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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시인` 장금 이야기 차기작으로 써보고 싶어` (조선닷컴 2010.05.29 23:21)

"'노숙 시인' 장금 이야기 차기작으로 써보고 싶어"

입력 : 2010.05.29 03:19 / 수정 : 2010.05.29 23:21

최인호씨 "시 읽고 감동 받아"

소설가 최인호(65·사진)는 1년 전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2008년부터 침샘암 투병을 시작한 그는 소수의 지인을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왔다. 그는 1975년부터 35년 6개월 동안 월간 샘터에 연재한 자전 소설 '가족' 종료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한마디 작가의 변도 남기지 않은 채 어디론가 잠적했다. 본지 1월 13일

최인호는 억울한 것 같았다. 지병이 악화돼 말을 전혀 못한다는 둥, 이미 신변정리에 들어갔다는 둥 세간의 입방아를 놓고 "남들이 자기 멋대로 나를 죽였다 살렸다 한다"고 했다. 최씨는 말을 못하기는커녕 여전히 달변이었다.

그는 지난 22일자 Why?에 보도된 노숙시인 장금을 차기작으로 써보고 싶다고 했다. "장금 시인의 시를 읽고 그게 너무 좋아서…. 요즘 투병 중이라 추적할만한 기운은 없지만 도와줄 수 없겠냐"며 본지에 연락해온 것이다.

최인호는 "매스컴과 접촉을 끊고 있었는데 '집시의 기도' 기사를 보고 연락을 하게 됐다"며 "2~3개월만 기다려주면 건강을 회복해서 장금 시인에 대한 소설을 드라이하게 써보고 싶다. 그때까지 취재노트를 간직해달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장씨 사망 직전까지 그를 지켜봤다는 의사도 22일 밤 연락을 해왔다. 그는 "장씨는 상태가 위중해 같은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던 환자였는데 부천대성병원으로 내쫓기다시피 옮겨졌다. 이 사실을 밝혀달라"고 했다.

노숙 시인의 죽음 이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의사에 따르면 "작년 5월 28일 장금을 포함한 30명 가까이 되는 행려병자가 보라매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고 했다.

서울시 지시로 보라매병원에 있던 홈리스 입원병동(전인간호병동)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신종플루 격리병동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 병원의 '신종플루 격리병동'은 대부분 하루 2~3명의 환자가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5월 말 장씨는 복막염·패혈증이 겹쳐 보라매병원 같은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대성병원' 같은 규모의 병원에 가면 안 될 사람이었다"며 "며칠 뒤 장씨가 있던 자리에 감기 증세를 보인 중학생 몇 명이 입원해 하루종일 미니 게임기를 두드렸다"고 했다.

이 병원의 '신종플루 격리병동'은 2월에 없어졌다. 홈리스 병동은 5월쯤 다시 문을 열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4일 확인한 결과 이 병동 주변 공간을 고치고 있어 의사들의 통로로 사용 중이었다.

보라매병원측은 "장씨의 상태는 당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환자의 사망은 병원을 옮긴 것과는 관련이 없다"며 "홈리스 병동은 5월 10일까지 통로로 사용했고 8월 초부터 개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봄 시단 적시는 크고 여린 두 목소리
  • 허만하 시인 ‘야생의 꽃’
    김사인 시인 ‘가만히 좋아하는’

  • 입력 : 2006.04.24 00:05 / 수정 : 2006.04.24 00:15

    • ‘김유허강(金柔許剛)’. 김 시인은 부드럽고, 허 시인은 강건했다. 관념으로 초월을 지향하는 허만하 시인의 서정시집 ‘야생의 꽃’이 최근 나왔고, 일상을 온기로 감싸는 김사인 시인의 서정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이 이번 주 나온다. 상반된 개성이 봄 시단에 불꽃을 만든다.

      자연 현상 꿰뚫는 시선… 거대한 초월 그려내

    • ‘의미에서 풀려난 소리는 비로소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허만하(74)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야생의 꽃’(솔출판사)을 냈다. 병리학 전공의 의사로서 부산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시인은 60대 후반부터 왕성하게 시를 발표해 이산문학상, 청마 문학상, 박용래 문학상 등을 휩쓸면서 뒤늦게 시단의 큰 산맥으로 우뚝 서있다.
    • “10년 전 강의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를 앓고 있지만, 오른손 하나로 자판을 두드려 시를 쓰고 있다”는 시인은 “그래도 여행을 다니면서 시상을 떠올린다”고 정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물에 비친 가지 끝의 미세한 떨림’,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품고 있는 꽃나무’ 등등의 자연 현상을 꿰뚫는 시선으로,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슬러, 존재의 시원이 담긴 풍경을 웅장한 존재론의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 하지만 시인과 자연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비극적 인식이 깔려있다. ‘소리없이 가라앉는 안개비에 젖는 가로등이 비추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자기의 외로움’이라고 시인은 노래했다.
    • 가로등과 어둠을 가르는 미세한 안개비처럼 ‘젖은 창문’을 통해서만 시인은 아슴푸레하게 뜨는 그의 이데아를 바라볼 뿐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 걸음 더 멀리 물러서는 거리./ 뒤를 돌아보면 떠나온 자리에 어느덧 새로 태어나 있는 아득한 번득임./ 끝내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수평선.’(시 ‘수평선’ 부분)

    • ‘지구에 최초의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의/ 야생의 숲으로 돌아갈 때’라고 노래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야생의 개념은 원래 있던 존재, 오염되기 이전의 순결성을 가리키지만, 인간에게는 끝없이 멀리 보는 시선만 있을 뿐”이라고 탄식했다.

    • 남루한 인생들의 일상·비애 따뜻하게 보듬어

    • “시집이라고 오랜 만에 냈는데, 좋은 일도 없고, 그게 뭐 그냥 그렇지요….”

    • 2005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김사인(50) 시인이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을 냈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청사) 이후 오랜 암중모색 끝에 쓴 시들을 모았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시 ‘코스모스’ 전문). 그처럼 여리고 순한 목소리로 남루하고 불우한 생의 비애를 보듬은 시편들이 주류를 이룬다.


    •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고 시작하는 시 ‘노숙’을 통해 시인은 이름 모를 노숙자의 의식과 몸이 나누는 대화를 상상해 시인 자신을 포함해 모든 민중적이고, 소시민적 삶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노숙자의 형상을 빚어내는 것이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 “지난 91년 ‘노동해방문학’지 사건으로 도망 다니던 중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가 든 가방을 날치기 당했다”고 밝힌 시인은 “내가 쓴 시를 거의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일 이후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가 뒤늦게 시를 다시 쓰게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민중시 운동과 함께 출발했지만, 시풍(詩風)이 전투적이지 않은 시인은 “민중시의 속살은 드센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여”라며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그 속살의 온기에서 이런 노래가 나온다.


    •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시 ‘노숙’ 끝부분)

    집시의 기도

    - 충정로 사랑방에서 한동안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



    둥지를 잃은 집시에게는
    찾아오는 밤이 두렵다.
    타인이 보는 석양의 아름다움도
    집시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

    한때는 천방지축으로 일에 미쳐
    하루해가 아쉬웠는데
    모든 것 잃어버리고
    사랑이란 이름의 띠로 매였던
    피붙이들은 이산의 파편이 되어
    가슴 저미는 회한을 안긴다.

    굶어죽어도 얻어먹는 한술 밥은
    결코 사양하겠노라 이를 깨물던
    그 오기도 일곱 끼니의 굶주림 앞에
    무너지고

    무료급식소 대열에 서서……
    행여 아는 이 조우할까 조바심하며
    날짜 지난 신문지로 얼굴 숨기며
    아려오는 가슴을 안고 숟가락 들고
    목이 메는 아픔으로 한 끼니를 만난다.

    그 많던 술친구도
    그렇게도 갈 곳이 많았던 만남들도
    인생을 강등당한 나에게
    이제는 아무도 없다.

    밤이 두려운 것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다.
    50평생의 끝자리에서
    잠자리를 걱정하며
    석촌공원 긴 의자에 맥없이 앉으니
    만감의 상념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난마의 세월들……

    깡소주를 벗 삼아 물마시듯 벌컥대고
    수치심 잃어버린 육신을
    아무데나 눕힌다.
    빨랫줄 서너 발 철물점에 사서
    청계산 소나무에 걸고
    비겁의 생을 마감하자니
    눈물을 찍어내는 지어미와
    두 아이가 "안 돼, 아빠! 안 돼"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교만도 없고, 자랑도 없고
    그저 주어진 생을 걸어가야지.
    내달리다 넘어지지 말고
    편하다고 주저앉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날의 아름다움을 위해

    걸어가야지……
    걸어가야지……

    서울 영등포 노숙인 쉼터 '행복한 우리집'의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시(詩)가 있다. 제목은 '집시의 기도', 부제(副題)는 '충정로 사랑방에서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다. 쉼터 관계자는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시"라고 했다.

    '집시의 기도'는 화자(話者)가 노숙하는 신세를 한탄하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노숙인 김모(68)씨는 "밥 먹을 때마다 (시를) 쳐다보는데 '이 악물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 시는 10년 전부터 노숙인 관련 단체행사나 자료집에 자주 등장했다. 이걸 쓴 사람은 누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시인이 머물렀다는 '구세군 충정로 사랑방'은 2년 전 중랑구 망우동으로 이사 갔다.

    구세군은 대방동·충정로·서대문을 거쳐 현재 망우동·서대문에 노숙인 쉼터 두 곳을 운영 중이다. 김도진(47) 사무국장은 "'집시의 기도'는 1998년부터 2001년 4월까지 우리 시설을 오간 장금(1949년생)씨가 쓴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1999년 봄 이 시를 썼다. "98년 장씨가 사업이 망했다며 찾아왔어요. 160㎝ 정도의 키에 머리숱도 적고 이(齒)도 많이 빠진 왜소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집시의 기도'를 써냈어요. 모두들 글 솜씨에 놀랐습니다."

    당시 '대방동 사랑방'에는 노숙인이 100명쯤 있었다. 그 중 30여명이 글을 끄적였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가 평소에도 한문이나 사자성어를 종이에다 쓰곤 했다. 이날도 장씨는 집시의 기도를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했다.

    사랑방은 10여 년 전 상담기록을 폐기해 장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남아있지 않았다. 장씨는 1999년 10월 대방동 쉼터가 충정로로 이사 갈 때 떠났고 2년 뒤 다시 충정로로 찾아와 한 달간 지내다 또 나갔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는 본인을 '집시'라고 한 것처럼 얽매이는 걸 싫어했던 노숙인이었다"고 했다. 장씨는 쉼터를 떠나서도 남대문·서울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1년에 서너번 김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4년 전 연락이 끊겼다.

    장씨의 흔적은 영등포 행복한 우리집에서 3분 거리인 또 다른 쉼터에서 발견됐다. '햇살보금자리 상담보호센터'에는 작년 3월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있던 장씨를 고시원에 차린 응급구호방에 옮긴 기록이 있었다.

    작년 4월 2일 밤, 이 센터 병원동행팀은 탈진한 장씨를 부축해 지하철을 타고 제기동역 근처 동부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도 했다. 장씨는 4월 3일 119구급대에 실려 보라매병원으로 갔다. 이 센터의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4/6 민윤찬 활동가가 김○○씨를 동행, 보라매병원에 다녀왔다고 하네요. 장금씨를 찾아갔는데 의식 불명인 상태라고 합니다. 4/14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신 장금씨를 찾았으나 중환자실에 있기 때문에 면회 불가.'

    마지막 면회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동행팀 윤순택씨가 말했다. "장금씨가 '집시의 기도'를 썼다는 걸 모두 몰랐다. 그는 특별했다. 내게 가끔 아프리카나 세계평화 얘기를 해줬다."

    그는 고시원 구호방에서 '노숙자라고 병원에서 천대받으면서 죽는 것보다 고시원에서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뜻을 윤씨에게 전했다고 한다. 보라매병원에서 기저귀를 찬 채 누워있는 모습이 윤씨가 마지막으로 본 장금씨였다.

    보라매병원은 작년 4월 29일 시립 성인남성 부랑인 시설 은평의 마을에 장씨를 의뢰했다. 장씨는 작년 6월 1일 부천대성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은평의 마을 관계자는 "장금씨는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돼 벽제화장터로 갔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내용 증명을 보냈지만 아무 통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국장은 "4년 전 통화 때 '부산으로 가 아내와 살겠다'고 해 이 생활을 벗어난 줄 알았다"고 했다. 노숙 시인은 '집시의 기도' 한 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