소고택이 있는 마을이다.
형인 심덕부(沈德符, 1328년~1401년)는 이성계(李成桂)·정몽주(鄭夢周)·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공양왕을 즉위시킨 9공신의 한명이었다.
이와같이 심덕부는 조선 개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청성백에 봉해지고 정종조에는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이후 심덕부의 아들 7형제대에서 가세가 중흥되어 화려한 인맥을 형성하여 명문벌열(閥閱,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의 지위를 굳히기 시작한다.
심덕부는 7남(인봉․의구․계년․징․온․종․정)을 두었는데, 5남 심온(沈溫)은 영의정이며 세종의 국구(왕의 장인)로 소헌왕후의 부친이다. 6남은 심종(沈淙)으로 태조의 2녀 경선공주를 맞아 부마도위 청원군이 되었다.
특히 4남인 심징과 5남인 심온의 후손들이 현달했다. 그러나 5남인 심온(沈溫)과 7남인 오위도총관이었던 심정은 좌의정 박은(朴習)의 무고와 상왕(上王)인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심온의 아들(준․회․결) 가운데 둘째아들이자 세종의 처남인 심회(沈澮, 1418년~1493년))는 세조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4세 심덕부, 5세 심온, 6세 심회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정승의 영예를 누렸다.
이는 조선왕조 최초이고 이후 동래 정 씨의 정태화 가문의 오대조 정광필 영의정-증조부 정유길 좌의정-조부 정창연 좌의정-종조부 정지연 우의정-본인 정태화 영의정-사촌 정지화 좌의정-동생 정치화 좌의정-아들 정재승 우의정, 청풍 김 씨가의 김구-김재로-김치인, 달성 서 씨의 서종태-서명균-서지수 등의 집안과 더불어 대단한 영광이었다. 특히 365명을 배출한 조선시대 정승의 역사에서 서지수는 특이하다.
서지수(徐志修, 1714~1768)의 어머니는 우의정 김구(金構)의 딸이었으니, 김구의 아들 김재로(金在魯), 손자 김치인(金致仁)까지 영조때 줄을 이어 영의정에 올라, 이를 테면 서지수는 본가와 외가가 모두 3대 정승가문인 특이한 케이스다.
한편 심회(沈澮)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심원(沈湲)의 아들 심순문(沈順門)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고, 다시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현달하였는데 네 아들(연원․달원․봉원․통원) 중 장남이자 명종때 영의정에 오른 심연원(沈連源)은 아버지 심순문이 군기시(軍器寺, 병기를 만드는 관아) 앞길에서 형을 당하여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척됨을 경계하여 자신의 손자 이름을 모두 겸(謙)자 돌림과 유교의 오상인 인․의․예․지․신과 충․효․제를 사용하여 작명하였다.
심연원의 아들 심강(沈鋼)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아버지로 오위도총부의 도총관(都摠管, 왕실의 친․인척이 맡음 군무를 총괄하던 정2품)을 역임하였다.
인겸․의겸․예겸․지겸․신겸․충겸․효겸․제겸 등의 8남을 둔 심강(沈鋼)은 신진사류로서 화(禍)를 당할 뻔 한 박순(朴淳)등을 아들인 심의겸과 함께 구하고, 권신인 효령대군의 3남인 보성군의 후손이자 처남인 이량(李樑)을 제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심의겸(沈義謙)은 서인(西人)의 거두로서,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김효원과 함께 동서(東西) 붕당의 발단이 된 장본인이다.
심의겸은 선조때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당상관) 등을 지내는 동안 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며 동생인 심충겸(沈忠謙,1545년∼1594년)과 더불어 형제가 병조판서를 역임한 인물들이다. 심충겸은 중종의 왕자 봉성군(鳳城君, 희빈 홍씨 소생)의 사위로, 심충겸의 아들인 심열은 인조대에 영의정을 역임하고, 또한 심충겸의 7세손이 경종비 단의왕후이다.
심의겸이 동서(東西) 붕당을 이루게 된 발단은, 장원으로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된 김효원이 오건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직에 추천되었으나 명종대에 김효원이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생활을 한 것을 좋지 않게 여겨, 결국 김효원은 전랑이 되지 못했다. 문무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을 이조전랑이라 한다.
청요직으로 3사의 추천권과 후임을 지명하는 자대권도 행사하는 자리로 정승과 판서도 제재하는 핵심보직이었다. 결국 2년 후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발탁되었다.
이후 심의겸이 이조참의로 있고 김효원이 정랑(正郞:이조정랑은 정5품직)으로 있을 때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장원급제하여 정랑(正郞, 정5품)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정랑직은 외척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은연중에 붕당을 이루게 되어 마침내 동인. 서인으로 붕당된 이후 사색당쟁으로 번지게 되었다. 심의겸은 붕당의 장본인이지만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왕실 외척이지만 명종때는 그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를 막아내는 등 원래는 붕당 형성을 꺼려했던 강직한 사람이었다.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에 산다 해서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쪽인 정동(貞洞)에 산다 해서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현대 정치사에서 ‘김영삼의 상도동계’ ‘김대중의 동교동계’ ‘김종필의 청구동계’와 같이 정파의 연원이 여기에서 파생되어 이후 300년 가까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당쟁사가 시작된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김효원 지지자로는 류성룡, 김우옹, 허엽, 이산해, 이발, 정유길, 정지연 등이었고, 그 외에도 정인홍, 우성전, 김성일, 이원익, 이덕형 등이었다.
한편 심의겸 지지자로는 박순, 김계휘, 정철, 윤두수, 구사맹, 홍성민, 신응시 등이었다. 그 외에도 송익필, 조헌, 이산보, 이귀 등이 포진했다. 주로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나 지인들이 포진했다. 이 당시 당사자들도 이후에 벌어지는 살육과 극한 대립의 기축옥사와 당쟁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붕당정치의 단초를 연 동인의 거두 김효원
(대원기시보 2012.08.01 18:12)
현재 선산(善山)은 1995년 도농복합도시로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돼 구미시 선산읍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선산의 옛 지명인 ‘일선’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대목은,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 21대왕 소지마립간 8년 정월 조’ 의 기록이다.
또한 23대 법흥왕 15년 조에도 ‘불교를 처음 시행하였다. 앞서 눌지마립간 때에 묵호자(墨胡子)란 중이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니 군민 모례(毛禮)란 사람이 자기 집에 토굴을 일구고 그를 모셔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현재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2년(417)에 구미시 해평면에 지은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이와 같이 ‘일선’은『삼국사기』에 무려 11차례나 나온다. 이름은 ‘일선’ ‘일선군’ ‘일선주’ ‘일선현’ ‘선주(善州)’ ‘숭선(崇善)’ 등 여섯 가지다.
그러나 주 명칭은 ‘일선’이라는 표기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종 13년(1413년), ‘선산부’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선산지방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 군사, 교역상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가 936년 선산군 일리천(一利川)에서 벌어진다. 이 전투는 927년의 공산 동수전투와 930년 안동의 고창전투, 934년 운주성전투에 비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후삼국 최대의 전투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려군 총 8만 6800명의 병력이 참가한 전투로 이 전투를 계기로 신검의 후백제는 멸망하고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다.
왕건의 삼한통일을 완성하는 일이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선궁의 행적과 선산 김씨의 연원이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김선궁은 시호 순충(順忠)으로, 선산(善山;일선 一善) 김씨(金氏)의 시조(始祖)이다. 남정(南征)차 선산에 이른 왕건(王建)으로부터 활을 하사받음으로써 이름을 선궁으로 고치고 그를 따라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삼중대광(門下侍中三重大匡)·정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선궁(金宣弓)은 김알지의 30세손이며, 문성왕의 8세손이다.
그런데 선산 김씨는 김선궁 계통외에도 경순왕의 여덟째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계통, 그리고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김선궁계와 김추계가 선산 김씨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들 김선궁계와 김추계는 현재까지도 선산 김씨의 정통성을 놓고 족보의 위작 등을 거론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는 김추계 선산 김씨뿐 아니라 삼척 김씨, 원주 김씨, 진주 김씨, 온양 김씨, 희천 김씨 등이 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김병진 대림그룹 회장이 김추계 선산 김씨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선산지역에서는 들성 김씨로 더 알려져 있다.
선산이 크게 부가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이다. 정통성리학의 학통을 전수한 길재가 ‘선산’에 낙향하여 지방 자제들에게 ‘소학(小學)’ 교육과 ‘가례(家禮)’에 의거한 성리학 및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강수(講修)하자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고 그것이 다시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부자(父子)로 이어지면서 신진사류들이 곳곳에서 모여 들었다. 이 때에 전성기를 맞는 ‘선산의 도학 학통’은 온 나라를 풍미했고 여기에 ‘선산’은 학문적으로 ‘영남의 제일’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16세기의 도학을 사상으로 하는 사림파가 1567년 선조 즉위와 함께 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본격 등장한다. 1575년 을해년에 사림파가 자체적으로 붕당을 맞이한다. 동서 분당(分黨)의 장본인으로 한 축에 서인의 심의겸이 있었다면 다른 축에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이 있었는데, 동인을 대표하던 김효원이 김선궁계의 선산 김씨다. 성암은 서울에 살았고, 당파싸움의 주역으로만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김효원은 결국 외직을 전전하다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사책에서 동성붕당의 장본인으로 각인된 성암은 실제로 어떤 인물일까? 김효원은 1542년 부친 현감 김홍우와 모친 윤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김수현, 조부는 김덕유, 동생 소암(素菴) 김이원(金履元, 초명 信元, 1553~1614)은 문과를 거쳐 익사공신과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또 다른 동생인 곤륙재(困六齋) 김의원(金義元, 1558~?)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김이원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붕당할시 북인으로 활동하였고, 다시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갈려질 때 대북파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관작이 삭탈당하였다. 김효원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증조부와 조부와 같이 나란히 있다.
김효원은 일찍이 한성에 올라와 건천동(乾川洞)에 살았는데, 건천동은 오늘날 퇴계로 주변으로, 이 지역은 역대로 김종서ㆍ정인지ㆍ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유순정(柳順汀)ㆍ이황ㆍ노수신(盧守愼)ㆍ허엽ㆍ허봉ㆍ유성룡(柳成龍)ㆍ이순신(李舜臣)ㆍ원균(元均) 등이 거주한 지역이다. 원균은 1540년 생, 류성룡은 1542년 생, 이순신은 1545년 생으로 유년시절에 같은 동네에 거주한 것이다. 김효원은 서애 류성룡과 동년배로 초시에 같이 합격한 동기생이다.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나중에 호조판서를 역임한 손자 김세렴(1593~1646)도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김세렴의 외조부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형 허봉이다. 서애 류성룡은 다음해 명종(明宗) 21년(1566) 병인(丙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11위로 합격한다. 김효원은 같은 선산김씨인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고 이황의 제자이자 조식의 문하에도 찾아가서 공부하였다.
성암의 가계를 보면, 초당 허엽(1517~1580)과 사돈관계로 맺어졌다.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동문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박순과 반대로 동인의 영수로써 활약하였다. 허엽은 동서분당시 심의겸을 배척하고 김효원을 지지한다. 허엽은 허성․허봉․허균의 세 아들과 허난설헌의 걸출한 딸을 두었는데, 허봉의 딸이 맏며느리로 아들인 김극건과 결혼하였다. 동시에 허봉의 동생인 교산 허균을 맏사위로 들인다. 허균의 입장으로 보면 본가에서는 질녀가 처가로 와서는 손위 처남댁이 된 것이다. 또 허봉의 딸 입장에서 보면 친정에서는 숙부가 시댁에 와서는 시누이의 남편이 되었다. 허봉(許篈, 1551~1588)은 양천 허씨로 『하곡집』과 『해동야언』을 남겼다. 허봉의 매형은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영수였던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이다.
허봉은 1583년 동인의 박근원, 송응개와 더불어 서인으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와 박순 및 우계 성혼을 공격했는데, 그 당시 선조는 율곡을 옹호하면서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유배시켰다. 이를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른다.
김효원은 소재 노수신과 율곡에 조정책에 의해 삼척부사로, 심의겸은 전주부윤으로 발령이 나 지방관으로 보내졌다. 그는 약 10년간 지방관 생활을 하며 서당과 서원 설립을 장려하는 교육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그 이후 한번도 도성을 밣지 않았다. 황해도 안악군수와 영흥부사로 재직중 사망하였다. 삼척의 경행서원에 제향되었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전] 북위(北魏)를 세운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拔珪)
(대기원시보 2012.08.14 16:01)
삼국시대를 이은 서진시대를 마감하고 흉노․선비․갈․저․강족 등의 5호가 세운 16국 시대는 흉노의 맹주 유연(劉淵·재위 : 304년~310년)이 팔왕의 난으로 혼란해진 서진을 벗어나 산서성에서 자립하여 한왕(漢王)이라고 칭한 304년부터 북위(北魏· 386~534)의 세조 태무제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16국 시대를 마감한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였다. 선비족은 흉노왕국이 후한 초 남북으로 분열되어 쇠퇴한 뒤 나타난 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부족이다. 오환족과 함께 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몽골계의 유목민족으로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는 동호족(東胡族)에 속한 민족이다.
이러한 선비족을 통일한 인물이 2세기 전반에 나타났는데 바로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다.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한 선비족은 이후 모용부, 우문부, 단부, 탁발부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요녕성에 근거한 모용부가 화북에 침입하여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을 세우고, 내몽고 성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의 화림격이(和林格爾) 방면에 유목하고 있던 탁발부가 북위(北魏)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선비족의 탁발씨는 역미시대부터 큰 발전을 시작하여 310년 서진(265~316)의 회제(懷帝)로부터 대국공(代國公)으로 봉해진 의여(猗廬)시대를 거쳐 십익건(什翼犍) 시대에 계급사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376년, 전연과 전량을 평정한 전진의 부견(符堅)이 성락(현재 내몽고 화림격이현 북쪽)을 공격하여 대나라는 부견에게 멸망했다. 이후 전진은 평성(현 산서성 대동)에 오환부를 설치하여 황하를 경계로 동부에 유고인을 서부에 유의진을 임명하여 통치했다.
십익건의 손자이자 북위의 창업자인 탁발규(拓拔珪·371~409)는 북위의 초대 황제 도무제(道武帝·재위 386년~409년)이다.
탁발규의 아버지는 대나라 왕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의 아들, 탁발식(拓跋寔)이며, 어머니는 하란부 출신인 하씨 부인이다. 탁발규가 태어나기 몇 달 전 아버지 탁발식이 반란을 일으킨 장손근을 제거했으나 본인도 죽었다. 몇달 후, 하씨 부인은 탁발규를 낳았다. 이때 조부인 십익건은 하란부 세력과의 관계가 악화 되는 것을 꺼려 임신 중인 며느리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 후 십익건과 하씨 부인은 아들 셋을 더 낳았는데, 그들이 탁발의(拓跋儀), 탁발열 (拓跋烈), 탁발고(拓跋孤)이다. 이런 상황은 이 당시 유목민의 풍속이었다.
탁발규가 여섯 살 때에 십익건이, 자신의 어리석은 삼촌인 탁식군의 칼에 죽어, 적전 내분으로 인해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AD 376년), 어머니와 함께 적국의 수도로 끌려간다. 이와같이 탁발규의 인생은 초년부터 기구한 운명의 굴레에서 시작된다.
한편, 장안으로 끌려간 탁발규와 하씨는 대국 땅을 반으로 나눠 통치를 하던 독고부의 유고인에게 의탁하게 된다. 독고부의 유고인은 탁발규를 극진하게 배려하고 보살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前秦)의 부견이, 남쪽의 동진(東晉)에 대해 정벌전쟁을 일으켰지만, 현재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는 화이허 강(淮河)의 지류인 비수(淝水)의 전투(AD 383년)에서 동진의 명장 사현(謝玄)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탁발규의 후견인이었던 유고인이 부하에게 살해되고, 유고인의 아우인 유권과 유고인의 아들 유현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유현이 유권을 죽이고 자립했다.
그러나 유현은 유고인과 달리 탁발규를 제거하고, 한편으론 탁발규의 어미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를 탐할 생각을 한다. 사서에는, 유현이 탁발규 어미의 미모에 반하여 수연삼척(垂涎三尺·침을 삼척이나 흘린 것을 말함)했다고 한다. 결국 탁발규는 모친과 외삼촌이 있는 하란부에 갔다. 하눌은 기뻐하며 말했다.
“앞으로 나라를 되찾으면 이 늙은이를 잊지 말게.”
이후 북중국을 통일한 부견이 강족인 요장에게 죽고 전진이 와해되자 북중국은 다시 힘의 진공상태로 빠진다. 이런 상황 변동은 부견에게 멸망 당했던 왕조들의 후예에게 다시 할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 일어난 정권이 모두 12개로 관동의 후연(384~409·선비족 모용수), 남연(398~410·선비족 모용덕), 북연(409~436·한족 풍발), 서연(384~394·선비족 모용홍), 관중의 후진(384~417·강족 요장), 서진(385~431·선비족 걸복국인), 하(407~431·흉노족 혁련발발), 하서의 후량(386~403·저족 여광), 남량(397~414·선비족 독발오고), 서량(400~421·한족 이고), 북량(401~439·흉노족 저거몽손) 등과 대국을 재건한 탁발규가 세운 북위이다.
AD 386년 정월, 우천(牛川·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 호화호특 동쪽)에 한데 모여 탁발규는 즉위행사를 거행하면서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선포한다. 이때 탁발규의 나이가 16세였다. 398년 평성(현 산시성의 대동시)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국호 역시 위(魏)라고 바꾼다.
훗날 역사가들은 ‘전국 시대의 위나라’와 ‘조조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탁발규의 위나라를 북위(北魏)라고 명명했다. 이때 탁발규의 나이가 19세였다.
395년, 후연과 북위는 전쟁에 돌입했다.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총사령관으로 보내 북위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모용보는 오늘날 산시 다퉁 부근의 참합파에서 대패하여 수만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이때 탁발규는 그가 투항한 후연군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다시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정비해 이듬해인 396년 3월 출정했다. 모용수가 평성으로 가던 도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는데, 후연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70세의 나이가 있고 중병에 걸린 모용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병사들은 평성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산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모용수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혜민제이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두려워 않고 40만 대군을 풀어 전진하여 396년 후연의 수도 하북성의 중산에 입성하였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 그는 최굉과 같은 지식인을 널리 받아들여 한화정책을 강행했다. 제도와 예의범절을 정비하고, 궁전과 종묘를 짓고 통일된 도량형을 규정하고, 관직의 품급과 각종 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제정하고 법령과 각종 금령을 명시했다. 행정 구역과 군사 제도도 확실히 하여 나라를 질서 정연하게 정비해나갔다. 북위의 경제도 이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여 국가의 재정 상태도 풍족해졌다.
그러나 만년에 병고로 정신착란증이 생겨 많은 공신들을 죽였다. 주위에 도사린 죽음의 위협을 느낀 조정 관리와 백성들은 불똥이 언제 튈지 몰라 공포의 날을 보냈고, 관리는 일을 하기는 커녕 제 몸 사리기에 급급하니, 법 기강이 문란해졌다. 결국 탁발규는 그의 차남인 탁발소(拓跋昭)의 손에 살해당했다. 북위의 2대 황제 자리는 그의 장남인 탁발사(拓跋嗣)에게 돌아갔는데, 그가 바로 명원제이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남북조시대를 연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
(대기원시보 2012.08.22 16:34)
비수대전(淝水大戰)은 삼국시대의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더불어 중국천하를 두고 붙은 큰 전쟁이었고, 광무제의 곤양대전과 같이 8만의 소수병력으로 90만의 다수병력을 제압한 패권전쟁이었다. 비수대전 이전의 중국의 정세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4세기 전반기 화북의 패권을 장악했던 갈족의 석륵(재위·319년~333년)이 건국한 후조(後趙·319~351)가 염민이 세운 염위(冉魏·350~352)에게 멸망하자. 이후 북중국의 패권은 351년 티벳계의 저족인 부건이 장안을 수도로 건국한 전진(351~394)과 요령성에서 성장하여 하북으로 진출한 선비족의 모용황이 세운 전연(전연·337~370)이 동서를 경계로 다투게 되었다.
357년 즉위한 전진의 부견(苻堅·재위357~385)은 한족인 왕맹을 중용하여 동쪽의 전연, 감숙성의 전량, 북쪽의 대, 남쪽의 익주와 양주를 점령하고 376년 북방을 통일했다. 그러나 비수대전의 참패로 위대한 세계주의자 부견은 나중에 후진을 세운 강족 요장에게 죽고, 394년 전진은 후진에게 멸망하고 만다. 한편 372년 부견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순도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다.
비수대전 이후 북중국은 다시 10여 개의 국가로 분열되는 양상이, 북위의 태무제가 북중국을 통일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분열과정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선비족의 모용수는 부친인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337~370)의 뒤를 이어 중산(현 하북성 보정시 정주)을 도읍지로 하여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한다. 후연은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 집권기에 북위와 광개토태왕의 수년간에 걸친 공격에 의해 숙군성, 요동성 등 후연의 요동땅을 점령당하면서 곧 망하고, 모용수의 부장이었던 한족인 풍발이 용성(요령성 조양)에서 북연(北燕·407~436)을 건국한다. 모용수의 동생인 모용덕(慕容德)은 후연(後燕)에서 분리 독립하여 연주북부(하남성 동부지역)와 청주(산동성 서남부지역)를 기반으로 남연(南燕·398~410년)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남연은 410년 유유가 이끄는 동진군에게 멸망한다.
한편 모용수의 조카이자, 전연의 황제였던 모용준의 아들인 모용홍과 모용충이 섬서성 동부와 산서성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서연(西燕·384~394)을 건국하였으나 결국 후연에게 멸망하였다. 서연은 역사가 짧고 영향력이 적어 16국으로 꼽히지 않는 국가이다.
비수대전에 부견의 장군으로 참여했던 요장은 강족을 규합하여 장안에서 후진(後秦·384~417)을 세웠다. 한때 감숙성 동부와 섬서성 일대를 지배했던 후진은 요홍(姚泓)집권시에 유유가 이끄는 동진에게 멸망하게 된다.
남흉노(南匈奴)의 후예로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혁련발발이 후진에서 독립하여 하(夏·407~431)를 세운다. 하는 역사상 마지막으로 선우(單于)를 칭했던 흉노 국가로,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산서 남부에 이르렀고, 토욕혼(吐谷渾), 북량(北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큰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31년 1월 동생인 혁련정(赫連定)이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가 토욕혼에게 습격을 받아 괴멸당하고, 혁련정도 사로잡혀 하는 멸망했다.
감숙성 서쪽인 돈황과 주천지역은 이고(李暠)가 서량(西凉·400~421)을 건국했으나, 421년 북량의 저거몽손에 의해 멸망한다. 전진의 장군 저족의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 후 간쑤성(甘肅省) 고장(감숙성 무위)에서 장궤가 세운 전량(前凉·301~376)의 뒤를 이어 후량(後凉·386~403)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여광 사후 형제가 골육상잔을 벌여 후진의 요석덕의 공격으로 403년 멸망했다.
선비족 걸복국인(乞伏國仁)은 감숙성 금성(감숙성 난주)을 위주로 서진(西秦·385~431)을 건국한다. 그러나 400년에 후진에게 패배하여 서진은 일단 멸망하고, 409년 걸복건귀가 다시 서진을 건국하였다. 걸복치반(乞伏熾磐)은 414년에 청해성 지역의 선비족인 독발오고가 세운 남량(南凉·397~414)을 멸망시키고 북량(北凉)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431년, 하의 혁련정(赫連定)에게 멸망당했다.
흉노계(匈奴系)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사촌 형제인 저거남성과 합쳐 단업을 추대하여 간쑤성 장액에서 북량(北涼·397년~ 439년)을 세운다. 북량은 남량과 손을 잡고 후량을 멸망시킨다. 412년에는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천도하여, 414년 이후 동쪽의 서진(西秦)과 대립하는 한편 감숙성 서쪽의 서량(西凉)과도 대립하여 421년에 서량을 멸망시키고 돈황(敦煌) 일대를 장악하였다. 433년 저거몽손의 아들 저거목건(沮渠牧犍)이 문치(文治)을 펼쳤으나, 439년 북위 태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16국시대는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이 383년의 비수대전 이후 하북지역은 10여 개의 정권이 할거하여 물고 물리는 형국으로 전개되고 남쪽은 동진과 동진(東晉·317~420)을 이은 유송(劉宋·420~479)이 성립하여 남북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북방의 혼란기에 북위의 태무제가 등장하여 비수대전 이후 56년간 계속된 북방의 혼란을 청산하고 다시 화북지역을 통합하였다.
북중국을 다시 통일한 태무제(太武帝)는 북위의 제3대 황제(재위·423년~452년)로, 도무제 탁발규와 명원제 탁발사의 뒤를 이어 북위를 부흥시켰다. 그는 전쟁에 일가견이 있어 하(夏)를 점령하고,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유연과 서역을 공격해, 북방의 위협을 제거하자 남방 정벌을 시작했다.
말년인 450년 송 문제(424~452)와 치른 송위대전(宋魏大戰)으로 송을 공격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송나라의 번영도 끝나고, 북강남약(北强南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었으나 장수왕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송과 대치한다.
태무제는 한인 관료 최호의 추천으로 도교의 구겸지와 손을 잡고,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중국 최초의 불교 배척운동이었다. 이 외에도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 5대10국시대 후주의 세종이 불교를 배척하였는데, 이것을 ‘삼무일종의 법란’이라 부른다.
태무제는 명재상이었던 최호를 중용하여 내정을 정비하였다. 최호는 북위의 중요한 정치군사결정에 참여하여 북위정권을 공고히 하고, 북방의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호는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강제적인 한족화로 인한 선비귀족들의 시기로 인하여 450년 ‘국사편찬사건’으로 태무제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태무제 역시 452년에 요사한 환관 종애(宗愛)에게 살해당하였다.
태무제 사후 잠시 혼란했으나 4대 문성제(文成帝·452~465)가 즉위하여, 불교 탄압을 폐지해, 사문의 담요에 명해 운강석굴의 축조를 시작했다. 이후 헌문제가 옹립되었으나, 471년 풍태후는 헌문제를 살해하고, 5살의 효문제를 즉위시킨다. 풍태후는 20년간 섭정을 하면서 삼장제와 균전제를 시행하여 북위를 한 단계 도약시킨다.
490년에 풍태후가 죽고 친정한 효문제(471~499)는 풍태후의 유산을 계승하여 과감한 한족화정책과, 493년 대동에서 낙양으로의 천도로 북위는 크게 번영한다. 149년 유지된 북위는 태무제, 문명태후섭정, 효문제의 한족화 개혁정책이 북위의 번영을 이루었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기생 일타홍 덕에 개과천선한 청백리 심희수
(대기원시보 2012.08.29 17:52)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06-1의 낮은 능선에 좌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심희수(沈喜壽·1548∼1622)의 묘와 부인인 광주 노씨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봉분 왼편에 ‘일타홍금산이씨지단(一朶紅錦山李氏之壇)’이라고 쓰인 제단이 있는 점이다.
“한 떨기 꽃” 일타홍(一朶紅)은 심희수와 무슨 인연으로 봉분 왼편에 제단을 만들었을까? 일타홍은 명종과 선조 때의 금산출신의 기생이었다. 일타홍은 조선시대 기생의 대명사격인 황진이(黃眞伊·1506년?~1567년?)나 의기 논개에 비해 일반인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나, 성숙하여 식견이 뛰어나 사람들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 게다가 천하일색에 가무조차 뛰어나 여기저기 연회에 빠져서는 안 될 당대 최고의 명기였다. 아마 자오묘유(子午卯酉)의 도화살(桃花殺)에 머리가 총명하고 미모가 빼어난 식신(食神)이나 상관(傷官)을 소유한 인물임에 틀림 없었다.
한편 심희수의 친가와 외가의 가계를 살펴보면 최고의 명문가의 집안임을 알 수가 있다. 먼저 친가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희수의 묘 곁에 자리한 일타홍의 제단
그의 7대조가 조선개국공신인 심덕부(沈德符·1328년~1401년), 6대조는 바로 세종의 국구(國舅)인 심온, 5대조는 영의정을 역임한 심회(沈澮·1418~1493)이다. 고조부는 심회(沈澮)의 막내인 심원(沈湲), 증조부는 심순문(沈順門), 조부는 심순문의 3남인 심봉원이다. 효창노인(曉窓老人) 심봉원(沈逢源·1497~1574)은 벼슬이 당상관인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며, 그림·글씨·음률·의술에 능통하여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김해김씨와의 사이에 외동아들이자 심희수의 부친인 심건을 두었다.
심희수의 종조부인 심연원은 명종때 영의정, 심달원(沈達源·1494년~1535년)은 조광조와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 욱재(勖齋), 만취당(晩翠堂) 심통원(沈通源· 1499년~1572년)은 좌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는 심희수와는 6촌남매간이다.
외조부는 광주이씨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1484∼1548)이다. 이연경은 조광조의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조광조가 희생당한 기묘사화때 고향인 충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했다.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다. 명종,선조조에 정승을 역임한 동고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이연경의 종제로, 이연경에게 배웠다.
이연경은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죽고 큰딸은 선조때 영의정을 역임한 노수신(盧守愼·1515∼1590)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심건(沈鍵)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생원(生員) 강유선(康惟善)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소재 노수신과 강유선은 심희수의 이모부들이다.
이와 같이 심희수는 친가 외가가 모두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3세 되던 해에 부친인 경성헌(警省軒) 심건(沈鍵·1519~1550)이 심희수, 심창수 아들을 두고 32세로 일찍 별세하자, 홀어머니와 살게 되었다. 그는 엄한 어른이 없이 자라서 벗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희수와 일타홍의 운명적인 만남은 심희수가 15세 때, 두 살 연상인 일타홍은 17세 때 어느 재상 집 잔칫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날도 심희수는 역시 벗들과 함께 재상집 연회에 가서 술 마시고 노니면서 기생을 희롱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대부분의 기생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들을 피하는데, 일타홍은 심희수의 얼굴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는다.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가만히 다가가 속삭인다.
“술자리가 끝나면 집으로 찾아갈 터이니 기다리세요.”
그날 저녁 일타홍은 약속한대로 심희수를 찾아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한다. “소첩은 일찍부터 관상술(觀相術)과 운명학을 공부하였는데, 오늘 우연한 기회에 도련님의 관상을 보니 장차 크게 되실 관상입니다. 그래서 소첩이 일부러 도련님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마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오늘부터 이 댁에 들어와 도련님을 올바론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심희수의 모친은 일타홍의 간청을 허락했다.
몇 년 뒤에 일타홍은 심희수가 자신에게 너무나 빠져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라’는 편지를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이후 심희수는 일타홍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워낙 머리가 비상했던 심희수는 이모부인 소재 노수신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2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인 1572년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일타홍과 다시 만난다.
일타홍을 사랑한 심희수는 기생과 결혼할 수 없어 결국 이모부인 노수신의 동생인 盧克愼(노극신)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노수신은 이모부이자 처숙부가 되는 관계이다.
그 후 다시 10년이 흘러 심희수는 35세 되던 해에 일타홍의 고향인 금산(錦山)군수로 가게된다. 그런데 일타홍이 금산에서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일설에는 자살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으니 유명한 상월(賞月·달구경)이라는 절명시이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가 36세이니 일타홍의 나이는 아마도 38세 쯤 되었을 것이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을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경기도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심희수가 일타홍의 시신을 상여수레(輀車)에 싣고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는다. 그 시가 유명한 ‘이별눈물(有倬)’이다.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금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낱 기생 출신으로 정승가의 선영에 묻힌 것은 일타홍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지금도 후손들이 시제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이후 심희수는 관직에 있으면서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옥사를 관대히 처분하도록 노력하기도 하였고, 영창대군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을 당하게 된 남인 계열의 저명한 학자 동계 정온(鄭蘊·1569~1641)을 구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로 호송하고 이조판서가 되었고, 또 승진하여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된 인물이 바로 심희수이다. 심희수는 여자를 잘 만나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라 하겠다. 이런 것을 명리학용어로 남자를 잘되게 하는 팔자인 ‘명관과마((明官跨馬)’의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북위의 전성시대를 이끈 여성 정치가 풍태후
(대원기시보 2012.09.12 16:43)
북위 역사상 최고의 황제로 평가받는 인물은 탁발굉 효문제이다. 효문제(471~499)의 과감한 한족화 정책으로 북위가 크게 번영한 배경에는 중국 역사상 걸출한 여류 정치가로 평가받는 풍태후(馮太后, 시호는 문명태후, 442~490)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풍태후의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풍발(馮拔)과 풍홍(馮弘)으로 바로 북연(北燕 407~436)의 문성제(文成帝, 409~430)와 소성제(昭成帝,430~436)이다. 풍발은 KBS 드라마 ‘광개토대왕’에도 자주 등장했던 후연의 전략가로 모용희를 제거하고 고운을 즉위시켜 북연을 실질적으로 세운 인물이다.
409년, 고운이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 당하자, 풍발은 혼란을 평정하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였다. 풍발은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北魏)와 대립하였다. 430년에 풍발이 죽자, 동생 풍홍(馮弘)이 풍발의 태자인 풍익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432년 11월 북연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요서지방에서 폐출된 태자 풍숭(馮崇)이 자립한 것이다. 풍숭은 풍홍의 원처(元妻) 왕씨가 낳은 아들이자, 바로 풍태후의 큰아버지이다. 풍숭은 후처 모용 씨 소생 풍왕인이 태자에 책봉되자 모친인 왕 씨와 동생 풍랑·풍막과 함께 도망가서 북위에 귀순했다.
풍숭과 함께 북위에 귀순한 동생 ‘풍랑(馮朗)’이 바로 풍태후의 아버지다. 그러나 풍랑은 동생인 풍막이 유연에 투항하자,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어린 풍태후는 태무제의 후궁(左昭儀)이었던 고모의 배려로 7세에 북위 궁정에 들어와 성장한다.
드디어 456년 14세의 풍태후는 두 살 많은 문성제 탁발준(文成帝 拓跋濬, 440~ 465, 재위:452 ~ 465)의 황후가 된다. 문성제 탁발준은 종애의 이간책에 의해 요절한 태무제의 황태자 탁발황의 아들이다. 종애(宗愛)는 문성제의 조부 태무제와 숙부인 탁발한(東平林王 拓跋翰, 탁발황의 이복동생)과 남안왕 탁발여(南安王 拓跋余)를 살해한 희대의 인물이다. 결국 유니(劉尼)와 원하(源賀)가 종애를 살해하여, 황태자 탁발황의 장남인 문성재 탁발준이 즉위한다.
문성제는 즉위 후 태무제가 시행한 불교 탄압을 폐지해, 승려인 담요에 명해 운강석굴의 축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문성제는 즉위 14년 만인 26세에 요절하고 만다. 문성제의 죽음으로 12세의 탁발홍이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헌문제(獻文帝, 465~471)이다. 문성제의 황후였던 풍태후는 어린 나이인 24세에 황실 최고의 어른인 황태후 자리에 오르게 된다. 풍태후는 문성제가 사망하자 그의 유품 속으로 뛰어들 만큼 열부(烈婦)였다고 한다.
한편, 보통 여자가 과부가 되는 팔자는 사주에 남편을 상하게 하는 육친(六親)인 상관성(傷官星, 사주팔자 가운데 일간 다음에 오는 오행으로 음양이 다른 오행을 말하는데, 甲木이 丁火를 乙木이 丙火를 보는 경우이다)이 강하거나, 남편궁이 형충(刑沖)을 당하거나, 남편성을 나타내는 정관과 칠살이 매우 약하거나 형충을 당하면 과부로 살 경우가 높은데, 일간과 같은 오행인 비견과 겁재가 강해도 과부가 될 확률이 높다.
육친이란 사주팔자에서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 등의 가족관계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육신이나 십성이라고 한다. 육친에는 비견(比肩), 겁재(劫財), 식신(食神), 상관(傷官), 편재(偏財), 정재(正財), 편관(偏官), 정관(正官), 편인(偏印), 정인(正印)이 있다. 풍태후의 정확한 팔자는 모르겠으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것도 이런 영향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문성제가 요절하는 바람에 10대 초반의 황제와 20대 초반의 황태후가 정권을 잡으니 북위의 실권은 차기대장군으로 승상인 을혼(乙渾)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관료들은 물론 일부 황실과 대신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을혼의 전횡에 은인자중하던 풍태후는 은밀히 을혼의 제거작업을 진행하여 결국 을혼을 급습하여 나포했다. 풍태후는 을혼을 처형해 북위정권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467년 탁발홍 헌문제는 이(李)부인에게서 나중에 효문제로 등극하는 원굉(元宏, 탁발씨는 원으로 바뀜)을 낳자, 아들이 없던 풍태후는 몸소 그를 양육한다. 만 2년간 섭정한 풍태후는 대권을 헌문제에게 넘기고, 효문제의 양육에만 전념한다.
이 당시 북위에는 태자를 낳은 생모는 사약을 먹고 죽어야 하는 제도가 있어서 효문제의 생모인 이부인은 죽고 풍태후가 효문제를 양육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문명태후와 효문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즉 문명태후와 효문제는 모자관계라는 설이다. 헌무제의 나이 14세때 효문제가 태어났는데, 이것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해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문제라 본다.
그런데 471년 십대 후반의 헌문제는 실력있는 황제였으나 풍태후와의 갈등으로 겨우 5세 된 원굉에게 재위를 물러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이 당시 젊은 과부였던 풍태후는 이혁이라는 인물과 정을 통했는데, 이런 꼴을 보지 못한 헌문제는 풍태후의 연인인 이혁과 이혁의 형제들을 주살해버린다. 결국 풍태후와 헌문제는 갈등관계로 발전하여 노련한 풍태후가 476년 결국 23세의 헌문제를 암살했다.
한편 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는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몇 년,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함락하여 개로왕(455∼475)을 죽이고 8000명의 포로를 잡아간다. 백제의 문주왕은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만, 문주왕과 동성왕이 귀족들에게 피살당할 만큼 백제는 허약한 정권을 이어간다.
476년부터 490년 까지 2차 섭정에 들어간 태황태후인 풍태후는 강력한 권력으로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조정을 이끌었다. 그녀는 급료가 없어서 횡령과 약탈이 만연한 관료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반록제(班祿制)를 실시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이 당시 풍태후가 실시한 조치들은 나중에 효문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장안에서 성장한 풍태후는 어린 효문제에게 유가의 도리를 담은 『권계가(勸誡歌)』나 『황고(皇誥)』18편을 써서 가르쳤다. 이런 한화교육은 효문제의 한화정책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풍태후와 효문제는 485년 농민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했다. 이듬해는 삼장제를 실시했다. 삼장제는 5가(家)를 1린(隣)이라 하여 인장(隣長)을 두고, 5린에 이장(里長)을 두고, 5리에 당장(黨長)을 세우는 제도로 인장과 이장, 당장들은 호적관리와 균전제 집행, 부세의 독촉과 요역, 병역을 징발하는 일 등을 맡았다. 이와 함께 새로운 조세제도인 조조제(租調制)를 실시하여 균전제와 삼장제, 조조세가 서로 연계되도록 하는 일체의 개혁이었다.
특히 균전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쳐 북제(北齊, 550~ 577)와 북주(北周, 557~ 581) 및 수․당 각 왕조들도 모두 균전제를 실시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수한 중국의 개혁정책들이 실패를 거듭했으나, 효문제의 개혁정책은 성공적인 개혁으로 평가된다. 북위의 경제발전과 민족융합을 촉진시켜 세계주의의 이상을 표방한 효문제의 성공에는 문명태후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봉건사회의 한 여성으로서 유목민의 나라였던 북위를 강력한 대국으로 만든 풍태후는 중국역사상에 나타나는 여성 정치인 가운데 성공한 정치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신사임당에 비견되는 자녀교육의 모범 정경부인 고성이씨
(대기원시보 2012.09.20 03:29)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은 국보(5)와 보물(35) 사적(2)등 국가지정문화재(76)와 도지정문화재(132)등 총287점의 문화재가 산재한 세계역사도시이다. 또한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진입하다가 좌측에 보면, 보물 182호인 임청각과 국보 16호인 신세동 법흥사지 7층전탑(法興寺址七層塼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85호인 고성이씨 탑동종택이 있다. 이곳의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났다.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이상룡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고성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황(李璜)은 고려때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아
고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칠세(七世) 이존비(李尊庇, 1233~1287)가 진현전(進賢殿) 대제학(大提學)(현 대학교 총장 격임)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이존비의 손자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은 원나라의 농서인『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또한 서예에 능하여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盟頫)의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이암(李癌)의 아들인, 이강(李岡)은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장인(丈人)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초기의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강의 아들이자,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이다. 이원의 일곱 아들(대, 곡, 질, 비, 장, 증, 지)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 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 이 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주가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이곳 임천각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함재 서해(涵齋 徐懈, 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다. 이 사람이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 고성이씨 부인이다. 서성의 외조부인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는데, 외동딸은 어릴적 홍역을 앓으면서 불행하게 눈이 멀게 되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서해는 장가를 들기 위해 고성 이씨 댁으로 향하던 중 주막에서 주모의 기절초풍할 말을 들었다.
“신부가 맹인인데 참으로 신랑이 아깝다”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신랑측은 즉시 파혼을 하고 돌아가자고 했으나, 도학자인 서해는 “이미 사주단자도 보냈고 장님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맹인인 처녀에게 장가들겠는냐” 며 반대하며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서해의 쉽지 않은 이 선택은 결국 대구서 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되었다. 고성이씨는 비록 맹인이었으나 재색과 학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서해는 처가에서 물러 준 소호헌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면서 행정인 달인인 서성을 낳게 되어 손이 귀한 집안에 경사가 낳다. 현재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보물 475호인 소호헌에는 약봉태실이라는 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서해가 23세 되는 해 서성이 2세가 되던 해 1559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졸지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 고성이씨는 낙담했으나 외동 아들인 서성을 잘 키우는 것만이 요절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 생각하고 자식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맹모삼천지교’와 같이 서성의 숙부 서엄이 있는 한양의 약현(현재 서울시 중림동)으로 1560년 이사를 결심한다. 이런 결정은 교육적인 환경과 학맥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에는 연산군 이후 잇단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에서 태생지도 중요하지만 성장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여자의 사주팔자에서 직관력과 자식을 상징하고 음식솜씨 등의 재능은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으로 표현하는데, 아마도 고성 이씨가 식신과 상관이 발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성 이씨는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대지 오천평에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짓는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들인 약봉과 이씨 부인 단 둘에 불과했다.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개인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큰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십년 가지 아니해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내가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내 제삿날을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들인 서성은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까지 올랐고, 그녀의 손자이자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과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고성 이씨 사후에 특히 손자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 증손 15명, 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450여 년 전 이씨 부인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은 오늘날 가문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모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은의 하반기 역사와 폭군의 대명사 주(紂)
(대기원시보 2012.10.10 17:07)
은의 하반기 역사는 20대 반경부터 31대 제신까지의 기록이 선명한 편이다. 즉 반경(盤庚)-21.소신(小辛)-22.소을(小乙)-23.무정(武丁)-24.조경(祖庚)-25.조갑(祖甲)-26.늠신(廩辛)-27.강정(康丁),경정(庚丁)-28.무을(武乙)-29.문정(文丁)-30.제을(帝乙)-31.제신(帝辛)의 순서로 왕위를 계승했다. 반경(盤庚, 기원전 1290~1263)은 상나라 후기의 영명한 군주였다.
그는 도읍을 지금의 하남성 북부의 안양시에 속한 은(殷)으로 천도했는데, 이때부터 상나라는 은이라 칭한다. 그 당시 도성인 엄(奄:지금의 산둥 성 취푸)에 홍수가 심하고, 왕실내분을 피하기 위해 천도를 결정한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천도는 단행되어 상나라 역사에서 마지막 천도가 되었다. 이후 은나라는 8대 12왕에 걸쳐 273년간 수도를 은에 두었다.
그 유적지가 유명한 은허(殷墟)이다. 반경이 엄으로부터 은으로 도읍을 옮길 때 쓴 글이『상서商書』「반경盤庚」이다. 반경이 재위 28년 만에 죽자, 그의 동생인 소신(小辛)과 소을(小乙)이 왕위를 계승했다.
소을은 계승자의 교육에 힘써 태자인 무정을 사회에 내보내 사회 경험을 쌓게 했다. 무정은 사회에 나가 있는 동안 천하의 정세와 각지의 풍속, 인정을 이해하고, 빈곤한 백성을 방문하고 그들의 고난을 잘 헤아려 즉위 후에 정사를 처리하는 데 견고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한편 현인 감반(甘盤)을 경사에 봉해 국정의 보좌를 받았다. 무정은 민간 시찰을 하는 가운데 한 노예가 현명하고 학식이 있음을 알고 즉위 후에 재상에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부열(傅說)이다. 부열은 탕을 보좌한 이윤과 더불어 상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무정은 59년간 재위했으며, 수명이 ‘100세’에 달했다고 한다. 무정은 부열, 감반, 조기 등의 현인들을 등용해 정사를 돌보자 상나라는 다시 부흥했다.
무정 뒤의 조경(祖庚,)이 즉위하여 그의 부친인 무정을 융제(肜祭)하던 날, 조기가 임금께 올린 가르침을 후세의 사관이 기록한 것이 서경(書經)의 고종융일(高宗肜日)이다.
조경은 이름이 요인데 중국의 편년체 역사서로 황제시대부터 위(魏)나라 양왕 20년(BC 299)까지의 일을 서술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재위기간이 11년밖에 안 되었다.
무정에게는 비무, 비신, 비계 등의 3명의 왕후가 있었는데, 첫 번째 왕후는 조기를 낳고 얼마 안가 죽었다. 두 번째 왕후도 조경을 낳고 얼마 안가 죽었다. 그래서 무정은 세 번째의 아내인 비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계가 낳은 아들이 바로 조갑(祖甲)이다.
조갑은 조경이 죽자 왕위를 이어 받아 다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조갑의 재위기간은 33년에 달했다. 조갑이 죽고, 아들 늠신과 강정(康丁, 경정이라고도 함)이 재위를 물려 받았으나 방탕한 생활로 모두 재위 4년과 8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강정의 아들 무을이 즉위했으나 교만에 빠져 천신을 모독하다가 위수 근방에서 수렵을 하는 중에 벼락을 맞고 죽었다. 무을(武乙)이 죽은 후 아들인 문정(文丁)이 왕위를 계승했다.
문정 재위시에 주나라 문왕의 아버지 계력(季歷)이 상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백(伯)으로 임명되었으나 문정은 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해 계력을 감옥에 가두었다. 계력은 거기서 죽고 말았다. 계력의 아들 창이 계력의 뒤를 이어 백(伯)의 자리를 이어 받았는데, 이 사람이 주의 문왕이 되는 서백창(西伯昌)이다. 문정의 재위 13년간은 은과 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문정이 죽고 아들인 제을(帝乙)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을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다. 첫째에게서 계(啓), 중연(仲衍)을 낳았고, 둘째 부인은 기자(箕子)를 낳았다. 그러나 예법에 의해서 장자인 계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정실의 자식인 수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계는 산서성 노성시 동쪽인 ‘미(微)’를 하사받고 급은 ‘자(子)’로 했다. 그래서 계를 ‘미자’ 또는 ‘미자계(微子啓)’라 부르며, 그가 받았던 땅은 지금도 ‘미자진(微子鎭)’이라 부른다.
제을은 태자 책봉에서 어리석은 태사의 의견을 들어 결국 은이라는 천하를 잃게 되는 우를 범한다. 수덕은 호를 ‘제신(帝辛)’이라 하고 폭정을 휘둘러 은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주(紂)’이다. ‘주’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들이 의를 거스리고 선을 해치는 자라는 의미이다.
31대 임금 주왕 신은 절세 미녀 달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주지육림의 놀이와 가혹한 형벌로 포악함이 극도에 이르자 기원전 1046년 주의 무왕이 목야의 싸움에서 은을 멸망시키고 주왕조를 세워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주왕은 하의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말하는 고사성어인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달기(妲己)를 만난 이후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에 걸쳐 달군 뒤 그 위로 죄인을 걷게 했는데, 건너다가 미끄러져 불에 떨어져 죽게 하는 참혹한 형벌인 포락지형(炮烙之刑)과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들고, 남녀들을 발가벗게 하여 그 안에서 서로 잡으러 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게 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벌여 주의 무왕에게 정벌당한 인물이다.
은의 마지막 임금인 주는 은의 조공국인 유소의 왕이 주왕에게 바친 달기에게 매혹되어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세금을 무겁게 매겨 녹대(鹿臺)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鉅橋)를 곡식으로 가득 채웠다. 주는 나중에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각각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삼공(三公)으로 삼았다. ‘공주(公主)’는 중국 황제의 딸을 혼인시킬 때 ‘삼공(三公)’이 ‘주관(主管)’했기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구후는 딸을 주에게 바쳤으나 구후의 딸이 주를 극도로 싫어하자 , 주는 구후의 딸과 구후를 죽였다. 악후가 이에 완강하게 항의하자 악후도 포를 떠서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백창은 탄식했다. 숭후호가 이것을 알고 주에게 고자질하자, 주는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 서백창은 여기서 문왕팔괘를 연구했다. 서백의 신하 굉요(閎夭) 등이 미녀, 진기한 보물, 준마를 구하여 주에게 바쳐 겨우 서백은 석방되었다. 주는 서백을 서방 제후국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주는 비중(費中)과 오래(惡來)를 등용했는데, 이들은 아첨과 비방을 잘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자들이었다.
오래는 나중에 주의 무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왕자 비간(比干)은 주왕을 찾아가서 왕에게 권고했으나 주왕은 비간의 가슴을 헤치고 심장을 도려내어 죽였다. 주왕의 맏형 미자계는 ‘부자지간에는 혈육의 정이 있고, 군신 사이에는 의리가 있다.
부친의 잘못을 아들이 세 번 권고해도 듣지 않으면 아들은 부친의 옆에서 울 수밖에 없지만, 군왕의 잘못을 신하가 세 번 권고해도 듣지 않으면 신하는 군왕을 두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행장을 꾸려 미성부근의 민가에 숨어 살았다. 주왕의 숙부이자 이상적인 현인이었던 기자는 주왕의 박해를 피하고자 미친 척했지만 결국 주왕에게 감금되고 말았다.
주나라 무왕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를 정벌했다. 주의 무왕은 목야의 전투에서 갑자일에 주의 군대를 이겼다. 주는 도망쳐 녹대에 올라가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의 아들 녹보 무경(武庚)에게 봉토를 주어 은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 주는 걸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은주혁명(殷周革命)이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