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예일대 엄친딸, 이래나의 리얼 다이어리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관리를 잘하는 사람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예일대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진리를 수시로 되새겨야 한다.
하루가 부족하다!
예일대 입학 이후 첫 수업. 본격적으로 수업을 들으면서 든 생각은 ‘하루가 부족하다’였다. 수업이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것은 익히 들었고 짐작도 했지만, 실제 들은 수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학생도 교수도 정말 뜨겁고 치열했다. 예일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배우려고 왔으니 열심히 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지식 앞에서는 남을 개의치도 않는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하다고 알려진 학교의 분위기 때문인지, 모든 학생들은 어딘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자존감이 강하고 똑똑한 학생들이다 보니 수업시간 열기가 굉장히 뜨겁다. 한국에서는 교수의 말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수시로 치열한 격정의 토론이 열리기도 한다. 교수의 말이 본인의 생각과 다르면 당당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어필하면서 한 주제를 두고 치열하게 파고드는 분위기다. 보통 이런 학생이 한두 명인데,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학생이 비슷한 성향이다. 모두가 질문할 시간이 모자라서, 한 명이 많은 분량의 질문을 하면 민폐가 되는 분위기다. 모두가 질문에 목말라하고, 배우려고 온 금과 같은 시간이기에 허투루 쓸 수가 없다.
수업은 굉장히 재미있다. 수준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내용은 깊다. 두꺼운 전
공책을 모조리 읽어 가야 수업시간 진도를 따라갈 수 있을 만큼 타이트하게 진행된다. 물론 학생들의 수용 능력을 가늠한 분량이겠지만, 진도를 나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생긴다. 미리 공부를 해두지 않으면 수업이 끝나고 따로 복습을 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을 들여야 해서, 미리미리 공부하는 것이 몸에 배게 된다. 기본적으로 투자해야 할 시간에 각종 과제까지 해내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예일대는 각종 클럽 커뮤니티가 활발하기로 유명하다. 대학은 단순히 학점을 따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접해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일대의 교육철학이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비리그가 비슷한 문화이지만, 예일대는 그중에서도 특히 클럽활동이 체계적으로 잘 이루어지는 곳이다. 나는 펜싱부 소속인데, 시합에 나가고 훈련을 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펜싱부 멤버들끼리 또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도 하고, 별도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학생활이 채워질 정도로 훌륭한데 예일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두세 개의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관심 분야 혹은 연구 대상이 있으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룹을 만든다. 시간관리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룹 스터디는 시간관리 전략?
예일에서 혼자만의 공부는 불가능하다. 상대평가라서 모든 사람의 점수가 잘 나올 수 없다.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친한 아이들끼리 그룹을 만든다. 각자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다가 ‘이런 부분이 필요하겠다’ 하는 부분이 있으면 필요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룹 스터디를 시작한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예일대생이라고 해서 전혀 새로운 공부법이 있는 건 아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불변의 학습법, 각자 노트를 해서 구글닥 같은 인터넷에 그룹을 만들어 내용을 공유하는 식이다. 도서관에 있는 스터디룸에서 토론이 진행된다. 내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도서관에는 그룹 스터디를 할 수 있도록 룸이 마련되어 있다. 방음은 기본이고, 프로젝터 등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장비들이 잘 갖춰져 있는 곳이다.
이렇게 그룹을 짜서 공부를 하면 혼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챙길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캠퍼스 안에서 인맥 형성도 가능하다. 각자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지만, 학교에서 권장하는 부분도 있다. 수업에 따라 선생님이 9명 정도 짜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준다. 혼자 풀면 못 푸니까 공유를 하라는 시스템이다. 졸업 이후 사회 진출을 했을 때 정말 소중한 ‘예일 인맥’을 미리 만들라는 숨은 의도도 있다.
사실 처음에 나는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에게 먼저 (그 어떤 질문이라도) 안 물어보는 편이었다. 한국에서는 혼자 공부하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처음 만난 사이인데 모르는 것을 먼저 물어보는 것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행동인 것 같았다. 상대가 ‘이것도 몰라?’ 하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승부욕과 자존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룹 스터디가 보편화되어 있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 생각과 행동이 정말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금세 알았다.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건네면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혹시 내가 못 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배웠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가 이 부분을 못 하겠는데 도와줄 수 있니?’라고 먼저 손을 내밀면 ‘그래? 그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하면서 방법을 찾아주면 그만이고, 혹시 도움을 줄 수 없으면 ‘미안한데 그 부분은 내가 모르는 부분이다’ 하면 그만이다. 예일대생은 불필요한 감정으로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무언가를 요청했을 때 거절을 당하면 ‘나는 이만큼 해줬는데, 넌 왜 안 해줘?’라는 마음이 들면서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서운해지게 되는데, 이곳에서 지식을 얻는 것 이외의 모든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 문화를 점점 알아갈수록 미국의 ‘노(No)’ 문화를 알게 되었고, 오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자칫 ‘남에게는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예일대 학생들의 예의범절이나 애티튜드는 그야말로 ‘신사적’이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처지지만, 캠퍼스에서 길을 물어보는 간단한 질문에도 상대가 완전히 알아들을 때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매너를 가진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예스’와 ‘노’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미국 대학생활에서 꼭 필요한 정서인 것 같다. 다들 공부에 있어서는 정말 쿨하다. ‘노’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합리적인 사고는 내가 예일대에서 배운 첫 번째 소중한 자산이다. 물론 나도 시행착오는 있었다. 한번은 내가 도움을 준 친구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차갑게 ‘안 된다’고 거절을 해서 서운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니까,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주는 게 당연한 거다’라고 생각했던 터라 당황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합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캠퍼스 문화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가 지켜보고 있다!
대학에 들어왔으니 열심히 놀기도 하면 좋으련만,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다들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상상을 초월하게 열심히 공부한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해 보일 정도다. 옷을 아무리 예쁘게 입어도 커다란 배낭 패션을 피할 수 없다. 나는 평소에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고 다니라는 엄마의 조언으로 항상 패션에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수업을 소화하려면 커다란 배낭은 선택이 아닌 필수 아이템이다. 한국의 패션 피플들이 보면 기겁을 할 만한 치마 패션에 커다란 배낭을 멘 모습은 예일에서는 흔한 풍경이다.(평소엔 이렇게 다니던 학생들도 일요일 파티가 열리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따로 들려드리겠다.)
한 시간에 두꺼운 전공책 한 권씩 쑥쑥 진도가 나가는 ‘빡센’ 수업은 절로 시간관리를 하게 만든다. 그 이면에는 예일 측의 고도의 전략도 있는 것 같다. 커리큘럼 자체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맞은 가을방학을 보내면서 학교의 전략과 숨은 의도를 깨닫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예일에도 일주일 반 정도의 가을방학 기간이 있다. 방학이란 자고로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푹 쉬어야 하는 때인데, 돌아오는 날 시험을 본다는 비보를 접했다. 짧지만 자유와 해방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일주일 반이라는 시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공부했던 것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실라버스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일정이라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는데, 학교의 고도의 전략이었다. 방학기간에 놀지 말고 계속 리뷰하고 한 번이라도 더 공부하라는 전략 말이다. 방학이 끝나고 이 사실을 알았다. 긴장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 갔는데, 가을방학 이후의 시험은 성적에 반영되는 시험이 아니었다. 신입생들만 겪는 일이고, 아예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복불복인 시험은 방학에도 바짝 긴장해서 시간관리를 하라는 학교의 가르침이다.
다음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시험기간의 시간관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파이널 기간이 되면 모든 학생들이 먹을 것들을 한가득 사둔다. 거의 전투식량 수준이다. 모든 먹을 것을 기숙사에 들고 오는데 단지 밥 먹는 시간마저 아까워서다. 기숙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같은 스위트 아이들끼리 기숙사 거실에 ‘식량’을 갖다 놓고 먹는다.(한 학기의 경험으로 이 시기의 체중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일대에는 ‘프레시맨 피프틴’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신입생들은 시험기간이 끝나면 체중이 기본으로 15파운드는 늘어난다는 말이다.)
잠을 자지 않는 예일대생?
나는 새벽 2시만 되면 잠이 온다. 시간은 늘 부족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는 없다. 시험기간에도 새벽 2시가 한계라서 깨어 있을 때 집중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런 내가 처음에 깜짝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새벽에 잠을 자지 않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내가 잠드는 새벽 2시에 도서관으로 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전까지는 클럽활동 때문에 너무 바빠서 혼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그 친구들의 말이다. 스스로 더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어서 가는 친구들도 있다. 공부벌레 스타일은 아니고, 천재형으로 무언가에 꽂힌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활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낮잠 타임을 잘 활용하는 편이다. 학교에서 정해둔 공식적인 낮잠 타임이 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후에 한두 시간 쪽잠을 자두면 나머지 시간을 조금 더 쾌적하고 집중력 있게 보낼 수 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가장 확실한 전략은 평소에 체력관리를 잘해두는 것이다. 몸이 건강하면 깨어 있는 시간에 정신도 맑다. 정신은 육체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체육관이다. 예일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바로 체육관인데, 그 어떤 지식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진리를 빌딩이 은연중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곳을 자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설이 정말 잘 갖춰져 있다. 수영장, 레슬링, 펜싱, 카누, 카약, 요가클래스까지 거의 모든 종목을 입맛 따라 즐길 수 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시설을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체육관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학교에 대한 애정이 절로 샘솟게 된다. 관심 분야에 따라 자유롭게 어떤 운동이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전통파도 많다. 이들을 직접 인터뷰해본 건 아니지만,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체육관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 약속은 칼처럼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그래서 예일에서 시간 약속은 칼이다. 30분은 기본, 한 시간, 두 시간 이상 늦거나 10분 전에 약속을 취소하는 코리안 타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가장 귀한 이곳에서, 본인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이곳의 이런 시간개념에 철저한 문화는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적응하기 쉬웠다. 시간개념에 투철한 아빠의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덕분이다. 어떤 약속이든 항상 3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라는 것이 아빠가 알려주신 좋은 습관이다. 젊은 시절 그룹 ‘코리아나’로 활동하셨던 아빠는, 공연으로 세계를 휩쓸고 다니며 시간개념에 철저한 분이 되셨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시간에 늦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존경하고 상대의 시간까지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예일대에 오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에 늦으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를 지은 것처럼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시간개념이 없을수록 성공에서 멀어진다는 아빠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다른 학교에서 특강을 듣거나 하게 되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 버스를 탔을 때 나는 이 친구들이 다르구나, 내가 배울 점이 많구나 새삼 느꼈다. 한국에서 학교 친구들과 캠핑을 가게 되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자들끼리 혹은 남자들끼리 삼삼오오 뭉쳐서 이야기를 하거나 놀기 마련인데 여기 친구들은 띄엄띄엄 혼자 앉아서 자리를 잡았다. 짧은 이동시간이지만 혼자 책을 읽거나 에세이를 쓰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수다를 떨거나 멍하니 잠을 자는 친구는 거의 없다. 문화 자체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으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여성조선] (예일대 엄친딸, 이래나의 리얼 다이어리 ②) 예일대생의 별난 학교 사랑
(조선일보 2015.03.21 21:47)
대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재미있는 풍경이 있다. 다들 자기가 ‘대학생’이라는 것과 ‘예일대’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는 학생들 모습이다. 물론 하버드도 스탠포드도 마찬가지겠지만.
- 이래나/ 사진제공=이래나
내가 예일대에 합격하고 아빠가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동대문에 달려가서 예일대 로고가 박힌 맨투맨 티셔츠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평소 내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분이라 닮은 에피소드가 많았기에 ‘역시 우리 아빠는 못 말려’라고 생각했던 기분 좋은 기억이다.
입학식을 위해 가족이 함께 학교에 갔을 때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들른 곳도 기념품 가게였다. 동대문에서 산 예일대 티셔츠는 하도 자주 입어 닳아버려서 새 옷이 필요했던 탓이다.
예일대 캠퍼스 안에는 기념품 가게가 두 곳 있다. 별생각 없이 들렀다가 우리 가족은 깜짝 놀랐다. 우리가 사려고 했던 후드티셔츠는 기본이고 양말, 속옷, 휴대폰 케이스, 문구류 등등 별별 아이템에 예일 로고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놀란 것은 그곳을 채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다. 입학시즌이라서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관광객까지 합세해 신들린 것처럼 쇼핑하는 모습이 놀라웠고 또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한 학기 동안 학교생활을 하고 보니, 그때의 풍경이 비단 입학시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늘 인산인해이고,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날짜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발 빠르게 움직여야 손에 넣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좀 더 발이 빨라야만 한다. 체구가 작은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은 수량이 많지않아 구하려면 미리 물건이 들어오는 날을 체크해두어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비단 우리 학교뿐 아니라 아이비리그의 학생들은 모두 자기 학교 로고가 박힌 옷을 즐겨 입는다. 공부할 때 입기 편하고 저렴한 데다 디자인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즐겨 입는다. 학교 옷을 입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절로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모르는 사이라도 예일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걸 옷이나 각종 아이템을 통해 확인하면 기분이 좋다. 한국에서는 대학 이름이 적힌 옷이나 아이템은 구식이라고 치부되고 인기도 없는데, 이곳에서는 왜 이렇게 난리가 나는지 모르겠다. 미국과 한국의 재미있는 차이인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곳의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애정이 정말 각별하다.
- 사진제공=이래나
흔히 아이비리그 학생들은 스쿨 스피릿(School Spirit)이 대단하다는 말을 한다. 펜싱부 소속으로 경기를 종종 치르는 나는 그걸 특히 직접적으로 느낀다. 지난주에 경기가 있었는데, 내 개인전이었지만 학교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게임이라서 그런지 응원단이 굉장히 많았다. 게임이 있으니 응원하러 와달라고 따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동문들의 방문에 힘이 났다. 같은 예일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응원해주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뭉클했다.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느낌이 좋았다. 응원 덕분에 게임은 내 승리로 끝났다. ^^
펜싱뿐 아니라 풋볼, 미식축구, 하키 등 학교별로 대항이 붙으면 학교에 대한 애정도가 수직상승한다. 경기를 하는 사람이나 응원하는 사람이나 모두 에너지가 대단하다. 특히 라이벌 관계인 하버드와 대결하게 되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들까지, 심지어 동네 주민들까지 모두가 한편이 되어서 응원한다. 분위기가 과열되기라도 하면 ‘이 사람들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사람이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무엇이 모두를 학교에 열광하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입학하기 전에 모교 사랑이 뭔지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입학지원을 하면 인터뷰가 진행되는데, 그 장소가 캠퍼스가 아닌 지원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다. 인터뷰 면접관은 예일대 출신의 동문. 나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예일대 선배님을 만나서 면접을 치렀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배님의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이미 사회적으로 입지를 굳힌 선배님은 굉장히 바쁜 분이셨는데, 예일에 대한 사명감만으로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해 인터뷰를 해준다는 것이 내 눈에는 대단해 보였다. 학교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입시 인터뷰를 나누면서, 나도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면 이렇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사진제공=이래나
취업보다 중요하고 좋은 학교생활
2학기에 접어드니 학교생활이 더 재미있어졌다. 1학기 때는 친구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낯설고 힘들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자존감이 많이 높아졌고 친구들과의 커뮤니티도 많아졌다. 학교생활이 재미있고 안정적이니 예일대생이라는 자부심과 소속감이 자동으로 커지는 것 같다. 학문을 대하는 태도, 지적인 욕구도 높아지고 공부를 하는 것이 재미있다.
3학년 이상인 펜싱팀 언니 오빠들은 각종 기업에서 면접을 보자는 스카우트 제안을 많이 받는다. 미국의 회사들은 운동하는 학생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운동을 잘하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체력, 인성의 밑바탕이 제대로 깔려 있는 데다 성적까지 좋은 경우도 많아서다. 실제로 우리 펜싱팀 팀원들은 성적이 다 좋다. 운동을 하는 근성과 공부를 하는 근성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선수이다 보니 실력이 좋은 경우에는 당연히 프로팀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오기도 한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런 각종 제안들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이 대부분 ‘노’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펜싱팀 선배 중 한 명이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아이비리그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생활이다.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학교의 다양한 커리큘럼을 놓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깔려 있다. 정규 교과과정을 끝까지 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3학년이나 4학년이 되면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학생의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정반대의 캠퍼스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학교생활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다. 학교가 교육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고 학생들 역시 진리 탐구에 기를 쓰는 분위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기에 형성된 문화인 것 같다.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의 본기능이 이런 것이 아닐까.
- 예일대/ 사진제공=이래나
모교 사랑에서 출발한 기부문화
지금 예일의 의학대학 건물은 공사 중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졸업생이 학교에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는데, 그 기부 조건이 “의대에 학생을 더 받아달라”는 요구였다고 한다. 캠퍼스를 걷다 보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건물이 많다. 대부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이다. 예일에는 이런 기부자들이 참 많다.
알려진 대로 미국은 도네이션문화가 오픈되어 있다. 졸업생이든 재학생이든 그들의 가족이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명분으로 기부를 한다. 한국의 기부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부자들의 돈 자랑이 아닌 명분이 있는 기부라는 것이다. 미국에는 “100억을 드리겠습니다. 알아서 좋은 데 써주십시오”라는 식의 기부가 없다. 구체적인 명분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아이비리그에는 장학금 제도가 많다. 전교생의 절반 이상이 장학금 수혜자다. 성적우수자뿐 아니라 명분이 확실한 경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망했거나 운동 특기생인 데다 총명한데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 등이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국민(미국인)에 해당되는 이야기라 나에게 해당사항은 없지만,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부터 미국 대학들이 ‘컬리지 버블(College Bubble)’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비싼 등록금이 원인이 되어, 앞으로 많은 대학이 없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의 단어다. 실제로 아이비리그의 강의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시대라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학교마다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건강한 기부문화와 활발한 장학금 제도가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부를 많이 하는 이유는 부자인 졸업생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베이스가 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했다면 졸업하고 수십 년이 흘러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선배님들의 가슴 속에는 학교에 대한 추억과 아련한 애정이 남아 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어떤 졸업생이 될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학교에서 보낸 이메일을 수시로 받아본다고 한다. 학교행사부터 최근의 이슈 등을 실시간으로 알려줘서 자기 자식이 예일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이 생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메일에는 기부와 관련된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하는데, 기부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금액과 방법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학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좋은 기부문화를 보면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소신 있게 기부하고 사는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됐다.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진정성 있는 기부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기부할 대상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기부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래나는… 1994년생. 리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키스 스쿨(Keith School), 스위스 레잔 아메리칸 스쿨(Leysin Ameriacn School), 한국지구촌고등학교(GCFS)를 졸업했다. 서울시장배 동호인 펜싱대회 1위, NAC(North American Cup) 32강에 드는 수준급 펜싱선수이기도 하다. 사랑의 구보대회, 여성탈북자를 위한 모금운동 등 봉사와 기부에 관심이 많다. 현재 예일대에 재학 중이며, 경제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여성조선] 예일대 엄친딸, 이래나의 리얼 다이어리 ③
(조선일보 2015.04.18 17:44)
산해진미보다 맛있고 매력적인 예일대 수업
수강신청 기간, 수업 관련 정보가 담긴 우리의 바이블 블루북(blue book)을 들여다보면 산해진미 요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입이 행복하게 쩍 벌어진다. 한 학기 동안 날 가슴 설레게 할, 무려 2천 개가 넘는 수업이 눈앞에 있어서다.
학기가 시작되는 첫 일주일은 바쁘고 설레고, 또 행복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다. 2천 개가 넘는 수업 중에서 수강과목을 정하는 일은 복잡하지만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다. 이 중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업은 모두 4과목. 모든 학생들이 이왕이면 더 재미있고 더 유익한, 그리고 학점도 잘 받을 수 있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인기가 있고 입소문이 난 곳일수록 사람이 몰리는 법.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2학기에 접어든 나는 한 번의 경험으로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전략이 필요해!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에서 두꺼운 책을 한 권씩 나눠준다. 예일대생의 성경책이라 불러도 좋을, 일명 블루북이다. 이 책에는 예일대에 개설되어 있는 모든 수업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한 학기 동안의 커리큘럼은 물론 교수에 대한 소개, 이전 학기 학생들의 수업평가 등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실려 있어서 수강신청을 할 때는 물론 학기 중 수업을 해나갈 때도 꼭 필요한 책이자, 가장 믿을 만한 존재다.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듣고 싶은 과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물론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으려면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하고, 또 시간도 꽤 많이 걸린다.)
자기의 소신과 촉을 믿는 것도 좋지만, 제아무리 자기 앞가림 잘하는 예일대 학생일지라도 이 수많은 과목 중에서 단 4개를 고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상대는 카운슬러다. 아카데믹 카운슬러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이들은 학생들이 어떤 수업을 들을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들은 예일대의 어딘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우리에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존재다. 이들과 내년이나 후년의 플랜을 같이 짠다. 물론 관심사가 비슷한 친한 친구나 선배들의 조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기도 한다.
첫 일주일은 쉽게 말해 수강신청 변경기간이다. 한 학기에 4과목을 듣는데 7과목 정도 신청을 해서 직접 수업을 들어본다. 이때는 출석점수가 반영되지 않아서 가볍게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블루북에 나온 수업 진도대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수업도 있고, 점수에 반영하는 시험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경우도 있다.
이번 학기에 들을 4과목을 최종 결정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는지라 필수과목을 신청하고, 나머지는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을 골랐다. 약물 수업과 사람과 죽음이라는 과목을 재미있게 듣고 있다. 드러그와 마약에 관한 약물 수업의 공식 이름은 Drug Brain Behavior. 약물이 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배우는 수업이다. 150명이 들을 수 있는 이 수업은 400명이 지원할 만큼 경쟁률이 대단했다. 지난 학기부터 이 수업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꼭 듣고 싶었고, 수강에 성공하기 위해서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교수님에게 무려 다섯 통의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온 이래나라는 학생이다. 우리나라에는 마약에 관련된 학문이 전혀 없다. 법적으로도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서 더 음성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수업을 들으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논리적인 글을 써 내려갔다. 한국에서는 배울 기회가 없으니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수업과 관련된 학업 플랜도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보여드렸더니 결국 기적이 일어났다. 마지막 날에 교수님이 직접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한 자리가 비어 있으니 얼른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보통 공석이 생기면 고학년 위주로 우선권이 주어지는데, 수업에 대한 나의 열정을 눈여겨보신 교수님의 배려로 1학년인 내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어려서부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으며 어떤 일이든 진실하고 간절하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수강신청도 진정성을 가지고 절실한 마음으로 접근하니 뜻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마약부터 아프리카 역사까지, 다양한 수업
수많은 수업 중 예일대생이 좋아하는 수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심리학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베이스가 되는 학문이다 보니 모두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나는 지난 학기에 심리학 관련 과목을 들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학문으로서도 재미있지만, 사람의 심리에 대한 접근을 훈련하니 실제로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비즈니스를 할 때도 사람의 심리를 베이스로 접근하는 것은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번 수강신청 기간에 가장 화제가 된 수업은 음식 수업이었다. 새로 개설된 수업인데 가장 인기가 많았다. 경쟁률이 치열했다는 말이다. 어떤 나라의 음식과 거기에 얽힌 문화, 역사를 알아보는 독특한 수업이다. 수업을 보면 얼마나 다양한 주제와 방법으로 학문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수강신청에 성공한 마약 수업도 굉장히 흥미롭다. 마약의 종류와 실태부터 그것들이 어둠 속의 경로로 어떻게 운반되고 확산되어 가는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현실을 배우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밤새 국경을 넘어 달리면서 마약 운반책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적인 자극을 주는 좋은 수업인 것 같다.
사람의 본능이라는 수업도 굉장히 재미있다. 철학적인 성격이 강한 강의인데, 역시 인기가 많아서 수업에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이 수업을 통해 나는 세상의 모든 이치에 답이 없다는 것을 배웠고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넓은 눈도 가지게 됐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내 눈에는 검은색이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알게 되니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니 인정하자는 마음을 알게 됐다. 이 깨달음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준 것 같다.
수강신청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 중 하나가 “생전 듣지 않을 과목을 꼭 들어라”다. 이렇게 재미있고 다양한 수업이 있는데, 전공 공부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 EDM(electronic dance music) 같은 특이한 수업을 통해 예일이 학문에 깨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일대 학생들은 전공수업을 듣겠다며 혈안이 되어 있지 않다. 학교는 그저 학생들에게 세상의 다양한 맛을 학문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곳인 것 같다.
예일대는 다른 아이비리그 학교에 비해서 예술에 대한 역사가 깊다. 아카펠라를 제일 잘하기로 유명하다. 아트 쪽으로 많이 유명하고 다른 학교보다 특화된 것이 많다. 클래식하고 무거운 학문을 추구하는 곳이 하버드라면, 예일은 개성이 많은 학생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하버드가 정통파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팀 서포트가 대단한 우리는 월등하게 행복하다. ^^
유일한 한국어 수업, 그리고 한국인
예일대에 다니고 있는 한국인 학생은 모두 30명 정도 된다. 수가 굉장히 적어서 잘 뭉치는 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인들은 마음을 터놓는 대화를 하기 때문에 우리끼리 더 잘 뭉치는 것 같다. 나도 미국인 친구가 많고 한국인 친구, 교포 친구도 많지만 마음을 터놓는 가장 친한 친구는 그래도 한국인 친구다.
기분 좋은 것은 숫자가 많지 않아도 한국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고, 여러모로 인정을 받는 훌륭한 친구가 많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학교 내에서 ‘한국인의 밤’이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노래를 부르고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한국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행사다. 나는 뜻깊은 일에 동참하고 싶어 장기자랑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무대 위에서 노래 공연을 펼치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항상 애국심을 강조하시던 아빠를 떠올렸다.
그룹 코리아나로 세계무대에서 활동을 많이 한 아빠는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도 어려웠던, 외국인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라 아빠의 얼굴과 행동이 곧 한국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늘 하셨다고 한다. 어딜 가든지 ‘자랑스러운 한국인’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매너를 지키고, 심지어 호텔 방 청소까지 깨끗하게 할 만큼 조국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분이시다. 아빠는 드럼에 태극기를 달고 연주를 하실 정도로 우리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신데, 이번에 ‘한국인의 밤’ 행사를 진행하면서 아빠의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마음은 나뿐 아니라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미국에서 자란 교포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상승하는 만큼 그들의 자부심도 커지는 것 같다. 흔히 이스라엘 교육에 대해서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한국인 엄마들 사이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교포 친구들은 내가 아빠에게 들었듯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엄마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항상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자란 그들, 그리고 또다른 예일대 학생들 네명이 학교에서 마련한 ‘예일 코리아’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상태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봄방학을 맞아 서울의 내 방 안인데, 내일은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을 위해 가이드를 할 예정이다. 봄방학이라는 달콤한 시간에 데이트를 포기하고 본인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친구들이 멋있어 보이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하나 더, 학생들에게 투자를 해주는 학교 프로그램도 훌륭한 것 같다. 등록금이 왜 비싼가 했는데, 이렇게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항상 연구하는 것은 높이 살 만한 부분인 것 같다. 이번 ‘예일 코리아’에 비용 전부를 학교에서 제공한다. 이제 2학기째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2천 개가 넘는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 있는 학문을 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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