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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정이 있는 삶 안타까운 이야기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연합뉴스 2010/03/11 17:09)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종합)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1954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선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 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한 법정스님은 1975년 8명이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법정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는 맘으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무소유' 법정스님 입적(종합)

법정스님 입적--설법하는 법정스님
(서울=연합뉴스) 불교계의 원로 법정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2009년 4월 19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열린 봄철 정기 대중법회에서 설법하는 모습. 2010.3.11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스님이 11일 오후 1시51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법정스님은 2007년부터 폐암으로 투병, 지난해 4월19일 길상사에서 열린 봄 정기법회 법문을 끝으로 지난해 6월7일 하안거 결제 법회, 12월13일 길상사 창건 기념법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에는 제주도에서 요양했으나 올 들어 병세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왔고, 입적 직전인 11일 낮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로 옮겼다.

법정스님은 입적 전날 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조계종과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법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등은 장례절차를 논의한 결과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말라"는 법정스님의 평소의 말에 따라 별다른 장례행사는 치르지 않고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받지 않기로 했다.

별도의 장례위원회는 구성하지 않았으나 법정스님 입적 전에 장례절차를 논의하던 송광사 문중의 다비준비위원회(위원장 진화 스님)가 다비식을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성북동 길상사, 순천 송광사,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가 마련될 예정이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스님(속명 박재철)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대 3학년 때인 1954년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선학원에서 당대 선승인 효봉 스님(1888-1966)을 만나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튿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 통도사를 거쳐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17년간은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으며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1992년부터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잘 하지 않았지만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12월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파타', 因緣이야기', '신역 화엄경',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승을 찾아서' 등이 있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의식한 듯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에 실었던 수필들을 모아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출간했고, 지난해 6월과 11월에는 2003년부터 했던 법문을 묶은 첫 법문집 '일기일회'와 두 번째 법문집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냈다.

이달 들어서는 평소 법회 등에서 언급한 책 중 50권을 골라 소개한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이상 문학의숲 펴냄)을 냈다.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법문하는 법정스님
법정 스님이 19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열린 봄철 정기 대중법회에서 법문을 하고 있다. 2009.4.19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법정스님이 남긴 주요 어록>

법정스님 입적--하안거 해제법회
(서울=연합뉴스) 불교계 원로 법정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2007년 8월 27일 길상사에서 열린 하안거 해제법회에서 법정스님이 법문을 설파하는 모습. 2010.3.11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은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법문을 통해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은 스님이 설파하던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이러한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그런가 하면 말년인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법정스님의 주요 어록.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산방한담'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버리고 떠나기' 중)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홀로 사는 즐거움' 중)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있으면 합니다.(1997년12월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아름다운 마무리' 중)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출간

(2010.03.10)

와병 중인 법정 스님(78)이 평소 법회 등에서 언급한 책 중 50권을 골라 소개한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이 출간됐다.

법정 스님의 책을 많이 출간한 출판사 문학의숲 편집부는 "법정스님이 평소 법회나 잡지 기고문에서 언급한 책 가운데 300여 권을 고르고 이 가운데 50권을 다시 추려내기 위해 2년여에 걸쳐 스님과 대화했다"며 "스님은 지난겨울 병중인데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문장을 바로 잡아주셨다"고 설명했다.

50권 중에는 다양한 종교관련 책, 고전이 된 동서고금의 문학작품, 파괴와 착취를 향해 질주해가는 이 시대의 종말을 경고하는 환경서적, 이미 절판된 책 등이 포함됐다.

외국책으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제러미 리프킨의 '음식의 종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 환경, 명상, 문학, 인권 관련 작품이 다양하게 포함됐다.

한국책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김태정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백가지', '허균의 숨어사는 즐거움' 등 옛날 책과 요즘 책, 창간호부터 줄곧 구독했다는 잡지 '녹색평론' 등이 포함됐다.

출판사측은 법정 스님의 책사랑은 출가 이전부터 남달랐다고 전했다.

법정 스님은 출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단박에 삭발을 결정하고 얻어 입은 승복까지도 그리 편할 수가 없었건만, 집을 떠나오기 전 나를 붙잡은 것이 책이었다. 그것들을 차마 다 버릴 수가 없어서 서너권만 챙겨가리라 마음먹고 이 책 저 책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놓기를 꼬박 사흘밤. 책은 내게 끊기 힘든 인연이었다"고 했다고 출판사는 소개했다.

또 책에 대해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한다, 베스트셀러에 속아서는 안 된다",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으라", "좋은 책을 읽으면 그 좋은 책의 내용이 나 자신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출판사측은 책 마지막에는 스님이 법회와 잡지 등에서 언급한 책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엮었다.

아울러 스님이 늘 곁에 두고 스승으로 삼는 경전으로 '초발심자경문', '선가귀감', '숫타니파타', '장로게', '정법안장' 등이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스님의 서가에는 경전이나 주석서 못지않게 자주 펼쳐보았다는 '어린왕자'를 비롯해 '꽃씨와 태양', '구멍가겟집 세 남매' 등의 동화가 꽂혀있고, 스님은 성경 가운데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고 소개했다.

488쪽. 1만8천500원.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 '일기일회'>

법정(法頂ㆍ77) 스님의 법문을 모은 첫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가 나왔다.

법정스님이 2003년 5월부터 2009년 4월19일까지 성북동 길상사에서 했던 정기법회 법문, 여름안거와 겨울안거의 결제 및 해제 법문, 부처님오신날 법문 등 43편이 첫 권에 실렸다.

법문집의 제목 '일기일회'는 다도(茶道)에서 기원한 말이다. 주인과 손님의 만남은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므로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정성을 다해 그 자리에 임해야 한다는 뜻. 또 우려낸 차의 맛은 오직 그때 그 자리에서 단 한 번의 고유한 향과 빛깔을 지닌다는 의미도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매 순간 마음을 맑게 하는 일로 이어져야합니다. 그 한순간이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2003년 10월19일 가을 정기법회)
법정 스님의 법문은 동시대인을 향해 쉽고 진솔한 말로 질문과 답을 내놓아 종교를 초월해 사랑받아왔다. 이는 "우리 마음 그대로가 법문"이라며 형식과 절차보다는 본연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해온 스님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스님은 큰 병을 앓은 후인 지난해 4월20일 봄 정기법회에서는 "생명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며 "많은 생명체를 위협하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중단해야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투병 기간 50일 넘도록 거의 단식상태여서 체중이 45㎏까지 줄었다는 스님은 "앓으면서 '그날그날을 즐겁게 살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일 이 세상을 하직할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이때, 내가 나를 비워야한다. 타인과의 매듭을 풀어야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이 늘 강조해온 무소유의 마음을 담은 지난해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 법문 내용도 실렸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법정 스님의 제자인 덕인, 덕현, 덕진 스님과 류시화 시인이 스님의 법문을 녹음한 각종 자료를 글로 옮겨적었고, 법정스님이 아직 병중인데도 직접 문장을 다듬고 보완했다. 문학의숲. 390쪽.1만5천원.






법정스님 두번째 법문집 '한사람은 모두를…"

법정(法頂ㆍ77)스님의 두 번째 법문집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문학의숲 펴냄)이 출간됐다.

이번 법문집은 지난 5월말 나와 이달 10일까지 13만부가 팔린 첫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 이은 법정스님의 두번째 법문집이자 완결편이라고 출판사 측은 설명하고 있다.

법문집 제목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은 화엄경에 나오는 법성게인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즉,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법정스님은 이 말에 대해 2002년 12월 법문에서 "나 자신을 위해 수행한다면 그것은 반쪽인 수행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 동시에 따라야 한다"며 "깨달았다고 해서 혼자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가야한다"(본문 89쪽)고 말했다.

이번 법문집에는 스님이 올해 5월 2일 성북동 길상사에서 부처님오신날에 행한 법문을 비롯해 2000년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1998년 원불교 서울 청운회 초청강연, 1992년 약수암 초청법회까지 17년간 했던 법문 35편이 실렸다.

특히 법정스님이 했던 많은 법문 가운데 공동체를 향해 더불어 사는 삶의 미덕을 권유한 법문을 집중적으로 실었다.

"남이란 누구인가? 타인이 아니다. 크게 보면 또 다른 나이다. 여기 이렇게 와 있지만 우리가 금생에만 지금처럼 모인 것이 아니다. 무수한 전생부터 이렇게 모였을 것이고, 어떤 계기로 인해 또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107-108쪽),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한다. 왜냐하면 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과 관계된 존재이다"(240쪽)
법정스님은 올해 부처님오신날 법문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대중법문을 하지 않고 있다.

책을 엮은 덕인, 덕현, 덕진 등 상좌스님들과 시인 류시화씨는 이번 법문집의 머리말에서 "법문은 2009년 부처님 오신날 법문을 끝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한동안 세상에 내려오지 않고 강원도 오두막에서 침묵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면 그 사자후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귀 기울여 들으면 우주 만물 중에 법문을 설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썼다.

이 말 역시 법정스님이 즐겨해온 말로 스님은 가끔 법문의 끝을 "나머지 이야기는 피어나는 저 나무와 꽃들에게서 들으라"고 마무리하곤 했다. 372쪽. 1만5천원.


<산문집으로 되새기는 법정의 '무소유'>

합장하는 법정스님
법정 스님이 19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열린 봄철 정기 대중법회에서 법문을 하기 앞서 합장하고 있다. 2009.4.19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소유'.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법정스님의 여러 산문집은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있는 필치로 고된 일상에 지친 일반인을 위로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이런 청백가풍(淸白家風)의 무소유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산문집 '무소유'에 수록된 1971년의 글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평생 수십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썼다.

또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스님은 강원도 산골 생활 17년째가 되던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스님은 2007년 한차례 병으로 입원하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리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스님은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은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인 '일기일회(一期一會, 2009년 6월 출간)'에도 무소유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스님은 2008년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를 맞아 했던 법문에서도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무소유'가 맺어준 법정스님과 길상사>

법정스님 입적--극락전 향하는 법정스님
불교계의 원로 법정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2007 8월 열린 하안거 해제법회를 위해 법정스님이 극락전으로 향하는 모습. 2010.3.11

한때 밀실 정치의 현장이었던 요정 대원각이 법정스님에 의해 길상사로 변신하게 된 데는 법정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가 다리 역할을 했다.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으나, 2003년 12월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그후에도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고, 이번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종교간 담장 허물었던 법정스님>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은 불교계에서도 어른 스님이었지만 천주교나 개신교, 원불교 등 이웃 종교에 대해 담을 쌓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법정스님은 특히 지난해 2월 선종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아름다운 종교 화합의 모습을 보여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법정스님은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를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했다.

스님은 기고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라며 "우리가 당면한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움터야 한다"고 설파했고 메시지 중간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끝에 '아멘'이라고 적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또 이듬해 2월24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신자 1천800여명 앞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종교인의 자세'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열어 '무소유'의 정신으로 당시의 IMF 경제난국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1997년12월14일 길상사창건법회에서 축사하는 김수환추기경


법정스님은 2000년 4월28일 봉헌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덕분에 지금도 길상사 마당에 선 관음보살상은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

이와 함께 법정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그의 산문집과 경전번역서들은 수녀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초기불교 연구로 유명한 일아 스님 등 일부 수녀 출신 비구니 스님들은 법정스님의 저술에 감명을 받거나 법정스님과 만난 후 비구니가 됐다는 출가이력을 소개한 바 있다.

1998년2월24일 명동성당서 강연한 법정스님


류시화 "법정스님, 눈쌓인 산 보고싶어해"

"오늘 법정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서귀포를 떠나기 전 죽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마 육신을 벗고 맨 먼저 강원도 눈 쌓인 산을 보러 가셨겠지요."


11일 입적한 법정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으며 '산에는 꽃이 피네' 등의 책을 함께 내기도 한 류시화 시인은 이날 스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후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http://www.shivaryu.co.kr/)를 통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시인은 스님이 제주도에서 겨울을 나다 병세가 악화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 "강원도 눈 쌓인 산이 보고 싶다"고 했던 말을 전하며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줄곧 병원에 갇혀 계시다가 오늘 오전 의식을 잃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스님의 폐암이 재발한 이후부터 "이 육체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새장에 갇힌 새를 보는 것 같아 뒤에서 눈물을 쏟은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제 그 새가 날아갔습니다"라고 애통함을 전했다.

시인은 스님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의식을 잃고 입적한 것에 대해 "이런 사실을 두고 법정스님과 어울리지 않는 마무리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모습이고 종착점입니다. 어디에서 여행을 마치는가보다 그가 어떤 생의 여정을 거쳐왔는가가 더 중요함을 우리가 알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인은 또 지난해 6월 법정스님이 시인과 제자 등 가까운 사람 서넛을 부른 자리에서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결국 주위의 설득에 따라 송광사에서 다비식이 진행되기로 했다고 전했다.

시인은 스님이 입적 며칠 전에 한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라는 말을 그대로 스님에게 돌려주며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덜 슬프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중생을 만나 끝까지 반말 한 번 안 하시고 언제나 그 소나무 같고 산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주셔서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이 삶이 고통이고 끝없는 질곡이라 해도 또다시 만나고 싶다고. 해마다 봄이면 '꽃보러 갈까? 차잎 올라오는 것 보러 갈까? 바다에 봄 오는 것 보러 갈까?' 하고 연락하시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신 큰 스승"

법정(法頂) 스님이 11일 오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누리꾼은 관련 기사의 댓글을 달며 추모했다.

대화명 '유명희'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정신이자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신 큰 스승인데 이렇게 빨리 가시다니 너무 슬프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아이디 '아름다운 날들'은 "맑은 법문과 가르침으로 중생에게 참회와 지혜를 줘서 감사하다"며 "어리석은 우리 모두에게 깨우침을 준 스님, 평생 잊지 못할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아이디 '나마스테'는 "스님의 맑고 청빈한 삶처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항상 바랐는데. 탁하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맑은 숨을 쉴 수 있었던 건 스님의 보석 같이 영롱한 글들 덕분이었는데 마음이 안타깝다"고 추모했다.

특히 댓글 중에는 법정 스님이 쓴 산문집 등을 생각하며 그가 평소에 강조한 '무소유'의 정신을 되새기려는 누리꾼이 많았다.

대화명 '달봉대사'는 "'무소유'와 '홀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그 책을 읽을 때가 생각난다"고, '공예가'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겠다. 버리고 또 버리기"라고 기억했다.

아이디 '무진본'은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앞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정신적 가치를 명확히 제시해준 분"이라고 말했다.

대화명 '닭아날아'는 "'무소유'와 '텅빈 충만', '서 있는 사람들' 등을 통해 스님이 준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황우삼'은 "'인생지사 공수래공수거'라는 진리를 중생들에게 알려줬던 큰 스님"이라고 적었다.

<정치권, 법정스님 "우리사회 등불" 애도>

법정스님 입적--길상사 나서는 모습

여야는 11일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이 입적하자 "무소유와 화합의 정신을 실천한 이 시대의 큰 어른이자 정신적 스승이 떠나셨다"며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한평생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은 우리 사회를 비추던 등불이자 정신적 스승이었고,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일깨우던 죽비소리였다"며 "부디 편안히 잠드시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조해진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대립과 갈등, 탐욕이 팽배한 세상에서 스님이 남긴 무소유와 화합의 정신은 맑은 정화수로 흐를 것"이라며 "큰 어르신을 보내드리는 마음 아쉽고 슬프지만 풍경소리 같은 맑은 여운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 화합, 공존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을 통해 "스님은 이 시대 참 현인이었고, 혹독한 독재의 시대에는 몸소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실천자였다"며 "이제 스님의 가르침을 더이상 직접 듣지 못함에 진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끼며 스님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이 시대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버팀목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에 이어 올해에는 법정스님까지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허망하기만 하다"며 "스님의 말씀에 따라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입적 법정스님 어린시절 기억하는 고향후배>

입적한 법정 스님 생가터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어린 시절 살았던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생가터. 초가집은 헐렸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어린 시절 한 가족처럼 지낸 법정(法頂)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과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임준문(74.사업)씨는 고향 선배이자, 이 시대의 큰 스님의 옛 시절을 회상했다.

임씨는 선박 대리점을 하는 법정 스님의 작은 아버지 밑에서 매표원을 하며 법정 스님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했던 법정 스님은 늘 궁핍했지만,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목포에 있는 상고로 진학한 법정은 휴일에 생활비를 타러 자주 오곤 했는데, 늘 손에는 책이 떠나지 않았다고 임씨는 회상했다.

임씨는 "법정 스님은 성격이 칼칼할 정도로 곧았으며, 자기 것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은 깨끗하고 모범적인 분이셨다"고 말했다.

이어 "명절 때 여객선 손님이 넘칠 때는 책을 놓고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다정다감했던 선배였다"면서 "송광사에 계실 때 친척 중 한 사람이 어렵게 면회를 했는데 '준문이 잘 있느냐'고 물어봤다"며 울먹였다.

김 종묘 사업을 하는 임씨는 "먹고 사는 일이 뭐 그리 바쁜지..", 오는 13일 송광사 다비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향 선두리 법정 스님의 생가는 이미 헐렸고, 다른 사람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사촌 동생이 기억하는 입적 법정스님>

법정스님 "항상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라"

"집안에서 저와 제일 많이 닮았다는 형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마음 한쪽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이 11일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님의 사촌동생인 박성국(55) 해양경찰청 운영지원과장은 스님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박 과장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삿갓을 쓰고 전남 해양의 고향집을 찾아온 법정 스님을 본 후 스님이 입적하기까지 단 3차례에 걸쳐 스님을 만났다고 회상했다.

해양경찰관이 된 지 3년째인 1982년 여수해경서에서 근무할 때 여수시내에서 '법정 스님 방문법회'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법회가 열린다는 대형 예식장을 대뜸 찾아갔다.

법회가 끝나고 '막내 사촌 동생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스님은 어느덧 훌쩍 커버린 박 과장의 손을 꼭 잡으며 "막내, 경찰관이 됐구나. 항상 베풀며 살고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줘라"고 당부했다.

이후 1985년 법정 스님 어머니의 49재를 맞아 서울 신림동의 친척집에 들른 스님은 가족.친지의 종교를 일일이 묻더니 서로 제각각인 것을 알고는 "절대 상대방의 종교를 비방하지 말고 존중해라"고 말했다.

박 과장은 "법정 스님과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아름다운 인연이 알려지며 종교 간의 담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스님은 이미 20년도 전부터 종교 간의 화합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박 과장과 그 가족들은 최근 법정 스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6일 스님이 입원한 강남 삼성의료원에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병실문을 연 채로 3~4m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지만 스님은 평소처럼 꼿꼿했다.

이미 병이 깊어 말을 못했던 스님은 귀엣말로 가족의 방문을 알리는 다른 스님에게 '우왕좌왕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라고 해라'고 적은 법문을 내렸다.

박 과장은 "본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주변이 어수선하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며 "나이 들고 병이 드니 출가 후 멀리 해온 가족들에게 미안해했다는 말씀을 다른 스님들로부터 전해듣고 마음이 짠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법정스님 입적에 연예계도 애도 물결>

11일 법정(法頂) 스님의 입적 소식에 연예계도 잇따라 추모 메시지를 전했다.

트위터의 유저 네임을 '금강경'으로 쓸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인 방송인 김제동은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합니다. 방안에 들어온 달빛도 손님인듯 하여 가만히 모셨다는 스님의 말씀이 아직 가슴에 뛰는데 조금 먼 곳에서 더 가까이 저희들과 함께 하시려나 봅니다. 또 한 분을 눈에서 보내드리고 가슴에 모셔야겠습니다. 가고 옴이 없는 곳에"라는 글을 남겼다.



또 MBC 김주하 앵커도 트위터에 "진심을 담은 탁월한 문장력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법정스님.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과 종교의 벽을 넘어 행동으로 보여주신 큰 용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편안히 내려 놓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라고 전했다.

탤런트 정보석 또한 트위터에 "제게 삶의 한 지침을 주신 분인데. 현세에 이루신 큰 업적을 공덕 삼아 왕생 극락하소서"라고 추모했다.

가수 신승훈은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내가 뭔가를 가지려고 욕심낼 때마다 '무소유'라는 책을 반복해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며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그분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가수 이승철도 전화 통화에서 "젊은 날 자기 성찰을 하는 데 법정 스님의 말씀들이 너무 많은 가르침을 줬다"며 "많은 사람에게 삶의 지침을 주신 훌륭한 분이 입적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까지 든다. 극락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법정스님 빈자리 책으로" 저서에도 관심>

탁월한 문장력과 무소유 철학, 소탈한 내용이 담긴 책들로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법정(法頂)스님이 11일 입적하면서 생전에 남긴 책들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교보문고는 이날 오후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광화문점 문학 섹션에 추모 코너를 마련해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법문집과 산문집을 모아놓았다.

또, 인터넷 교보문고는 메인 화면에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스님 입적, 무소유 정신에서 아름다운 마무리까지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라는 추모글을 올렸으며, 작가들을 소개하는 '인터넷 교보문고 문학관' 페이지에 '법정스님 문학관'을 열어 스님의 대표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반디앤루니스 종로점도 오후부터 '무소유',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오두막 편지', '인연 이야기' 등 스님의 대표 저서들을 모은 추모 코너를 마련해 독자들을 맞고 있으며 코엑스점은 12일 특별 코너를 열 예정이다.

책으로 안타까움을 달래려는 독자들의 문의가 이어지면서 출판사들에도 주문이 크게 늘었다.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등 법정스님의 최근작을 낸 출판사 문학의숲에는 법정스님의 병세가 깊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각각의 책에 대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준인 6천∼1만부의 주문이 몰려 법정스님이 역시 '스타 스님'이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문의도 많고 주문도 크게 늘었다"며 "법정스님의 책은 평소에도 인기가 많아 다량 찍었기 때문에 일단은 소화가 가능하지만, 부족해질 것 같아 추가 인쇄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李대통령 "법정스님 큰 교훈 남기셨다">

길상사 직접 조문..자승 조계종 총무원장과 환담


이명박 대통령은 12일 성북동 길상사 설법전(說法殿)에 마련된 법정(法頂) 스님 분향소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

이날 조문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호영 특임장관과 정정길 대통령실장,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 권재진 민정수석,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진동섭 교육과학문화수석, 이동관 홍보수석 등이 수행했다.

이 대통령은 분향소에서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등의 안내로 분향한 뒤 법정 스님의 영정을 향해 합장하고 머리 숙여 삼배했다.

분향을 마친 뒤 이 대통령은 "평소에 제가 존경하던 분이셨고, 그래서 저서도 많이 읽었는데 마음이 아프다"면서 "살아있는 많은 분들에게 큰 교훈을 남기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법정 스님의 대표작인 수필집 `무소유'를 염두에 둔 듯 "많이 가지신 분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기고 가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이에 길상사 주지인 덕현 스님은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길상사 내 길상헌으로 자리를 옮겨 자승 총무원장과 차를 마시며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난초 화분을 애지중지 키우던 법정 스님이 장마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갔다는 `무소유'의 내용을 언급하며 "나는 오래전부터 스님 책을 많이 읽었고 여행중에도 꼭 들고 다녔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스님이 쓰신 글이나 사상이 이번 기회에 많이 알려질 것"이라면서 "(법정 스님처럼) 그렇게까지 실천은 못해도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 측에 보낸 조전에서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오셨다"며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주셨다"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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