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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을 든 여성 시민군.. 미공개 사진으로 본 5·18 광주(한국일보 2020.05.17. 21:02)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평범한 일상 빼앗긴 광주 시민들

한국일보 기자 기록 사진 중 미공개 컷 발굴

 

1980년 5월 22일 아침 광주시 외곽 송정리역 광장에서 젊은 남성들 위주의 시위대가 도청으로 출발하기 위해 버스와 트럭에 오르는 가운데 직장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소총을 들고 버스로 향하고 있다.

 

계엄군이 광주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를 한 1980년 5월 21일 주변 골목에서 소총을 든 젊은이와 시민들이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집단발포 후 자체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는 계엄군과 산발적인 시가전을 벌였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살아야 한다'라고 쓴 피켓이 눈에 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그날 새벽 총소리가 들렸지만 무서워 나갈 수가 없었다. 동이 틀 무렵이 돼서야 카메라를 숨겨 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이 금남로를 활보하고 YMCA 앞에선 총에 맞은 청년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도청에 들어서니 계엄군이 시민군들의 목을 군홧발로 밟고 굴비 엮듯 등 뒤로 포승줄을 묶고 있다. 비참한 현장이다.”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한 박태홍(77)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현 뉴시스 편집위원)는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개시한 5월 27일 아침을 이렇게 회고했다.

5ㆍ18을 전후해 한국일보는 4명의 사진기자를 광주에 파견했다. 당시 김해운, 한륭, 박태홍, 김용일 기자가 취재한 사진은 2,000여컷남짓. 무자비한 진압과 처절한 저항의 장면들 사이에서 시민의 일상은 심하게 일그러진 채로 기록돼 있다. 40년 전 5월, 광주 시민들의 삶을 미공개 사진으로 되돌아 보았다.

1980년 5월 20일 광주 금남로 주변의 한 극장 건물 상공을 계엄군의 헬기가 날고 있다. 김해운 전 한국일보 기자

 

박 전 기자는 1980년 5월 21일 밤 광주에 도착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 조치가 전국으로 확대된 지 3일 만이다. 열차는 종착역인 광주역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송정리역에 멈춰 섰다. 불과 몇 시간 전 금남로 일대에서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집단 사격을 가해 54명이 숨졌고, 시위대는 장갑차와 총기, 탄약을 탈취해 자체 무장에 나섰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철수할 때까지 산발적인 시가전이 이어졌다.

송정리역 앞 여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아침 일찍 도청으로 향하기 위해 몰려든 시위대를 촬영했다. 100여명의 젊은 청년들 중엔 소총을 든 여성도 있었고, 교련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앞다퉈 버스와 트럭에 올랐다.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탄압이 여리디 여린 손마다 총을 들게 만들었다.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물러난 21일 이후 광주 도심은 일시적인 ‘해방구’가 됐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순찰을 돌고 프락치로 의심되는 이들을 색출해 내던 이들은 시민을 지키는 ‘시민군’이었으나 훗날 ‘폭도’의 누명을 썼다. 방석모에 방석복을 입고 비장한 눈빛으로 전선에 투입되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였다.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군들이 프락치로 의심되는 청년을 체포해 연행하고 있다.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1980년 5월 24일 광주 시내 한 주택가 골목에서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헬멧과 방탄조끼를 입고 종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행진하고 있다. 5ㆍ18의 비극을 전쟁놀이로 받아들인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왠지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비극을 모르는 아이들 눈에 5ㆍ18은 전쟁놀이와 다름 없었다. 24일 광주 시내의 한 주택가 골목, 10세 안팎의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헬멧과 방탄조끼를 걸친 채 몽둥이를 들고 골목을 행진했다. 우렁찬 구호를 외치며 몽둥이를 휘두르던 아이들이 흉내 낸 건 계엄군이었을까 시민군이었을까. 박 전 기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 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고 말했다. 이날 도청 뜰엔 관에 넣지도 못한 시신이 널브러졌고, 적십자병원에선 사망자 명단이 한쪽 벽을 빼곡히 뒤덮었다.

25일 전남 장성군으로 이동한 박 전 기자는 시외버스 편으로 필름을 송고한 후 다음날 다시 광주 시내로 향했다. 당시 시내 중심부로 이동을 시작한 계엄군의 검문을 받았는데, 계엄군 소위가 “위험하다”며 보내주지 않았다. 소위는 “오늘 밤 진압 작전이 시작되는데, 만약 도청 지하에 쌓인 엄청나게 많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 반경 500m 내는 쑥대밭이 된다”고 전했다. 소위는 또 “내 여동생이 시민군에 합류했는데 걱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청 인근 여관에 투숙했지만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민군 진영에서도 26일 이 같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을 예측하고 여성과 어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진압 작전이 개시되면 도청 사수는커녕 이들의 생명 또한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27일 아침 전남도청을 무력 진압한 계엄군이 무장해제된 채 땅바닥에 엎드린 젊은이의 목을 군화발로 짓누르며 손과 몸을 묶고 있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탄압은 평범했던 광주 시민의 일상마저 청년의 얼굴처럼 짓누르고 일그러뜨렸다.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27일 계엄군이 점령한 도청에선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초파일(21일)에 벌어진 혈전으로 갈기갈기 찢긴 광장의 봉축탑은 그로부터 엿새 후 또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 가는 시민들을 지켜봤다. 도청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청년이 계엄군의 군홧발에 목이 짓눌리는 동안 바로 옆에선 이미 숨을 거둔 주검들이 말없이 누워 있었다. 

1980년 5월 24일 광주 시내의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는 뜻의 '엥꼬' 안내문이 붙어 있다. 21일 집단발포 후 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도청 진압작전 이전까지 봉쇄작전을 폈다. 김용일 전 한국일보 기자

 

1980년 5월 24일 광주 적십자병원 복도에 누워 있는 부상자들을 간호사가 돌보고 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벌이고 난 직후의 전남도청. 사무실 벽에 교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서울신문 2020-05-15 02:33)

5·18 당시 외신 기자와 시민들 소통 도운 美 평화봉사단원들의 생생한 증언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할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 윌리엄 에이머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최근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 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돌아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 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5·18 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

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단원 중 한국어를 가장 잘했던 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머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에이머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코트라이트는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