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계기로 고위공직자 性윤리 들여다보니.. (조선일보 2013.05.26 14:35)
윤창중 계기로 고위공직자 性윤리 들여다보니..
김태완‘윤창중 성(性)스캔들’은 고위공직자의 그릇된 성 윤리의식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는 지적이다. 대개의 고위공직자 연령은 인생의 허리와 같은 중년. ‘수상쩍은 중년의 대머리(혹은 半白)’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최근 발행한 《월간조선》 6월호는 전·현직 정부 사정(司正)·윤리 업무 관계자들의 말을 빌려 “성공한 중년의 공직자일수록 비윤리적 성문제로 인사검증에서 탈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밝혔다. 권력기관에 속하는 법원·검찰·국회에 몸담았던 인사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얘기였다. 언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남의 허물을 ‘귤껍질’처럼 까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허물은 ‘화투패’ 감추듯 숨기는 이들이 많다”며 이렇게 말했다.
“법이나 권력에 가까이 있고 익숙한 이들일수록 부패혐의가 자신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 이가 많아요. 이런 사람일수록 아랫도리 문제는 염치를 모릅니다. 작년 서울동부지검의 초임 검사가 40대 여성 피의자와 성관계를 맺은 일이 있지 않나요? 놀라운 사실은 검찰청사 내 사무실 복도에서 그 여성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중년은 견고했던 도덕감(道德感)과 공직자 고유의 덕성(德性)인 체면(體面)이 무뎌지는 시기다. 정신분석학자 융(Carl G. Jung)의 말처럼 중년기는 ‘영적(靈的) 위기’가 도래하는 시기다. 게다가 이 중년의 고위공직자들은 남에게 사정하고 부탁할 일이 별로 없다. 시쳇말로 가만히 있어도 술·밥을 사겠다는 이들이 줄 서 있다. 굳이 자기 돈 쓰지 않아도 직책을 매개로 떳떳하게 인사를 받거나 할 수 있다.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강원도 원주 별장 성접대 의혹사건’에서 보듯, 고위공직자를 포함한 이들은 성접대도 큰 범주의 접대 중 하나라고 가볍게 여기지 않았을까. 자신이 ‘잘났기에’ 성접대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종의 우월의식, 선민의식이다.
이들에게 술집 접대부나 계약직 직원(인턴) 같은 약자(弱者)는 도덕, 비도덕의 문제를 벗어난 ‘무도덕(non-moral)’의 대상일지 모른다. 이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무도덕의 대상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에게 있어 성추행은 ‘대한민국의 입’(청와대 대변인)과 일개 인턴직원 사이에 일어난 ‘무도덕적 행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란 점이다. 진실을 감추려고 논리적으로 모순된 거짓말을 하는 까닭도 무도덕의 대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성공한 중년의 무도덕 감각
이런 무도덕 감각은 외국의 정치가나 고위공직자에게서도 확인된다. 2년 전 사르코지 뒤를 이을 프랑스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스트로스 칸 전(前)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호텔 여직원 성추행 혐의로 정치적 생명을 잃었지만, 당시 그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었다.
지난 2006년 미국에서 아동 성희롱 근절을 부르짖었던 공화당 마크 폴리 하원의원은 의회의 고등학생 인턴들에게 성적인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들통 나 사임했다. 동성애자 반대 운동과 가족 지키기 운동을 펼치던 공화당 래리 크레이그 상원의원이 2007년 6월 남자 화장실에서 음란한 행위로 체포된 일이 있다. 한때 빌 클린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꾸짖기도 했던 그는 “다리를 벌렸을 뿐”이라고 변명했다.(《뉴스위크》인터넷판 2010년 5월 25일자 ‘권력과 위선’ 기사 참조)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박재홍 전 선임행정관이 쓴 《공직의 길-정상의 공직자로 안내하는 자기관리법》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수천 명의 공직후보자를 검증했다고 한다.
<… 회식자리에서 여직원 옆에 앉지 않는 것도 성희롱 논란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회식장소에서 발생한 사소한 일이 외부에 부풀려져 알려지는 일도 많이 있다. 가볍게 포옹만 했는데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난리더라’는 식이다. 술자리에서 성희롱은 고위공직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156~157쪽)
박재홍씨는 “술자리에서는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녀유별이 최고다. 술에는 장사가 없고 이성을 잃게 한다”며 “회식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길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충고했다.
단골술집은 소문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박씨는 “국회 인사청문회나 인사검증을 하는 과정에 술집 여주인이나 종업원과 관련된 부도덕한 내용의 제보나 소문들이 많이 들어온다. 그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다. 물론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 무혐의 처리가 많지만 고위공직자가 되고 싶으면 가능한 한 단골술집을 만들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고 했다.
기자와 만난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고위공직자는 모름지기 ‘발가벗겨 무대 위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특히 공직자는 단골집이 없어야 한다. 단골집이 있을 때 뒤탈이 난다. 약속장소를 고를 때도 상대방이 정하도록 하는 것이 구설을 줄이는 길”이라고 했다.
남들이 하면 안 되지만 나는 된다?
2010년 5월 미국의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지에 네덜란드 틸버그대(Tilburg Univ)·노스웨스턴대 켈로그(Kellogg) 경영대학원 연구진이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피험자 집단에게 총리와 일반 하위직 공무원의 역할을 각각 준 뒤 ‘권력을 가졌거나 반대로 권력이 없다’고 느끼도록 유도했다.
연구진은 피험자들에게 ‘약속에 늦었다면 과속을 해도 되는지’, ‘여가 시간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세금 신고를 안 해도 되는지’, ‘도난 자전거를 습득한 사람은 이를 경찰에 신고를 않고 가져도 되는지’ 등의 윤리적 문제를 질문하고 답을 유도했다.
그 결과, 과속이나 세금 회피, 도난 자전거 미신고 등에서 가장 위선된 사고방식을 보인 사람은 ‘총리 역할’을 맡은 피험자들이었다. 이들은 놀랍게도 ‘자신이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남들은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의 비양심적 행동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틸버그대·노스웨스턴대 연구진은 ‘권력의 어떤 속성이 이런 위선적 사고방식을 조장하며, 권력자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행동을 남들이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4가지 원인을 추론했다.
①권력자는 다른 사람의 행동방식에 보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②권력자는 같은 규정을 자신에게는 그리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③권력은 특권의식을 수반한다.
④권력을 쥐었다고 느끼게 되면 주변의 질책을 덜 두려워하게 된다.
이 연구결과를 보도한 《뉴스위크》의 새론 베글리(Sharon Begley) 기자는 “사람들은 남들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자신이 했을 때 그 핑계를 대려고 논리적 이성을 사용한다”며 “도덕적 판단과 달리 위선은 감정보다 고차원적인 인지작용의 결과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위선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위선을 합리적인 결정인 양 사고를 왜곡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은 고위공직자의 왜곡된 성윤리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권력자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탈선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지닌 권력이 위선적 행동을 조장하고, 위선적 사고가 이를 합리화시킨다. “남들은 하면 안 되지만, 나는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재 공무원은 연 1회, 1시간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아야 한다. 시간상 대면교육보다 사이버교육 등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작년 말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법률’의 개정으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교육은 모든 공공기관의 의무가 됐다. 문제는 일반공무원이 아닌 고위공직자와 ‘육모방망이’를 든 권력기관의 공직자들이다. 이들의 위선과 왜곡된 조직윤리가 형식적 예방교육으로 사라질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