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전도(내성과 외성이 있고, 남쪽엔 강이 있으며, 서쪽에 절벽이 있어 평지읍성치고는 매우 견고한 성이다. 다만 전쟁 직전 확장해 쌓았던 동문 쪽에 대한 방어력 문제가 임진왜란기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 때 먼저 떨어진 곳은 방어력이 약한 동쪽이 아니라 북장대 쪽이다. 현대에는 외성(초가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바깥의 성벽으로 보호되는 지역)은 허물어졌고 내성만 남아있다.)
출생 시기/일시
1532년연표보기 - 최경회 출생
수학 시기/일시
1548년 - 최경회 양응정의 문하에서 수학
1557년 - 최경회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최경회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최경회 의병 활동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최경회 사망
출생지
최경회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남
대표 경력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고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16세손이고, 최혼(崔渾)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증 승지(承旨)인 최윤범(崔尹範)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최천부(崔天符)이며 부인은 나주 김씨 김원(金遠)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경회(崔慶會)[1532~1593]는 1548년(명종 3) 양응정(楊應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57년 광주(光州)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찾아가 사사(師事)하였다. 1561년(명종 1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67년(명종 22)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천거에 의해 다양한 관직을 맡았다.
1574년(선조 7)에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거쳐 옥구 현감(沃溝縣監)을 역임하였고, 이어 장수 현감(長水縣監), 무장 현감(茂長縣監), 영암 군수(靈岩郡守)를 지냈다. 1584년(선조 17)에는 다시 호조 정랑, 형조,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고, 이어 사도시정(司導寺正),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내던 중 1590년(선조 23)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화순으로 귀가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 최경회에도 권하였으나 이때에는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큰형 최경운(崔慶雲), 작은 형 최경장(崔慶長)을 도와 화순읍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는 것을 도왔다. 또 의병 5백여 명을 모아 조카인 최홍재(崔弘宰)에게 인솔하여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경명이 금산성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과 이광(李洸)의 관군이 용인(龍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직접 거병할 뜻을 세웠다. 이때 화순군 능주 출신 진사(進士) 문홍헌(文弘獻)이 고경명 휘하의 병력을 수습하여 돌아왔는데, 그의 요청에 응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1592년 7월 26일 부대 편성을 마쳤는데, ‘골(鶻)’자(字)로 부대기를 삼고 우의병(右義兵)을 칭했다.
최경회는 전라 우의병을 이끌고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임계영(任啓英)이 이끄는 전라 좌의병과 합류하였다. 이윽고 금산(錦山), 무주(茂朱)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최경회는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적장(賊將)의 언월도(偃月刀)와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빼앗았다고 한다. 이 언월도는 모리미찌[盛道]가 제작한 자웅검(雌雄劍) 중의 하나라고 하고, 「청산백운도」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리고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글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가 있다고 전해지는 그림이다.
이어 10월에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외부에서 협조하였고, 이후에는 김면(金沔)의 군대와 연합하여 개령(開寧)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러한 공(功)이 인정되어 1593년(선조 26) 초에 경상 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직함과 인(印)이 내려졌다.
이후 1593년 6월 중순에 진주성(晉州城)에 입성하여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성을 지켰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어 9일 동안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적장에게 빼앗은 언월도와 「청산백운도」를 조카 최홍우(崔弘宇)에게 맡겨 성을 나가도록 했다. 최경회는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준봉(隼峰) 고종후(高從厚) 등과 더불어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죽기로 맹세하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두 번 절하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遺稿)로는 『일휴당집(日休堂集)』이 있다.
[묘소]
1833년(순조 33)에는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에 부조묘(不祧廟)를 세웠다. 찬성(贊成) 권적(權摘)이 시장(諡狀)을, 판서(判書) 유최기(兪最基)가 묘표(墓表)를 쓰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묘지(墓誌)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이후 저수지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63년 3월에 현재의 자리인 화순읍 다지리로 옮겼다. 2003년에 중건하였다.
[상훈과 추모]
1593년(선조 26) 8월 7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사액하였으며 공신의 녹권을 내렸다. 1627년(인조 5)에는 좌찬성(左贊成)을 증하고, 능주 한천면 모산리에 포충사(褒忠祠)를 세웠다. 1685년(숙종 11)에는 능주 향교 유림들이 능주면 잠정리에 화순 능주 삼충각(三忠閣)을 지어 최경회(崔慶會)·문홍헌(文弘獻)·조현(曺顯) 등 충신 3인의 충공을 기념하였다. 1746년(영조 22)에는 진주(晉州)의 관동(官僮)인 황귀동(黃貴童)이 남강(南江)에서 최경회가 안고 투신한 인(印)을 얻었는데,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장계를 올리자 영조가 친히 인명(印銘)을 짓고 동갑(銅匣)을 주조하여 내려주었으며 인각(印閣)을 세워 보관하도록 했다. 1753년(영조 29)에는 조정에서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 주기도 했다.
(의암 주논개)
관군은 아니지만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왜군 장수를 껴안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 한 여인도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의암(義巖) 주논개’. 우리는 ‘논개(論介)’라고도 알고 있는 바로 그녀가 임진왜란 당시 잊지 말아야 할 또 한명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1574년 전라북도 장수에서는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아주 예쁜 양반집 딸로 논개는 태어납니다. 주달문은 아들이 있었으나 15살 되던 해에 괴질로 죽고 슬퍼하다가 그의 나이 40이 되어 얻은 딸이었기에 애착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양반집 귀한 딸이었으나 일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그녀는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1578년 그녀의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숙부였던 ‘주달무’가 그녀의 집을 관리하게 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민며느리로 강제 혼인시키려 했죠. 이를 알게 된 모녀는 숙부인 주달무를 피해 경상도 안의현의 친가로 피신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김부호가 1579년 모녀를 구금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시 전북 장수의 현감이었던 충의공 ‘최경회(崔慶會)’는 모녀의 억울함을 알고 모녀를 석방시켜주었습니다. 그런 뒤 오갈 때가 없었던 모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는 시작됩니다. 논개가 성인이 되자 최경회는 그녀를 자신의 후처로 맞았고, 둘은 애틋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왜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논개는 크게 분개하였고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지아비를 죽인 왜군의 장수에게 관기(官妓)로 접근하여 함께 죽기를 말이죠. 그리고 왜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던 그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깊이가 깊었던 남강(南江)에 투신하며 순절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