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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입적] 소리없는 기부 (조선닷컴 2010.03.13 05:09)

[법정스님 입적] 소리없는 기부

입력 : 2010.03.13 05:09

법정(法頂) 스님.

평생 책 인세로 받은 수십억원…
법정 스님, 형편 어려운 학생들에게 베풀어
관도 없이, 가사만 걸친 법정 스님… 가실때도 '無소유'

'무소유(無所有)'를 가르친 법정(法頂) 스님은 11일 입적(入寂)할 때까지 무소유를 몸소 실천했다. 스님이 평생 30여권의 책을 펴내 받은 인세(印稅) 수십억원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던 사실이 12일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1979년 어느 날 법정 스님은 자신의 수필집 '무소유' 출간을 기획했던 수필가 박연구(2003년 작고)씨에게 "내 책(무소유) 인세를 좀 주지"라고 말했다. 범우사는 1976년 문고본 '무소유' 출판을 계약하면서 법정 스님에게 원고료를 한꺼번에 지급했던 터라 인세를 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황하는 박씨에게 스님은 "내가 좋은 일 좀 해보려고 해"라고 말했다. 출판사는 책 판매액의 10%를 인세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출판사는 30여년간 문고본과 양장본을 합해 340만부 정도 팔린 '무소유'의 책 인세가 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범우사 윤형두(74) 회장은 "30여년 동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1970년대부터 법정 스님이 연재한 글을 묶어 출판한 '샘터'(대표 김성구)도 1년에 2000만~3000만원씩을 인세로 스님에게 지급했다. 매년 2월 말, 3월 초만 되면 스님은 인세 지급을 채근했다. 출판사측은 나중에야 스님이 매년 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인세 수입으로 대학생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준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출판사 문학의숲 고세규 대표도 "두달 전쯤 스님과 가깝게 지내는 문학인으로부터 '스님이 10여년 전에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는 한 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입던 옷 그대로 가사만 덮은채 관도 없이 대나무 평상 위에 놓여 마지막 길을 떠났다. 법정 스님의 법구가 12일 낮 서울 길상사에서 다비식이 열리는 순천 송광사로 향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1994년부터 봉사활동 시민모임인 '맑고 향기롭게'와 함께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들의 학비를 내주자'며 매년 수십명씩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는 의무교육대상이 된 중학생을 제외하고 고등학생만 지원했다. 스님과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매년 20~40명의 고교생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측은 "매년 4000만~5000만원 정도 되는 장학금의 상당 부분을 스님께서 내셨다"고 밝혔다.

'맑고 향기롭게'의 지광거사는 "스님은 얼굴 없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실천하신 분"이라고 했다. 무상보시는 자기가 남을 돕고도 그 사실도 잊어버리는 높은 경지의 기부를 뜻한다. 지광거사는 "스님께서는 통장에 일정 금액이 모이면 곧바로 기부하셔서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이가 없다"고 했다. 30여년 동안 수백명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지만, 스님은 장학금 봉투나 증서 어디에도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맑고 향기롭게'를 통한 장학금에도 스님은 '나 개인이 아니라 맑고 향기롭게 회원으로 기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광거사는 "스님은 마치 샘물이 차오를 때마다 퍼내듯 기부를 하셨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당장 돈이 없어서 길상사에서 빌린 뒤에 갚으실 정도였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삶은 1994년 한 강연에서 말한 대로였다. "선행이란 내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던 것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매년 2월 말이면 인세 독촉… 처음엔 법정스님을 오해했어요"

입력 : 2010.03.13 05:08

법정 스님이 1970년대부터 글을 연재한 샘터의 김성구 대표. 김 대표는“인세 수입을 어려운 학생 돕는 데 쓰고 정작 자신의 병원비가 없어 고생하신 스님이야말로‘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했다. /

샘터사 김성구 대표


"우리 형편 어려울때마다 인세 미뤄받거나 안받아"

"처음에는 법정 스님이 인세(印稅)를 달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1998년 2월 말 월간 교양지 '샘터' 김성구(50)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샘터는 1970년 창간한 뒤부터 30년 넘게 법정 스님의 글을 연재했고 그 글들을 묶어 단행본을 냈었다. 스님은 다짜고짜 "인세 안 주고 뭐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당시 샘터는 1년에 2000만~3000만원씩 2~3차례에 걸쳐 인세를 지급했는데 지급시기는 출판사 형편에 따라 달랐다.

12일
서울 대학로 샘터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그전에 스님은 샘터가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인세를 미뤄서 받거나 아예 안 받기도 했다"며 "그런 스님이 출판사 사정이 조금 나아진 뒤 인세를 재촉했으니 '뭐 이렇게 돈을 밝히는 스님이 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얼른 돈을 마련해 스님에게 보내드렸고, 얼마 뒤 스님을 모시는 보살에게 스님이 인세를 재촉했던 이유를 물었다. 머뭇거리던 보살은 "매년 초에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인세 수입으로 대학생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줬기 때문에 등록금 납부기한에 맞춰서 인세를 받아야 했다"고 대답했다. 김 대표는 "그때서야 법정 스님이 매년 2월 말~3월 초만 되면 인세 독촉전화를 걸어온 이유를 깨달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그 뒤로는 스님이 채근하기 전에 돈을 부쳤다고 했다.

법정 스님이 '샘터'의 인세로 장학금을 주는 일은 지금까지 적어도 12년 이상 계속돼왔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김 대표는 하지만 "법정 스님이 통장을 직접 관리해왔기 때문에 누구에게 얼마를 몇 년 동안 줬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라고 했다. 스님을 모시는 보살도 10여명에게 학비를 줬다는 것만 알 뿐 어떤 학생들에게 줬는지는 몰랐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김 대표는 주변 스님들로부터 "법정 스님은 한 번 베풀 때 1000만원, 2000만원씩 통 크게 베푸는 스타일"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남을 먼저 생각했던 법정 스님은 정작 본인 몫은 한 푼도 챙겨놓지 않아 자신이 아플 때는 병원비조차 대기 힘들었다. 김 대표는 "스님 인생은 당신이 쓰신 책 제목처럼 그야말로 '무소유'였다"고 했다.

홍라희씨, 법정 스님 병원비 6천여만원 '대납' (연합뉴스 2010.03.12)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씨가 11일 지병으로 입적한 법정스님의 밀린 병원비를 부담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12일 “홍 여사가 삼성서울병원에서 폐암 치료를 받아온 법정 스님의 병원비로 나온 6천200만 원가량을 대신 냈다”고 말했다.

이 금액은 법정 스님이 올 1월15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이후 발생한 수술 및 항암치료 비용 등이다.

홍 씨는 지난 9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중이던 법정 스님을 문병하러 갔다가 병원 측에 대납 의사를 전한 뒤 결제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홍 씨는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에 의해 지난 1월 ‘여성불자 108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등 불교계와도 인연을 맺었다.

[특별기고] 법정 스님을 추모하며

  • 박청수 원불교 원로교무

입력 : 2010.03.12 23:12

박청수 원불교 원로교무

마르지 않는산 밑의 우물 山中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달 건져가소서…
다실 벽에 걸려있는 글귀를 읽어보면서
스님의 다실에 고여 있는 한적함과 청정함은
스님의 내면적 투명함에 연유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법정 스님을 지금부터 꼭 19년 전에 처음 만났다. 나는 일행과 함께 불일암에 당도하였음을 어떻게 알릴까 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 손수 군불을 지피고 나서 부엌문을 열고 나오던 스님이 아래채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아!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반겨주셨다. 한 번도 뵌 일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분이 법정 스님임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불일암에 올 때는 미리 송광사에 전화연락을 하라"는 당부를 지켰기 때문에 아마 스님도 불일암 길손에 대한 전갈을 받으셨음에 틀림없었다. 우리가 묵을 처소인 아래채 쪽마루에 짐을 놓고 갖고 온 호접란을 들고 위채로 올라갔다. 스님은 꽃부터 반기셨다. "내가
LA 있을 때 많이 보던 꽃이구나. 멀리 오느라 애썼다" 하시며 꽃과 대화하는 사이 나는 매화나무 곁으로 갔다. 아래채에서 위채를 올려다보았을 때, 정적 속의 불일암 뜨락에 피어 있는 매화는 참으로 그윽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매화 가지에 꽃망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댓잎이 부서지는 봄햇살이 향기롭습니다. 꽃가지에 향기 번질 때쯤 다녀가십시오'라는 스님의 편지를 받고 나선 길이었다. 겉봉에 '순천 91. 3. 4.'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나는 시절을 딱 맞추어 온 것이다. 내 곁으로 다가온 스님은 "얘들이 겨울부터 꽃망울을 서서히 부풀리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피었어요. 그렇게 오래 망설였다 피니까 이렇게 향기도 좋은가 봅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만개(滿開)한 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은 이제 혼이 다 빠져나가 버렸어요" 하면서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깨끗한 얼굴의 삽이 서로 등을 맞대고 걸려 있었다. 호미와 괭이, 쇠스랑, 크고 작은 톱 등 스님의 살림살이에 소용되는 연장들이 아래채 곳간 안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불일암 사랑채 뒤뜰에는 작고 예쁜 항아리들이 나란히 묻혀 있었다. 저 독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살며시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빨간 글씨로 '열어보지 마시오'라고 쓰고 다시 그 아래에 검정 글씨로 '91년 여름에 먹을 짠무지'라고 쓰여 있었다. 불일암 나그네들의 버릇이 비슷하기에 스님이 이러한 조치를 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불일암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우거진 곳에 정결과 질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결과 질서가 스님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잠시 무서운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그 모두는 스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었다.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로 불리는 스님의 다실에서 그날밤 차를 마셨다. 스님은 전깃불을 끄고 운치 있는 촛대에 촛불을 켰다. 그러나 촛불의 불빛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다 "촛불도 시끄러워"라고 했다. 그러고는 말간 기름이 담긴 하얀 백자 등잔 위로 살짝 올라온 가느다란 까만 심지에 불을 댕기고 촛불을 켰다. 밝음의 강도가 한결 낮아진 방안은 그지없이 아늑해졌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스님은 이야기하는 동안 처음에는 차향(茶香)이 그윽한 녹차를, 두 번째는 구수한 우롱차를, 그리고 세 번째는 홍차를 내놓았다. 차의 종류에 따라 다기(茶器)도 바뀌었다. 여러 종류의 차를 음미하면서 마시니 차향과 차 맛이 더욱 향기로웠다.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山中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달 건져가소서.

다실 벽에 걸려 있는 글귀를 다시 읽어보면서 스님의 다실에 고여 있는 한적함과 청정함은 스님의 내면적 투명함에 연유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의 실천자'라고 일컫지만 나는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관리자라는 점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내가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방문했던 1991년은 히말라야 설산에 학교를 설립하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왠지 친근한 마음이 들어 얼마 뒤 설산학교 설립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편지로 "거들고 싶다"고 하시더니, 내가 있던 원불교 강남교당에 오셔서 100만원을 내놓으시며 "원고료요" 하셨다. 내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을 하고 힘이 남아 있으면 되느냐. 큰일을 했으면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위로해 주셨다.

1997년 길상사가 문을 열 때 스님은 봉축위원에 나를 넣으셨다. 그래서 개원식날 갔더니 스님 옆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내 자리가 있었다. 아마도 스님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추기경님을 초청하셨고, 남녀의 차별도 넘어선 분이라 나도 부르셨던 것 같다.

스님은 내 저서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박청수 교무님 하면 나는 문득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을 연상한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천수관음은 두 손과 두 눈으로는 모자라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지니고 한량없고 끝없는 구제를 펼친다. 종교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따뜻한 가슴과 자비의 실천에 있다."

스님의 귀한 격려 말씀을 세세생생 실행할 것을 명심하면서 스님의 참열반을 빈다.

[법정스님 입적] 과일 하나, 떡 한 조각 없는 빈소… 조사(弔辭)도 만장(輓章)도 없습니다

입력 : 2010.03.13 06:01 / 수정 : 2010.03.13 12:21

법정스님 송광사로 운구
"내가 어떻게 가는지 봐라" 가장 간소한 장례 부탁… 오늘 인근 야산서 다비식

단 하룻밤이었다.

11일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은 12일 오전 11시 25분쯤 전날 밤을 지낸 서울 성북동 길상사 행지실(行持室)을 나섰다. 13년 전인 1997년 말 김영한 보살로부터 대원각 요정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받아 사찰로 바꾼 그는 생전에 하루도 이곳에 머문 적이 없었다. 물론 본인을 위한 방도 없었다. "내 절이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치료 중이던 병원에서 입적 전날 제자들이 물었다. "스님, 절(길상사)로 가시겠습니까?" 법정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엄격하던 스님이 길상사에서 하룻밤 묵겠다고 허락한 것이다. 11일 낮 12시 30분쯤 길상사에 도착한 스님은 제자들이 "절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고, 오후 1시 51분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법정 스님의 법구(法軀)는 12일 낮 12시 길상사를 떠나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졌다. 운구는 간소했다. 스님의 평소 당부대로 입던 옷 그대로 염습한 상태로 관(棺)도 없이 평상 위에 가사를 덮은 채 극락전 앞으로 옮겨졌다. 평상은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쓰던 대나무 평상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절차는 간소했지만 길상사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경내에 가득한 가운데 법정 스님의 법구는 극락전 앞마당에 대기하던 영구차로 옮겨졌다. 법정 스님의 법구를 운구하던 8명의 스님들은 평상을 약간 내렸다 올리며 부처님께 마지막 3배(拜)를 올렸다. 지켜보던 추모객들은 눈물을 훔쳤고 일부 오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소유의 삶,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12일 낮 서울 길상사에서 순천 송광사로 떠나는 법정 스님 법구 행렬을 조문객들이 배웅하고 있다.
이날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추모객들로 가득했다. 밤새 이어지던 추모 물결은 이날 오전 10시를 넘으면서 일주문(一柱門) 밖 도로까지 이어졌다. 이웃 종교인들의 발길도 계속됐다. 수도복 차림의 프란치스코회 외국인 수사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프란치스코회와도 가깝다"고 말했다.

서울을 떠난 법정 스님의 법구는 5시간을 달려 오후 5시쯤 스님의 출가 본사(本寺)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 도착했다. 송광사 앞 공터에서 빈소가 마련된 문수전까지 300여m 길 양옆에는 3000여명의 불교신자들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스님을 맞이했다. 합장하던 신도들은 스님의 법구가 지나가자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홍원심(49·순천 조례동)씨는 "스님께서는 평소 직접 공양을 하시는 등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살았던 분이었다"며 "스님의 큰 뜻을 깊이 되새기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흐느낌과 뒤섞인 염불을 뒤로 한 채 법구는 스님 10명의 어깨에 걸쳐져 빈소까지 천천히 운구됐다. 문수전에선 스님 200여명이 법정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법정 스님의 빈소엔 그 흔한 과일도 떡도 없었다. 영정을 중심으로 국화 20송이와 향로, 촛대 2개, 병풍이 전부였다. 문수전에 안치된 법구는 13일 오전 11시 2㎞ 떨어진 인근 야산 다비장으로 옮겨진다. 다비준비위원회 진화 스님은 "다비식에서는 조사(弔辭)와 만장(輓章·망자를 애도해 지은 글을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이 일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비식 뒤에는 사리도 수습하지 않고, 탑도 세우지 않는다. 송광사 총무국장 진경 스님은 "'큰스님'의 다비식을 이렇게 간소하게 치르는 것은 처음"이라며 "스님은 생전에 '내가 어떻게 가는지 봐라'며 가장 간소한 장례를 부탁했다"고 말했다.

한편 법정 스님의 49재는 4월 28일 송광사에서 열릴 예정이며, 서울 길상사에서는 3월 21일 오전 10시 추모법회가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