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 죽었다"… 원세훈 판결 후폭풍
현직 부장판사가 정면비판 파장 "지록위마 판결… 사심 가득한 궤변"
"법원, 기소 명령 내리고 무죄라니" 윤석열 전 특별수사팀장도 일침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무죄 판결에 대해 현직 부장판사가 “선거개입이 아닌 정치개입이 무엇이냐”며 정면 비판하면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윤석열 전 국정원 특별수사팀장도 “선거기간에 하면 위법인 행위가 선거전부터 해오면 죄가 없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법조계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나오고 해당 판사에 대해 경위조사가 시작되는 등 판결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45ㆍ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는 12일 법원내부통신망인 코트넷 게시판에 올린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에서 전날 원 전 원장에게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하지 않았다”고 선거법 위반 무죄가 선고된 데 대해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라며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궤변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라며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권세를 맘대로 휘두른다는 의미)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또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 가득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며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국정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이었다가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과 갈등 끝에 좌천됐던 윤석열 전 팀장(대구고검 검사)도 “국정원법의 정치개입 금지는 과거 야당후보 비방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던 국정원 직원 사건 등을 토대로 만들어져서 오히려 선거법보다 엄격하다”며 “국정원법 위반이 인정되고 그 기간에 선거가 있으면 선거법 위반은 자연히 해당된다”고 말했다. 윤 전 팀장은 “선거 전부터 해오던 행위니까 괜찮다니, 국회의원이 주민들에게 밥사고 선물 주면 선거법 위반인데 선거철 전부터 계속 밥 사왔다면 죄가 없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그는 “판결에 논평을 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서울고법이 국정원 간부들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라고 명령했는데 무죄라니”라고 토를 달았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9월 23일 검찰이 원 전 원장만 기소하고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을 기소유예 처리하자 민주당이 낸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공소제기를 명령했었다.
대법원은 김 부장판사의 글을 강제삭제하고 경위조사에 나섰다. 대법원 관계자는 “(법관의) 정치적 중립의무, (코트넷에서의) 명예훼손 금지, 다른 재판에 대한 학술적 목적 외 논평 금지 등 법관윤리 규정과 코트넷 운영관리 규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징계청구권자인 수원지법과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도 김 부장판사의 글과 관련한 경위조사에 나섰다. 김 부장판사는 다른 지역에서 횡성으로 데려와 2개월 미만으로 사육한 소는 횡성한우가 아니라고 판결한 2심 재판장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정면 비판해 2012년 서면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현직 부장판사, 국정원 댓글 판결에 정면 비판
(한국일보 2014.09.12 22:04)
법원이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을 지시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정치개입은 인정하고도, 선거개입은 무죄로 판단한 판결을 해 파문이 거세지고 있다. 이를 두고 현직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궤변”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는 12일 오전 7시께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이다. '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비유한다.
일선 판사가 다른 판사의 사건 심리 결과를 두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더구나 이번 게시글은 비판 수위가 매우 높은 편이어서 상당한 파문이 예상된다.
대법원이 김 부장판사의 글을 직권으로 삭제해 현재는 이 글을 볼 수가 없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대법원은 "코트넷 운영위원회가 '사법부 전산망 그룹웨어 운영지침'에 따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수 있는 글이라 판단해 직권 삭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김 판사의 비판을 전문 그대로 전한다.
법치주의는 죽었다
수원지법 성남지법
부장판사 김 동 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각주1) 맹자가 ‘왕도정치’라는 개념과 대조해서 언급한 정치 유형으로 ‘패도정치’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권세와 무력으로 천하를 장악하고 국민을 다스리는 정치를 말한다.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
(한국일보 2014.09.13 00:20)
사법연수원이 꼽은 ‘연수생 필독서 10권’에 든 지혜의 아홉 기둥(원제 The Brethren)은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기자 밥 우드워드가 미국 연방대법원 비사를 다룬 책이다. 역자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중반 두 권으로 펴낸 초판 제목을 판사가 나라를 잡는다 판사가 나라를 살린다로 달았다. “잘못된 판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잘못을 바로잡는 판결로 나라를 살릴 수도” 있는 대법원(관)의 위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1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을 접하고 20년 묵은 이 책 제목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판사가 나라를 잡는(망치는)구나!”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의 조직적인 여론조작 활동이 ‘불법 정치관여’이긴 하나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궤변도 황당하지만, 정치관여 행위를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그 죄책이 무겁다”고 꾸짖으면서도, 이런저런 감경 사유를 붙여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권력기관의 교묘한 선거개입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이 판결이 권력의 유혹에 한없이 약한 공직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204쪽에 달하는 장문의 판결문을 형광펜, 빨간펜으로 밑줄 팍팍 그어가며 꼼꼼히 읽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피고인 측이 제기한 수사 및 증거수집의 위법성 여부,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대한 설명이 장황할 뿐 사건의 실체에 대한 판단 부분은 오히려 간결하고 명쾌하다. 재판장인 이범균 부장판사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정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판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재판부를 인신공격하는 행위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법원 내부통신망에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한탄하는 글을 올린 한 부장판사처럼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앞두고 입신영달에 중점을 둔 ‘사심’ 가득한 판결”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법’은 매우 기계적으로 적용됐고 ‘양심’은 매우 편리한 방식으로 작동한 판결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합리적 의심’이 꼬리를 물고 커져간다.
특히 이른바 ‘원장님 지시말씀’에 “직접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시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선거법 위반 무죄의 주요 근거로 든 재판부의 순진무구함에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가 불법이 명백한 지시를 공식 기록으로 남기겠는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직접 지시’에 집착한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2010년부터 대선 직전까지 수시로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확실한 싸움’을 독려한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어떻게 해서든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하고…”(2012년 2월 17일 지시말씀) 등 민주당을 대놓고 북한과 연계한 종북좌파로 몰아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선거개입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선거개입인가. 이 밖에도 판결문에는 개별 쟁점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오락가락해 서로 상충하는 부분들이 수두룩하다.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갖다 붙인 감경 사유들도 어처구니가 없다. 대표적인 것이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오인했을 뿐 적극적으로 위법성을 인식하고 범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대목이다. 제 임무조차 몰랐던 한심한 사람이 4년씩이나 정보기관장으로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했다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과문한 탓인지 ‘법을 몰랐다’는 변명을 주된 감경 사유로 인정한 판결은 들어보지 못했다. 반성은커녕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피고인에게 재판부가 알아서 아량을 베푼 것도 전례 없다. ‘입신영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선거개입을 유죄로 인정하거나 실형을 선고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시비 등 정치적 파장이 일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이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이미 여러 사건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터에 이대로 물러설 상황은 아니다. 항소심과 대법원 최종심까지 지루한 법정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나든 법원은 이번 판결로 권위의 기반인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법치주의가 죽었다’는 말이 괜한 한탄이 아니다.
원세훈 '선거법 무죄 근거' 수긍하기 어렵다
(한국일보 2014.09.11 20:2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선거 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정원 심리전단의 댓글과 트위터 활동이 국정원법 위반에는 해당하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으로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재판부는 지난 2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축소했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됐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엄히 단죄해야 할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혐의에 대해 잇달아 관대한 판결을 내린 셈이다. 앞으로의 선거에서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에게 나쁜 신호를 주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이 원 전 원장 등의 지시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비방하는 정치관여 행위를 한 점은 인정되지만 선거법상 선거 개입 혐의로까지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으로 보기 위해서는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국정원장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재판부는 같은 행위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을 인정하면서 국정 성과를 홍보해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과 정치인들을 반대, 비판했다고 근거를 댔다.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과 야당 후보를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과 SNS에 대량으로 띄운 행위가 목적을 가지고 계획한 게 아니라는 설명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같은 행위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은 맞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논리는 군색하다.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글에는 “종북인증 발찌 찬 문재인” “문재인의 주군은 김정일”등 야당 후보를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것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원 전 원장의 전부서장회의 녹취록에는 “야당이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처박아야지. 금년에 잘못 싸우면 우리 국정원은 없어지는 거야” 등 목적성과 능동성을 띠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상식적으로 봐도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무분별하게 관여하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정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전부서장회의 발언을 보더라도 명시적으로 선거운동 지시라고 볼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명백한 사실에 애써 눈을 감으려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재판부는 김용판 사건에서도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내부 제보자의 진술은 외면하고 다수 증인들의 발언을 양적으로만 비교해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렸다. 김 전 서울청장과 원 전 원장의 선거법 무죄 판결 모두 상식과 정의에 부합되는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번 판결이 나오자 일부에서는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문제삼고 있으나 검찰의 수사와 기소 과정을 돌아보면 오히려 검찰의 수사의지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첫 공판이 시작된 뒤에도 수사 과정에서 외압 논란이 일면서 특별수사팀장이 경질되고 수사팀이 공중 분해되는 등 검찰의 진상규명 의지가 후퇴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오히려 검찰 수사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특별검사 도입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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