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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료

"손가락 절단" 태평양서 32# 누르자 부산의 의사 "식염수에 냉장 보관" (중앙일보 2013.04.27 04:35)

"손가락 절단" 태평양서 32# 누르자 부산의 의사 "식염수에 냉장 보관"

부산소방본부 '바다 위의 119' 상황실
외항선·원양어선 대부분 의사 없어
32# 위성전화 → KT 지구국 → 당직의사
전 세계 바다 위 응급환자 긴급 구조

 

부산소방본부가 운영하는 '바다 위의 119'는 전 세계 바다를 항해하는 한국 국적 선박 4000여 척의 응급환자들을 원격으로 치료하고 처방을 내린다. 사진은 부산소방본부 항만소방서 소방정이 출동해 선박의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사진 부산소방본부]

우리나라에서 외국 항구를 오가는 외항선과 원양어선은 모두 3904척. 우리나라 수출입 화물의 98.2%를 선박이 맡고, 우리 국민들의 먹거리인 생선을 잡는다. 이 가운데 특수선박 몇 척을 제외하고는 의사가 승선한 배는 없다. 이 배들이 화물을 싣고 오대양 바다 위를 항해하는 동안 선원들이 아프거나 다치면 어떻게 할까. 이때 모든 외항선에서 거는 전화번호가 있다. 위성전화 '32#'번이다. 이 위성전화를 걸면 해사위성과 KT 금산지구국을 통해 부산소방본부 당직의사와 연결된다.

 당직의사는 먼 바다 위 배에 있는 응급환자의 상태를 위성전화와 메일로 받아본 뒤 환자를 원격으로 치료하고 처방을 내린다. 부산소방본부가 운영하는 '바다 위의 119'다. 전국 18개 시·도 소방본부 가운데 유일하다.

 우리나라 119는 못하는 일이 없다. 벌집 떼는 일은 이미 일반화됐고, 하수구에 빠진 어르신들의 틀니까지 찾아준다. 고양이를 구조하다가 소방관이 순직할 정도다. 주로 국내 육지에서만 이뤄져온 한국 119구조대의 활동이 이제는 전 세계 바다로 뻗어나가고 있다. 세계 5위의 항구인 부산항을 관할하는 부산소방본부가 운영하는 바다 위의 119 현장으로 들어가본다.

응급처치 받고 항구로 돌아와 수술

 

'바다 위의 119'의 김승수 의료실장이 먼 바다를 항해 중인 한국 선박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응급환자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지난 2월 7일 오후 8시 태평양을 항해 중인 철광석 운반선 ○○호. 선원 구모(61)씨의 오른쪽 아랫배에 심한 통증이 왔다. 이 배의 의료관리자 김모(45) 3등 항해사가 위성전화 '32#'번을 누르니 부산소방본부 종합상황실의 119 해상구급상황실 당직의사가 받았다. 당직의사는 환자의 아랫배를 눌러보도록 지시했다. 통증 상태를 전해 들은 당직의사는 한국으로 귀항한 뒤 수술을 받아도 되겠다고 판단했고, 이 환자는 지난달 22일 경남 하동항에 하선해 수술을 받고 지금은 완쾌됐다. 선박회사 측은 선원이 항해 도중 항구에 내려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지난해 7월 21일 오전 7시. 아프리카 서쪽 끝 대서양 공해상을 항해 중이던 ○○호. 갑판에서 일하던 선원 김모(45)씨가 철판에 오른쪽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동료 선원들은 과산화수소수로 절단 부위를 소독한 뒤 지혈제를 뿌렸다. 잘린 손가락은 비닐봉투에 담아 얼음 속에 보관했다. 선박 측은 부산소방본부 종합상황실 119 해상구급상황실로 메일을 보내 이 같은 상황을 전하면서 응급처치 방법을 물었다.

 당직의사는 피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지혈제 사용을 중단하고 생리식염수와 얼음을 1대1 비율로 섞은 곳에 잘린 손가락을 냉장 보관할 것을 당부했다. 이어 항생제 아목시실린을 하루 세 번 복용할 것을 당부했다. 김씨는 이튿날 응급헬기를 이용해 라스팔마스항에 도착해 접합수술을 받은 뒤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부산시 연제구 고분로 부산소방본부 종합상황실 내 119 해상구급상황실. 당직근무 중인 김승수(32·마취통증 전문의) 의료실장 앞에 놓인 위성전화 '32#'번이 수시로 울려댄다. 전 세계 바다를 항해 중인 우리나라 선박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며 걸려오는 전화였다. 김 실장은 환자 상태를 물은 뒤 심한 외상이나 피부병 환자는 디지털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배에 비치해둔 구급약품 리스트도 요구했다. 상태가 위중한 환자는 4시간마다 측정한 환자 체온과 맥박수 등도 요청했다. 이어 모든 자료와 전화 내용을 종합해 처방을 내렸다.

 김 실장은 "전화나 메일로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엔 어려움이 많지만 병원을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항해 중인 선박에는 이 방법밖에 없다"며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치해 가능하면 빨리 병원 치료를 받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뒤에 앉은 소방관들은 응급선원 환자들의 상태를 메일로 받고 있었다. 주로 크게 다친 외상환자들과 열대지방을 항해하다 피부병에 걸린 환자들이 연락을 취해 왔다.

 상처 부위를 찍어 메일로 보내온 사진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지난해 9월 17일 오전 10시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호에서 기관 정지로 발전기 폭발이 일어나 기관장 박모(48)씨가 얼굴과 목에 화상을 입었다. 사진으로 1~2도 화상임을 확인한 당직의사는 3시간 동안 섭씨 4도의 물로 상처 부위를 적신 뒤 화상연고를 바르도록 지시했다. 또한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깨끗한 식염수로 하루 한 번씩 세척하게 했다. 이 같은 응급처치 덕분에 박씨는 상태가 호전돼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화상 정도를 파악할 수 있어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과환자는 주로 위성전화로 상담을 한다. 궁금한 환자 상태에 대해 당직의사가 바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9월 21일 오전 9시 태평양을 항해 중이던 ○○호에서 성모(47)씨가 구토와 헛구역질을 잇따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당직의사는 혈압과 맥박·체온을 정기적으로 체크하면서 정맥주사로 포도당 수액을 공급하고 구토 억제제를 투여할 것을 지시했다. 성씨는 이 정도의 처치만 받고도 상태가 호전돼 병원 치료 없이 귀가할 수 있었다.

당직의사와 통화만으로도 안정 찾아

 

부산시소방본부 헬기가 환자 수송 모의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중앙포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의료의 사각지대다. 요즘 외항선 한 척에 근무하는 선원은 선박 종류에 따라 10~30명. 항해사와 기관사는 배의 운항을 맡고, 일반 선원들은 선박을 정비하거나 잡다한 일을 한다. 이렇게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날씨가 나쁘거나 입항 준비를 할 때는 더욱 위험하다.

 배에는 주로 3등 항해사가 의료관리사 자격을 갖고 있다. 선박 의료관리사는 항해 중 선원의 건강관리와 보건지도, 선내 위생 등을 책임진다. 원양구역을 항해하는 5000t 이상의 배에는 의무적으로 승선해야 한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은 상처를 꿰매거나 링거 주사를 놓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전문적인 치료는 불가능하다.

 부산소방본부는 외항선 내 응급환자 처리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지난해 6월 보건복지부 응급의료전화 1339를 통합해 119 해상구급상황실을 설치했다. 관련 기관과 협의해 위성전화요금도 1분당 3300원에서 540원으로 낮춰 선박회사의 부담을 줄였다. 마음 놓고 오랫동안 위성전화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점식(49) 119 해상구급상황실 팀장은 "세계 5위의 항구인 부산항을 관할하는 부산소방본부가 선박 내 응급환자 처치에 대한 민원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바다 위의 119를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당직의사가 24시간 근무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간에는 공중보건의가 근무한다. 야간에는 동아대병원과 협약을 맺어 당직의사를 지원받고 있다. 간호사와 응급구조사도 근무한다. 부산소방본부는 앞으로 예산을 확보해 전속 의사도 배치할 계획이다.

 바다 위의 119는 인기다. 본격적으로 운영에 나선 지난해 6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신고건수는 334건으로 환자는 209명이었다. 환자 1명당 1.5건의 상담이 이뤄진 셈이다. 위성전화를 걸어온 위치는 태평양 27건, 인도양 14건, 대서양 4건 등으로 전 세계 바다가 대상이었다. 선원들의 국적은 한국과 인도네시아·필리핀·미얀마 등의 순서였다. 전체 209명 가운데 내과가 50명(23.9%)으로 가장 많았고 정형외과 39명(18.7%), 피부과 21명(10%) 순이었다.

 선박회사들도 바다 위의 119를 반기고 있다. 자주 이용하는 선박회사인 KCLSN의 진내은(30) 대리는 "망망대해를 항해 중인 배에서 생긴 응급환자들은 부산소방본부 당직의사와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정을 찾는다"며 "배가 항구에 들어갈 때까지 당직의사로부터 적절한 원격치료를 받으면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환자가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바다 위의 119를 이용한 선원 209명 가운데 3명은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상태가 악화된 경우도 1명 있었다. 전직 항해사 김성진(56)씨는 "옛날에는 배 안에 의학대백과사전과 가정 상비약을 갖다 놓고 선원들이 나름대로 처방을 내리고 대충 치료를 했다"며 "먼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서 전화로 의료진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