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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명월(萬川明月) (조선일보 2009.02.13)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조선시대 임금은 자기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군왕의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정조는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했다. '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한 것이다. 정조는 군왕인 자기 자신을 밝은 달로 생각하였음이 드러난다.

명월(明月)은 군왕의 상징이었다. '만천명월'과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달의 빛이 일천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달은 부처를 상징하기도 하고, 임금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은 하나이지만 만천(萬川)과 천강(千江)에 두루 비친다. 달은 밤에 보면 물에 비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해보다 달을 주목하였다. 태양은 달보다 훨씬 밝지만 대낮에 뜨기 때문에 물에 비치지는 않는다. 태양과 달은 이 점에서 그 특징이 다르다. 아무리 강물과 냇물이 많더라도 보름달이 뜨면 그 그림자는 그 강물과 냇물 모두에 각각 비친다.


달이 지닌 이 동시성의 특성이 고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먼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사상이다. 화엄(華嚴) 사상의 핵심이 이것이다. 하나는 곧 여럿일 수 있고, 여럿은 곧 하나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와 여럿이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주장이다. 일(一)과 다(多)가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이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달과 천만강천(千萬江川)의 관계만큼 좋은 비유는 없다.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일즉다 다즉일'의 사상은 고대의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뒷받침하는 원리적 근거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군왕과 백성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즉일(多卽一)'에 있다. 만천과 천강에 비치는 달도 그 근원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다. 이 달은 결국 임금인 것이다. 임금이 먼저 있어야만 일천 강에 달도 뜰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늘의 달은 본체(本體)이고, 강물에 비친 달은 현상(現象)인 것이다. 정조가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규정한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