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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세기의 사건사고

세월호 침몰 순간, 여성 먼저 배려한 남자승객 '눈길' (중앙일보 2014.05.01 00:02)

세월호 침몰 순간, 여성 먼저 배려한 남자승객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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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 어업지도선 201호 항해사 박승기(44)씨가 촬영한 21분36초 분량의 동영상에는 침몰 당시 세월호의 승객 구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특히 세월호가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남자 승객이 여성을 먼저 구조선에 태우는가 하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승객들이 서로 손을 잡아 끌어주는 영상이 잡혔다.

박씨는 16일 오전 사고해역으로부터 40㎞ 떨어진 해남과 진도 사이의 마로 해역에서 불법어업 단속을 하던 중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박씨의 단정이 파도를 헤치고 세월호에 가까이 다가서자 이미 공중에는 헬기 2대가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었고, 세월호 주변으로 4~5척의 선박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멀리에서도 많은 배들이 구조를 위해 달려왔다.

단정은 먼저 배 맨 후미 쪽에서 구조물 사이에서 버티고 있던 머리가 짧고 군대에서 지급하는 상의 내의인 일명 ‘깔깔이’를 입고 있는 승객 1명을 구조했다.

이어 뒤편 객실 쪽으로 접근해 2층 계단에 넘어져 있는 1명을 더 구조했다. 그러자 위쪽 바닥에서 줄을 잡고 있던 한 승객은 오른손으로 안쪽 객실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단정은 바로 아래 칸에서 버티고 있는 승객 3명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맨 앞쪽에서 기다리던 남자 승객은 단정이 다가오자 뒤쪽 여자 승객을 먼저 태우고 난 다음에 자신의 몸을 단정에 싣는 ‘의로움’을 발휘했다. 뒤이어 승객 5명이 경사진 바닥을 미끄러져 내려와 세월호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주변에는 속속 10여 척의 넘는 선박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선박 후미 쪽에서는 더 이상 승객이 보이지 않았다.

박씨의 단정이 멀리 반 바퀴 돌아 다시 세월호 측면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2명이 바다에 빠진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들을 가까스로 태운 박씨의 단정은 다시 5층 난간 쪽으로 접근했다.

그 순간 난간에서는 구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승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족히 30~40여 명은 돼 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철제 구조물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고, 바다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다 구조되는 승객도 있었다.

연이어 다른 선박들이 다가가 승객들을 구조했다. 먼저 배에 탄 승객들은 기진맥진한 모습이었지만 뒤에 타는 승객들에게 손을 내밀고,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세월호는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승객들을 모두 구조할 무렵, 불과 몇 분전에 보이던 5층 측면 난관은 어느새 물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초기촬영 21분 동영상 단독입수’… 해경보트 한 척뿐

 (문화일보  2014년 04월 29일(火)

생존자 174명중 해경 구조자는 절반 뿐

 

▲ 사투 여객선 진도 침몰 참사가 발생한 지난 16일 오전 10시 19분에 촬영된 동영상에서의 긴박한 모습.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가운데 바다로 뛰어든 학생 등 탑승객들이 어선과 고무보트 등에 구조되려고 필사의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동영상은 전남도 어업지도선 201호 항해사 박승기(44) 씨가 촬영한 것으로 문화일보가 단독 입수했다. 동영상 캡처
동영상 보기



침몰 중인 여객선 세월호 승객 구조에는 모두 5척의 어선이 동원됐고,이중 해양경찰이 활용한 핵심 구조장비는 사실상 7인승 고무보트 1척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헬기 2대가 동원됐으나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100t급 경비정(123정)도 세월호 좌현이 침몰한 후에는 구조된 사람을 옮겨태우는 용도 외에 쓸모가 없었다. 500명 가까운 승객을 구조하겠다고 나선 해경이 어처구니 없는 대응을 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구조된 생존자 174명 중 해경이 구조한 인원은 절반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남도 어업지도선에 딸린 단정 2척과 민간 어선 2척이 구조한 것으로 파악됐다.

문화일보는 29일 사고 당일인 지난 16일 오전 10시 4분부터 10시 25분까지 전남도 어업지도선 201호 항해사 박승기(44) 씨가 촬영한 21분36초 분량의 동영상을 단독 입수, 이 같은 사고 당시 장면을 확인했다. 이 동영상은 박 씨가 201호에 딸린 단정(최대 15∼16명 승선)의 키를 잡고 세월호 승객 구조활동을 벌이면서 자신의 헬멧에 부착된 캠코더의 자동촬영기능으로 찍은 것이다.

동영상과 박 씨의 말을 종합하면 이 시간 승객 구조에 참여한 배는 해경 123정에 딸린 7인승 고무보트 1척과 전남도 어업지도선 201·207호 단정, 어선 피시헌터호와 태선호 등 모두 5척뿐이었다. 13분 동안 어업지도선 단정 2척이 구조한 승객은 50∼60명, 어선 2척이 구조한 승객은 45명으로 전남도에 보고됐다.

 박 씨는 “해경이 건진 승객을 지도선 단정과 어선에 옮겨 태우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며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80∼90명은 해경이 아닌, 나머지 4척이 구조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동영상에는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침몰(10시 21분)하기 8∼9분 전쯤 선미 쪽에서 40여 명이 우르르 몰려왔고, 침몰 5분 전쯤 물에 잠겼던 우현 쪽에서 40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또 동영상에 따르면 201호 단정이 세월호에 접근해 구조활동을 벌인 것은 오전 10시 8분부터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완전 침몰한 10시 21분까지 약 13분간에 집중되고 있다.

박 씨는 “5척이 앞다퉈 물에 빠진 승객들을 구조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긴박했던 구조 순간… 침몰 8~9분전 선미에 40여명이 구조 기다려

 (문화일보 2014년 04월 29일(火)

 

지난 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침몰하기까지 13분간(오전 10시 8∼21분) 구조활동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당시 아찔했던 구조 순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9일 전남도 어업지도선 201호 항해사 박승기(44) 씨가 촬영한 동영상에 따르면 201호 단정이 사고 당일 세월호에 근접했을 때 이미 배가 70도가량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때부터 배가 선수만 남긴 채 침몰하기까지 1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13분 동안 구조된 승객은 어업지도선 단정 2척과 민간 어선 2척에 의한 80∼90명(최소 추정치)과 해경 고무보트에 의한 수십 명을 포함해 전체 구조자(174명) 중 3분의 2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세월호 침몰 8∼9분 전쯤에는 선미에서 40여 명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미에서의 구조작업에는 해경 고무보트와 어업지도선 201호 및 207호 단정, 어선 1척이 참여했다. 박 씨는 “다른 3척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떨고 있는 승객들을 구조했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더 극적인 구조는 배가 침몰하기 5분 전쯤에 이뤄졌다. 뒤집어지고 있는 배의 우현이 물에 닿은 직후 우현 쪽에서 갑자기 많은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던 것. 박 씨는 “어디서 이렇게 많은 승객들이 한꺼번에 나왔는지 기쁘면서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고 했다.

우현의 난간에 매달려 손을 내밀고 아우성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구조선을 보고 물에 뛰어드는 남자 승객도 눈에 띄었다. 때마침 배를 댄 피시헌터호의 뱃머리를 잡고 기어오르려는, 학생들로 보이는 승객도 많았다. 박 씨는 “2척은 몇m 떨어진 곳에 있었고, 승객이 몰려나왔던 우현 쪽에 해경 고무보트와 201호 단정, 피시헌터호 등 3척이 있었다”며 “우현 한쪽의 좁은 공간에서 구출해낸 승객은 해경 고무보트 6∼7명, 201호 단정 11명, 피시헌터호 13명으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조를 했던 다른 2척을 포함하면 구조인원은 당시 우현 쪽에서만 4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201호 단정은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자 주변 해역을 맴돌다가 구명동의를 입은 채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고교생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구조하기도 했다. 박 씨가 구조를 위한 정확한 지점에 단정을 대자 단정의 한 요원이 밧줄을 카우보이처럼 멋지게 던져 잡게 하는 장면도 이 동영상에 담겨 있다.

피시헌터호 선장 김현호(47) 씨도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우현이 물에 닿은 후부터는 배가 순식간에 넘어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가 마을 후배 김준석(40) 씨의 어선 태선호와 함께 구조한 승객은 45명으로 전남도에 보고돼 있다.동영상에는 두 김 씨가 펼친 필사적인 구조활동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현호 씨는 “나도 대학생, 고교생, 중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학부모이고 배를 타는 사람”이라며 “침몰 사고 소식을 듣고 어떻게 구조하러 가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며 자신의 공을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때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르고 마음이 아파 지금도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밀랍인형같은 아이들… ‘엄마보러 가자’ 하면 알아듣는 듯”

시신 22구 인양 산업잠수부 이상진씨

 (문화일보 2014년 04월 30일(水)

 

“얘들아 올라가자, 올라가자. 이렇게 말하면 선체에 끼어 있던 아이들이 거짓말처럼 선체 밖으로 나와요. 부모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듯해 가슴이 미어집니다.”

 민간 잠수부 이상진(49·사진) 씨는 문화일보와 가진 단독 전화 인터뷰에서 세월호 침몰 현장 상황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씨는 여객선 진도 침몰 참사가 발생한 뒤 계속된 수색작업에서 총 22구의 시신을 수습해 부모의 품에 안겨줬다.

현재까지도 바지선 위에서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이들의 시신이 경직된 상태에서 가구나 현창(창문)에 끼어서 잘 나오지 못할 때는 물리력으로 조심스럽게 빼내야 한다”면서 “그때마다 ‘애들아 엄마 보러 올라가자, 올라가자’라고 말하면 거짓말처럼 시신이 수월하게 빠져나온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마다 마치 아이들이 말을 알아듣는 듯해 물속에서 울컥했던 순간이 많다”고 말했다.

이 씨는 “수온이 낮아 시신 부패가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물에 오랜 기간 있었던 만큼 살갗이 많이 부어 있다”면서 “부모들에게 최대한 상처 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시신을 팔로 감싸안고 조심스럽게 물 위로 올려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촉감으로 시신을 확인하는데, 아이들의 발이나 손 등 살결이 느껴질 때마다 경험이 많더라도 머리가 쭈뼛 선다”면서 “특히 시신이 3∼4구씩 모여 있는 격실에 진입해 밀랍인형 같은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할 때는 참담한 기분에 눈물을 쏟는다”고 토로했다.

고통은 물속이 아닌 물 밖으로 나와서도 이어진다. 그는 “바지선 위에서 대기하거나 잠을 청할 때에도 아이들의 잔상이 머릿속을 맴돌아 꺽꺽 소리내 운다”면서 “모든 잠수부가 내 자식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20세 때 처음으로 잠수를 배워 잠수 경력만 30년 가까이 된다. 지난 19일 오후부터 구조활동을 시작했다.

실종자 가족 면담을 위해 뭍에 한 번 올라온 것 말고는 열흘 넘는 기간을 바지선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딱 한 번 뭍에 왔을 때 자기 자식도 좀 찾아 달라는 학부모들의 간절한 부탁을 들었다”면서 “나도 딸 가진 아빠 입장으로 단 한 명이라도 더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아이 품은 고교생, 부축한 아저씨… 침몰 2∼3분前의 ‘기적’

5세 지연양 안은 호진군, ‘파란 바지’ 40代 동수씨 위기 상황서 극적 탈출

 (문화일보 2014년 04월 30일(水)

 

▲  권지연 양을 안은 박호진(오른쪽 두 번째) 군이 김동수(오른쪽) 씨의 도움을 받아 세월호를 탈출하고 있다. ‘파란 바지의 구조자’로 불린 김 씨가 바닥에서 울고 있는 권 양을 데리고 나오다 박 군에게 넘겨주면서 세월호에서 탈출시켰다. 전남도 어업지도선 동영상 캡처

의로운 행동과 애틋한 사연 등으로 인해 이름이 귀에 익은 세월호 승객들이 실제 구조되는 모습이 전남도 어업지도선 201호 항해사 박승기(44) 씨가 촬영한 동영상에 생생하게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문화일보 4월 29일자 1·2·3면 참조)

30일 박 씨의 동영상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전 10시 18분쯤 세월호 우현의 일부마저 물에 잠기기 시작할 당시 우르르 몰려나온 40여 명의 승객 가운데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고교생과 이들을 부축하는 40대 남성이 보인다.

아이의 얼굴은 구명조끼에 가려 보이지 않고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와 파란색 신발만 눈에 띈다. 아이를 안은 고교생이 물에 잠긴 자신의 몸을 힘겹게 지탱하면서 201호 단정 요원에게 “애기 애기” 하고 소리치자 앞서 구조돼 단정에 있던 한 고교생도 “애기 애기” 하고 소리쳤다. 항해사 박 씨가 “애기부터”라고 하자 단정 요원은 아이를 건네받아 배 위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인계했다. 40대 남성은 아이를 안았던 고교생이 단정 위에 끌어올려지는 것을 본 뒤 자신은 혼자 힘으로 배 위에 올라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침몰하기 약 2∼3분 전이었다.

여자아이는 안타까운 사연으로 국민들을 울렸던 권지연(5) 양이고, 고교생은 안산 단원고 2학년 박호진(17) 군, 40대 남성은 화물차 운전기사로 세월호 선내에서 연결한 소방호스를 밧줄로 활용해 20여 명을 구조한 ‘의인’ 김동수(49) 씨다. 김 씨는 바닥에서 울고 있는 권 양을 데리고 나오다 박 군에게 넘겨주고 박 군을 부축하며 세월호를 탈출했다. ‘파란 바지의 구조자’로 알려진 김 씨는 201호 단정이 50∼60m 떨어진 해경 123정으로 다가가 권양을 옮겨 태울 때도 맨 마지막에 단정에서 내렸다.

  양은 아버지(51), 어머니 한모(29) 씨, 오빠(6)와 함께 세월호를 타고 제주로 이사를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 한 씨의 시신은 지난 24일 수습됐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생사불명 구조자에 대한 생생한 구조장면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오전 10시 25분쯤 어업지도선 207호 단정 요원들이 201호 단정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에서 의식이 없는 남자를 끌어올리는 장면이다. 그는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건네고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던 정차웅(17·단원고 2년) 군으로 파악됐다. 정 군은 단정과 해경 경비정 위에서 차례로 응급조치를 받고 헬기로 목포 한국병원에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