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종이학 접던 '어른 아이', 다른 생명 살리고 떠나
입력 : 2010.01.13 14:28 / 수정 : 2010.01.13 15:26
- ▲ 최근 엄동근씨가 찍은 증명사진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더니… 우리 동근이 보고 싶어서 어떡하죠…”
12일 오후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주택. 주부 제선자(51)씨는 아들 엄동근(31)씨가 남긴 종이학들을 매만지며 울먹였다. 아들의 유일한 친구였던 강아지가 쉰 목소리의 제씨 말을 이해한다는 듯 다리에 발을 비벼댔다. “동근이를 못 보니까 얘(강아지)가 자꾸 사람을 찾아요.”
엄동근씨는 지난 9일 호흡곤란에 따른 뇌손상으로 뇌사판정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연골무형성증’으로 성장이 멈춰, 서른살이 넘도록 ‘아이 같은’ 모습으로 남은 동근씨였다.
뇌사 판정 후, 어머니 제씨는 동근씨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 그 덕분에 9일 오후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등에서 환자 3명이 새 생명을 얻었다. 동근씨의 관 속에는 그가 아끼던 종이학이 함께 들어갔다. 동근씨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장기의 빈 자리를 종이학들이 살포시 덮어줬다.
“동근이 관에 넣어주고 남은거에요. 동근이는 ‘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15년이나 집에서 이것만 접었어요. 하나만 없어져도 귀신 같이 알고 성을 냈죠. 아마 1만 마리 넘게 쌓였을 거예요.”
- ▲ 엄동근씨가 평소 소원을 빌면서 접었던 종이학
동근씨는 지난 1979년 전북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부터 자꾸 눕기만 하더니 3살부터 손가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연골무형성증’이라는 어렵고 막막한 진단서를 내줬다. “스무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했다.
유치원 시절 이후에는 성장이 아예 멈춰버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받아주는 일반 중학교가 없었다.
“공부를 잘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우등상도 받아왔는데… 서울에 오니까 자꾸 주변 애들이 놀리고 때려서,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어머니 제씨는 장애학교에 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직접 아이를 가르치기로 했다. 제씨가 가르칠 자신이 없는 과목은 주변 사람에게 부탁했다. 동근씨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 최동규(58)씨는 “동근 어머니가 ‘아들 영어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해서 매주 집에 찾아갔다”며 “몸이 불편해서인지, 수학이나 영어 같이 복잡한 공부를 힘겨워했다”고 했다.
최씨는 동근씨의 어머니와 상의 끝에, “크게 어렵지 않고, 재미도 있는 종이접기부터 하자”고 결정했다. 접기 쉬운 딱지부터 시작했다. 점점 종이학으로 난이도를 높였다. 그는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다.동근씨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3년 전부터 동근씨는 건강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날이 갈수록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혈뇨가 나오더니, 숨이 갑자기 탁탁 막힐 때가 잦아졌다. 어머니 제씨는 그런 동근씨를 데리고 매일같이 병원에 다녔다.
동근씨는 지난 6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서울이 폭설에 뒤덮힌 날이었다. 45분간 심폐소생술 끝에 맥박은 돌아왔지만, 결국 9일 뇌사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 제씨는 “평소 TV에서 장기 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안타까웠다”며 “바깥세상의 빛과 떨어져 살아온 우리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세상에 빛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도 동근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장지를 지키던 이웃 손인숙(53)씨는 “31살짜리 남자의 관인데 저렇게 너무 작은 것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며 울먹였다. 교회 장로 최동규씨는 “참 의젓하고 밝은 아이였다”며 “평생 살면서 동근이처럼 큰 기쁨을 주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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