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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진회(秦檜) (중앙일보 2014.10.06 10:30)

[백가쟁명:강성현]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진회(秦檜)

 

충신이든 간신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뜬 구름 같은 세상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다 사라진다. 중국 민초들은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 1103~1142)를 구국의 영웅으로 받든다.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충무공 이순신 못지않다. 반면에 그를 모살한 화친파의 영수, 진회(1090~1155)는 매국노(大漢奸)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만고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서호(西湖) 가까이에 위치한 악비 묘 앞에 진회 부부가 상반신이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두 손을 뒤로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저마다 침을 뱉어서,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람들은 ‘회(檜)’라는 글자를 꺼려, 이름을 지을 때에 이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민들이 아침 식사로 즐겨먹는 ‘여우티아오(油條)’라는 간편한 음식이 있다. 반죽한 밀가루를 작고 길쭉하게 떼어내 기름에 튀긴 것으로, 진회를 증오하여 한 때 ‘여우짜휘(油炸檜, *기름에 튀겨 죽일 인간 말종, 진회)’로도 불렸다.

당시, 악비가 살해된 린안(臨安, 오늘의 항저우) 풍파정(風波亭) 부근의 분식 가게 주인들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진회 부부의 모양을 본뜨고 붙여서, 부부의 목을 비틀어 팔팔 끓는 기름 솥에 던져 튀긴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진회의 죄행은 음식 속에도 그 잔영이 남아, 일반인에게 영원히 저주의 대상으로 기억된다.

그는 정말 만고의 역적인가? 일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기에 앞서, 금과 화친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송 왕조의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송 왕조(960~1279)는 태조 조광윤 이래로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다. 문치주의는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와 ‘문약(文弱)’을 낳고, 국방력의 약세로 이어진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 티베트 계통인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여진족이 건립한 금(金, 1115~1234)은 번갈아가며 ‘약체’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특히, 송과 연합하여 요를 격파하고 북방의 강자로 등극한 금나라는, 남송? 몽고 동맹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장장 1세기에 걸쳐 송을 괴롭혔다. 눈엣가시 같은 금 제국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 반세기 만에, 남송도 동맹국인 몽고에 의해 붕괴됐다. 힘을 기르지 못하고 강대한 동맹국에 기댄 나약한 송 왕조의 비참한 말로다.

특히, 송나라는 예술적 천재, 휘종 대에 이르러 무능의 극치를 드러냈다. 1126년 말, 금의 침공을 받아 수도 변경(?京 현 카이펑 開封)이 함락되었다. 레이 황(황런위 黃仁宇, 1918~2000)이, <황제가 잡혀간 사건, 정강(靖康) 연간의 수치>에서 밝힌 것처럼, 금나라 6만 정예군의 기세에 눌려, 송의 100만 오합지졸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1127년 3월, 휘종, 흠종, 위(韋)태후, 진회, 문무백관 등 3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로써 북송(960~1127)은 종언을 고하였다.

1127년 응천부(應天府, 현 허난성 상치우 商丘)에서 휘종의 9남, 고종 조구(趙構)가 나라를 세웠다. 이른바 남송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정강의 변’ 이후 12 년 뒤인 1139년, 남송은 금에게 궤배(?拜)의 예를 갖추며, 신하국으로 전락하였다. 이 때 병을 핑계로 장막 뒤로 숨은 고종을 대신하여, 진회가 금의 사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화친의 결과로 휘종의 영구와 위태후가 귀환하였다.

1140년 금의 완안올술(完顔兀術)이 화약(和約)을 깨고 송을 침략하였다. 올술은 이전에 이미 악비 군대에 대패한 후,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악비가 이끄는 ‘악가군(岳家軍)’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철수하였다.

‘악가군’은 개인이 조직한 군대(私家 軍隊)로 중앙군대를 능가하는 조직력과 엄격한 기율, 전투력을 갖췄다. ‘악(岳)’의 깃발아래, 악가군은 정저우(鄭州)와 뤄양(洛陽) 등 실지를 회복하며 파죽지세로 진군을 거듭하였다. 금나라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山易,?岳家軍難).”

이처럼, 악비는 금나라가 오금이 저리도록 두려워한 명장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얼어 죽더라도 민가를 훼손하지 말라. 굶어죽더라도 약탈하지 말라(凍殺不?屋,餓殺不打擄).”는 악가군의 철칙이었다. 악가군은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악비는 송 왕조 부흥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완안올술은 ‘악비의 목’을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하였다. 결국 진회와 고종의 공모로 악비의 병권을 박탈하고 반역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서른아홉의 아까운 나이였다. 1142년에 화약이 이뤄져 화이허(淮河 *허난성에서 발원, 강소성으로 유입하는 강)~ 따산관(大散關, 현 싼시성 陝西省 바오지 시 寶鷄市 부근)~친링산맥(秦?山?, 중국의 중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을 경계로 하여 금과 남송의 경계가 획정되었다. 북방의 방대한 영토와 예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며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진회의 이력과 행적을 훑어보자. 진회 관련 고사는《송사? 진회전》, 한여우산(?酉山)의《진회 연구(인민출판사,2008)》등에 전한다. 진회의 가계는 보잘 것이 없다. 부친은 작은 고을에서 현령을 지냈을 뿐이다. 진회는 강녕(江寧, 지금의 난징) 출신이다. 금이 건립된 해인 111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됐다. 자수성가형의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밀주(密州, 현 산동성 주청 諸城) 교수, 태학 학정(太? ?正), 예부상서 그리고 고종 아래서 20년 가까이 재상을 지냈다. 진회는 시문과 서예에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독창적인 서법을 구사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진회는 이른바 ‘송체(宋體, 일명 진체秦?)’의 창시자로 불린다.

‘정강의 변’ 때 잡혀갔던 진회는, 금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사촌 동생이자 실력자인 다란(撻懶)의 휘하에서 환대를 받으며 지냈다. ‘능굴능신(能屈能伸 *대장부는 상황에 따라 굽히고 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의 달인 인 것 같다. 호랑이 굴에서 나름대로 개인과 왕조의 생존(*실제로 진회는, 송 씨 왕조의 유지가 금에도 유리하다는 주장을 담은 서한을 보냈음)을 위해 능란한 처세술? 외교술을 펼친 것으로 이해된다.

1130년, 진회는 3년 동안의 억류 생활에서 풀려나 남송으로 돌아왔다. ‘친금주의자’로 변신하여, 금과의 화친을 내걸고 대대적인 주전파 탄압에 나섰다. 진회는 왜 화친파로 선회하였을까? 아마도 두 황제와 고종의 생모 위 태후, 고관대신 등 요인들이 볼모로 붙들려 있는 상황에서, 강한 금의 군대에 곧바로 맞서기에는 송의 군사력이 열세라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66 세로 병사하기까지 진회는 금나라를 등에 업고 ‘실질적인 1인자’로 행세하였다. 그는 고종의 주변을 측근, 심복으로 배치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호신용 단도를 장화 속에 감추고 다녔으며, 진회가 사망한 후에서야 단도를 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영종(寧宗) 대에 들어 진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졌다. 추서됐던 작위가 박탈되고, 시호도 충헌(忠獻)에서 무추(繆醜 *얽을 무, 더러울 추)로 바뀌었다. 죽어서도 ‘추물’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두산 백과사전에 기술된 진회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유능한 관리로서, 균형적인 외교 감각을 발휘하였으나 간신으로 낙인이 찍혔다.”

간신 관련 저술에 정열을 기울여 온 김영수는, 보편적인 중국인의 시각에 한 발 더 나아가, 진회를 ‘구국의 영웅을 해친 중국사 최악의 매국노’, ‘초특급 간신’, ‘금과 내통한 첩자’로 규정하였다. 반면에,《4천년 중국사를 만든 중국인 이야기》를 지은 이나미 리츠코(井波律子)는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냉철한 현실 정치가”로 평가하였다.

남송은 진회 등의 노력으로, 금과 화친책을 유지한 탓에 왕조가 급전직하로 몰락하는 상황을 방지하였으며, 150여 년간 존속하였다. 그런대로 강남 일대의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렸다. 오히려 줄곧 송을 유린했던 금나라가 남송보다 반세기 앞서 붕괴됐다. 진회를 ‘매국노’로만 몰아가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 정부의 악비에 대한 평가도 바뀌는 추세다. ‘민족의 영웅’에서 ‘충성스런 군인’으로 그 격을 낮추었다.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도 엄연한 중국사의 일부라는 시각이 반영된 결과다.

계승범은《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에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현실성’, ‘보편성’, ‘역사성’, ‘책임성’에 입각해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준을 근거로 진회를 평가하자면, 재상으로 집정하는 동안 남송의 정권 유지와 안녕을 위해 나름대로 제 몫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예리함을 감추고 은밀히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관점에 비추어, 결사항전에 나섰던 악비는 절대 선이요, 화친정책을 폈던 진회는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진회의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끝-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악비와 진회 - 중국 중세의 민족영웅과 매국노

[출처] 악비와 진회 - 중국 중세의 민족영웅과 매국노|작성자 무인불승

 

 

 

          목 차

 

    머리말

Ⅰ. 북송의 멸망과 미증유의 동란

Ⅱ. 악비 군단의 활약과 국가 보위

Ⅲ. 진회의 귀환과 권력 장악

Ⅳ.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

   맺음말

 

 

머리말

  1126년 말 북송 왕조는 여진족이 세운 금의 공격 앞에 대응다운 대응도 못한 채 멸망해 버렸다. 국가 멸망의 대가는 썼다. 수도 카이펑은 여진족의 약탈로 인해 초토화되었으며, 황제와 황족, 궁녀, 그리고 관료, 기술자 등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혀 북방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두고 지식인들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변란’이라고 말하였다. 여진족 침략자들은 수천 년 간 이어져 내려온 중국 문명의 파괴자라 여겨졌다. 중국 지식인들은 여진족에 대해 서슴지 않고 ‘짐승 같은 오랑캐’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채 20여년도 지나지 않은 1142년 봄, 북송을 멸망시켰던 여진족의 금과 북송의 후신인 남송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고, 또 금이 남송 정권을 인정하는 대신 남송측이 매년 막대한 물자를 바친다는 내용이었다. 북송의 멸망 직후 여진족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던 중국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런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까?

  이러한 사태 전개에는 여러 사람들이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악비(1103∼1142)와 진회(1090∼1155)이다. 악비는 무장으로 금의 남침을 저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진회는 문인 관료로서 재상이 되어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금과의 평화조약을 주도하였다. 악비는 진회가 추진하는 평화 조약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진회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민족의 원수 여진족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 악비와, 그를 죽이고 원수의 나라에게 고개를 숙여 평화 조약을 구걸한 매국노 진회...... 그들의 시대가 지난 이후 후세의 민중들은 악비와 진회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악비와 진회가 살았던 시대에 도대체 어떠한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악비와 진회는 어떠한 활동을 보였으며 또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들을 민족영웅과 매국노라고 한 마디로 단정해도 괜찮은 걸까? 지금부터 악비와 진회라는 두 인물을 키워드로 하여 12세기 초 중국 역사의 소용돌이를 살펴가기로 한다.

   

Ⅰ. 북송의 멸망과 미증유의 동란

  12세기에 접어들며 만주 평원에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였다. 저 옛날 말갈족이라 불리던 민족의 후예인 여진족이었다. 그들은 완안아골타라는 인물의 지도 아래 부족통합을 이룬 후 1115년 금이란 국가를 건설하였다. 금은 이후 남방을 향해 팽창을 계속하였다.

  금이 건국되기 전까지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국가는 거란족이 세운 요였다. 중국의 정통왕조 송은 요의 압박으로 인해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일부(연운십륙주)까지 요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만리장성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북방 민족 거주지를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요는 중국의 내지라 일컬어지던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은 요의 위세에 굴복하여 매년 막대한 물자(세폐)를 바치고 있었다.

  만주 일대에서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은 신속히 송에 전해졌다. 송측에서는, ‘그렇다면 여진족과 연합하여 요에 대한 원수를 갚자.’고 판단하였다. 송이 보낸 사자는 산둥 반도를 떠나 발해만을 가로질러 금에 도착하였다. 금으로서도 송이 내민 손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금이 세워지고 불과 3년 후인 1118년, 송과 금은 동맹을 체결하고 요를 남북에서 협공하여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연맹을 ‘송금 해상의 맹’이라 부른다. 바다를 통해 사신을 주고받은 끝에 체결한 맹약이란 뜻이다.

  이후 금은 맹약에 따라 요에 대한 공격을 착착 진행시켰다. 하지만 송은 약속대로 진군하지 못했다. 멸망 직전의 요에게도 패배를 거듭하였던 것이다. 결국 송이 진격하기로 했던 지역도 금이 대신 점령하였다. 송은 금으로부터 이들 지역을 넘겨받는 댓가로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했다. 요는 1125년 멸망하였다. 907년 국가를 세운 이래 약 220년만의 일이었다.

  요가 멸망하자 송은 생각이 달라졌다. 원수인 요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금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요가 사라지자 금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송은 금에 대해 견제와 도발을 지속하였다. 금 내부의 반란을 조장하고, 때로는 금에 저항하는 요의 잔여세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송의 배신은 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로 인해 송과 금 사이에 직접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금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향해 진격하였다. 송의 조정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황제인 휘종은 자기만 살겠다고 서둘러 황제 자리를 아들 흠종에게 물려주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금의 대군은 카이펑을 포위하고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과 북방 요충지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송이 어쩔 수 없이 이 요구들을 받아들이자, 금은 포위를 풀고 북으로 철수하였다.

  금의 대군이 돌아가자 송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대군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금에 대해 그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논의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송 조정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하여, 금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금에 대해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강경론을 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회였다. 송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남방으로 도망갔던 휘종을 다시 수도 카이펑으로 불러들였다.

  송의 태도변화는 금을 격분시켰다. 금은 즉시 재차 남하하여 카이펑을 포위하고 40여일만에 함락시켰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위시한 황족과 관료, 궁녀 등 수 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방으로 끌고 갔다. 이들 가운데는 진회도 들어 있었다. 수도 카이펑은 철저히 약탈되었다. 이렇게 하여 송은 960년 태조 조광윤이 나라를 세운 지 약 170년 만에 멸망하였다.

  송이 멸망하자 흠종의 아우인 강왕이 지방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송을 부흥시켰다. 그가 바로 남송의 첫 번째 황제인 고종이다. 남송에 대해 이전까지의 송을 북송이라 부른다. 금에 멸망되기 전의 송 나라, 즉 북송은 수도가 화북지방인 카이펑에 위치하였을뿐더러 화북과 강남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고종이후의 송은 남중국만을 지배하며 수도를 강남의 항저우(杭州)에 두었다.

  북송의 멸망과 남송의 건립을 전후한 시기, 화북 지방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질적인 민족인 여진족 군대의 행태는 중국인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불러 있으켰다. 금의 군대는 잔혹하여, ‘살인하기를 풀베듯 했다.’고 말해졌다. ‘여기저기 버려진 시신들이 풍기는 악취가 수백 리에 미쳤다.’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은 자신들 고유의 두발 습속인 변발을 강요하기도 했다. 훗날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국가 청조가 중국을 점령하고 변발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것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혼란은 화북 주민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화북 사람들은 금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리지어 남으로 이주해갔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화북의 주민 거의 전부가 강남으로 이주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때의 인구 이동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남방 이주였다. 이러한 대량의 인구 이동은 화북 지방의 앞선 문화가 남방으로 전파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강남 지방의 경제적 개발에도 큰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Ⅱ. 악비 군단의 활약과 국가 보위

  금은 카이펑을 함락시킴으로써 중국 전역을 점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종이 즉위하여 남송을 건립하자 재차 대군을 파견하여 남송정권을 박살내고자 하였다. 남송 조정은 금의 위협 앞에 무력하게 남으로 남으로 도망을 계속하였다. 1128년 2월 금의 급습으로 양저우(揚州)를 탈출할 때는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황제 고종의 주변을 불과 몇 사람만이 지킬 정도였다. 고종이 황망히 양저우를 빠져나간 직후 금의 기병대가 양저우의 고종 처소를 습격하였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고종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양쯔강을 건널 때에도 고종은 나룻배에 몸을 의지하여야 했다.

  1129년 2월 고종은 천신만고 끝에 항저우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금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말미암아 해상으로 탈출하여 1130년 정월에는 멀리 원저우(溫州)로 피신하여야 했다. 이후 고종이 되돌아와 항저우를 수도로 결정하는 것은 남송이 건립된 지 5년이 지난 1132년의 일이었다.

  이 무렵 남송 정권은 실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거침없는 여진족 기병대는 수시로 양쯔강을 건너 남중국 각지를 침공하였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남송 정권을 보위해낸 것이 바로 악비와 한세충을 위시한 무장들의 활약이었다.

  악비는 중소지주 가문 출신으로서 남송을 대표하는 장군으로 출세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때 악비의 출신을 두고 소작농이었다는 학설이 널리 유포된 적이 있다. 중국 대륙의 공산주의 역사학자들은 악비를 될 수 있는 대로 빈한한 계층 출신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소작농이라는 최하층 농민 출신은 아니었다. 그의 가정이 한때 남의 토지를 소작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 가세가 빈궁해진 때의 일이었다. 그의 부친은 수백 무(畝, 무는 대략 170평 정도)를 보유한, 결코 녹녹치 않은 지주였다.

  그러나 중소지주 가문 출신이라 해도 그가 대단히 이례적인 출세를 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욱이 그는 처음 군대에 투신할 때 말단 병사였다. 하급 장교 정도의 신분도 아니었다. 그러한 인물이 최고 무장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던 것은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서도 극히 희귀한 사례이다. 이처럼 놀라운 출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밖에도 남다른 성실성, 그리고 문무의 겸비라는 조건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휘하의 장병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전하는 기록 가운데는, 그가 일반 병사와 똑같이 숙식했다고 적고 있는 것도 있다. 송대의 병사들은 사회의 최하층민 가운데 하나였다. 한 번 병사가 되면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이나 어깨 등지에 병사라는 문신을 새겼다. 이러한 병사들에게 군단 최고의 장군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며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다는 것은 대단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악비의 군단이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며 연전연승했던 것에는 이러한 내부의 결속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한편으로 이처럼 강력한 내부 결속력을 지니고 있는 군단의 존재는, 국가권력측으로서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훗날 진회가 커다란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악비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요인 때문이었다.

  남송초 금의 침공에 맞서 남송을 지켜낸 중요한 무장으로 4 사람이 있다. 바로 악비와 한세충, 장준, 유광세가 그들이다. 이들 4 사람을 두고 전통시대의 지식인들은 ‘중흥의 4 장군’이라 불렀다. 북송 멸망 이후 남송정권을 보위해낸 4 사람의 장군이란 뜻이다. 이들 네 사람 모두 금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악비와 한세충이다.

한세충(1089∼1151)의 공훈 가운데 가장 혁혁한 것이 황천탕의 전투이다. 1129년 가을 금은 남송을 향해 대대적인 남침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의 대공세로 고종이 항저우를 탈출하여 멀리 원저우까지 피신하였던 것은 앞서 서술한대로이다. 금의 군대는 항저우를 함락시키고 각지를 전전하며 약탈을 거듭하다가, 1130년 3월 첸쟝(鎭江)을 통해 양쯔강을 건너 북으로 철수하고자 했다. 한세충은 이 길목에 지켜서서 금의 퇴로를 차단하고 나섰다. 금은 한세충 군대의 견제로 말미암아 20여일간이나 양쯔강 남쪽에 발목이 묶여 있어야 했다. 한세충의 분전은 금측에 심대한 위협과 타격이 되었다.

  악비는 이른바 ‘중흥의 4 장군’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장준(1086∼1154)에 비하면 17살이나 젊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장준 등의 부하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특출한 재능과 전공을 바탕으로 속속 승진하여 1133년 경 마침내 다른 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로 올라서게 된다.

  악비의 군사적 업적 가운데 가장 혁혁한 것은 1140년 금의 남침 때 있었던 언성의 전투이다. 이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조금 뒤늦으므로 그 상세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밖에도 악비가 세운 전공은 적지 않다. 그는 금의 남침으로 북송 정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무렵인 1126년, 24살의 나이로 군대에 투신했다. 그의 무인으로서의 자질은 곧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 카이펑 주변 지역의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수 차례의 전투에서 연이어 공을 세워서 하급 무관으로 발탁되었다. 북송이 멸망되고 남송이 건립된 이후에는 카이펑 일대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다. 남송 조정은 남방으로 도망가 화북지방을 사실상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악비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카이펑 일대를 지키는 부대에 배속되어 놀라운 활약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금의 압도적 무력 앞에 카이펑은 결국 함락되고, 악비 부대 또한 철수하는 송의 군대를 따라 강남으로 내려왔다. 악비가 무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는 금의 군대에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점차 자신의 독자적인 군단을 만들어갔다. 당시 금의 공격과 남송 조정의 도피로 말미암아 남중국 각지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퇴각하거나 도망친 병사들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으며, 무장한 도적 집단도 도처에 출몰하였다. 악비는 이들을 끌어 모은 다음 엄격한 훈련을 통해 오합지졸을 정예 병사로 탈바꿈시켜 갔다.

  1130년 봄 금의 군대가 남송에 대한 대공세를 마치고 북으로 철수하던 시기에도 악비는 커다란 활약을 한다. 황천탕 전투에서 한세충이 금의 군대를 곤경으로 몰아넣던 바로 그때의 일이다. 금의 군대는 양쯔강을 건너 철수하기 위해 건강부(오늘날의 난징)에 집결하였다. 남송 조정은 장준에게 철수하는 금의 군대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장준은 금의 군대가 두려워 감히 진격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악비는 독자적으로 금의 군대를 습격하여 대타격을 가하고 건강부를 탈환하였다.

  금은 1130년 북방으로 철수한 이래 한 동안 남송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였다. 남송측의 반격이 예상외로 거세었기 때문이다. 금과의 전투가 한 동안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악비와 한세충 등의 무장은 이를 이용하여 남중국 내부의 도적 집단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Ⅲ. 진회의 귀환과 권력 장악

  악비와 한세충 등의 무장이 금의 공격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있던 시기인 1130년 10월, 북송이 멸망한 다음 금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인물인 진회가 되돌아왔다. 진회는 남송 정권에 귀환하기 직전 금의 유력자인 달라(撻懶)의 휘하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달라가 남쪽으로 출진하였을 때 그를 수행하는 도중 탈출하였던 것이다. 진회는 아내와 시종들까지 데리고 탈출하여 무사히 남송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진회의 남송 귀환은 여러 가지로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달라 휘하에서 엄중한 감시를 뚫고 탈출했다는 정황도 애매모호하려니와, 적지 않은 인원이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금 지배하의 화북 지방을 감쪽같이 지나쳐 왔다는 것도 무언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진회가 말하는 대로 거듭된 요행의 결과였던 것일까? 훗날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금의 실력자 달라가 정책적으로 진회를 남송 조정에 돌려보냈다고 생각했다. 진회를 남송측에 보내어, 그를 통해 남송을 자신의 뜻대로 요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리송한 점은 또 있다. 진회는 북송의 멸망 직전 강경한 주전론자였다. 금에 대한 굴복을 반대하며, 금의 요구를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그가 남송초 북으로부터 귀환한 이후에는 완전히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금과의 전쟁을 반대하며 어떠한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금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송의 황제 고종은 진회를 만난 후 파격적으로 발탁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금의 내정에 밝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귀국한 지 4개월만에 부재상으로 승진하였으며, 그로부터 다시 6개월 후에는 재상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이례적인 발탁에는 고종의 의향이 중요한 작용을 미쳤다. 고종은 표면적으로는 북벌과 화북의 수복을 주장하는 무장들의 의견에 동조하였지만, 내심으로는 어떻게든 금의 침공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진회의 고속 승진은 짧게 끝이 났다. 금의 공격이 계속되는 긴박한 정황에서 주화론이 발을 붙일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상이 되고나서 1년만인 1132년 8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다시 정국의 중심으로 복귀하는 것은 1137년 1월로서 4년 반 정도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진회가 남송에 귀환하여 재상직에까지 승진하였다가 좌천되고, 다시 1137년 부재상으로 복귀하기까지 악비는 어떠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을까? 1130년 금의 군대가 북으로 돌아간 뒤 악비에게는 남중국 각지의 도적 내지 반란 집단을 토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남송 초 남중국 각지에는 걷잡을 수 없는 추세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황에 대해, ‘전국이 끓는 가마솥과 같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도 많은 반란이 일어나 그로 인한 전투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는 얘기이다.

  악비는 1131년 이래 각지에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을 벌였다. 악비에 의해 진압되는 반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종상∙양요의 반란이다. 종상∙양요의 반란은 1130년 2월에 발생하여 1135년 6월 악비에 의해 최종적으로 진압되기까지 5년 이상 지속되었다. 반란의 중심지는 양쯔강 중류 일대였다. 종상∙양요의 반란군은 강력한 수군을 편성하여 주변 각지를 신속하게 이동하며 약탈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송의 정규군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상태였다. 악비는 1135년 4월 토벌의 명령을 받자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여 순식간에 반란세력을 진압해 버렸다. 이 무렵 악비 군단의 엄격한 규율과 놀라운 전투력은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 시기 악비가 올린 전공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양양(襄陽) 일대의 수복이다. 1130년 금과 남송의 대접전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양측 사이에는 작은 규모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133년에 이르러 다시 금은 남송을 향한 대규모 공세를 취하였다. 이때의 전투에서 남송은 양쯔강 중류의 전략적 요충지 양양 지구를 빼앗겼다. 악비는 그 이듬해인 1134년 5월 북으로 진격하여 양양을 수복하였다.

  양양은 ‘중국 전체의 척추에 해당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 전략적 중요성은 훗날 몽골 제국이 남송을 멸망시킬 때 여실히 드러난다. 남송은 1235년 몽골과의 전쟁이 벌어진 이래 그 공격을 수십년간이나 효과적으로 막아냈지만, 1273년 양양을 빼앗긴 다음에는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와같이 악비가 중국의 여기저기를 누비며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을 때, 금과 남송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의 바람은 금측에서 시작되었다. 금의 태조와 태종은 형제였기 때문에 태조 계통과 태종 계통 사이에 심각한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1135년 태종이 붕어하고 태조 계통인 희종이 즉위하였다. 희종 아래서 실세로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진회를 정책적으로 남송에 돌려보냈던 달라였다.

  달라는 이전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화북지방의 지배를 포기하고 남송이 칭신한다는 조건 아래 남송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이러한 방침이 남송측에 전달되자, 애초부터 금과의 강화를 희망하였던 고종은 점차 대금 강경론자들을 실각시키고 주화론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1137년 1월 진회가 재차 부재상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진회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138년에는 재상으로 승진하며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이로부터 진회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는 시기가 펼쳐지기에 이르는 것이다.

  

Ⅳ.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

  진회는 재상이 된 후 적극적으로 금과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금과 남송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으며 강화의 조건을 절충하였다. 1138년 5월의 시점이 되면 두 나라 사이 강화 조약이 거의 성사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남송의 조야에서 강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터져나왔다. 악비와 한세충 등의 무장은 강화 대신 북벌을 주장하였다. 일부 강경한 관료들은 강화를 주도하는 진회를 처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강화 반대파들을 억누르며 진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하여 1138년 말엽이 되면 양국간 강화가 사실상 타결되었다. 남송이 금에게 칭신하고 그 대신 금은 화북지방을 남송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으로서, 달라가 애초 구상한대로 합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화 조건은 사실상 남송측에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이대로 강화조약이 체결되면, 금으로서는 칭신이라는 명분만 얻은 채 1126년 북송의 멸망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은 정변을 일으켜 강화의 주역 달라를 살해했다. 새로이 금의 정권을 장악한 세력들은 남송과 합의한 강화를 파기한 다음, 1140년 5월 대군을 파견하여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남송과 금은 다시 전면적인 전쟁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되면 남송의 군대는 금에 대해 대단히 효과적인 응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더 이상 북송의 멸망과 남송 건립 초기와 같이 금의 군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패주하는 나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금의 주력군은 전쟁 개시 한 달만에 남송측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1140년의 전투 당시 악비는 금의 진격로에서 상당히 비켜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금의 군대가 남하하자 악비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금의 영역인 중원을 급습하는 전략을 취했다. 악비 군대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1140년 6월 북진을 시작한 악비는 언성(郾城)을 점령하고 이곳에 본거지를 구축한 다음 뤄양까지 점령하였다. 악비는 진군을 계속하여 옛 수도였던 카이펑 인근까지 진출하여 수복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남송 조정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고종 및 진회는 금과의 강화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될 정도의 사태 전개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남송과의 전면전에서 패배한 이후 금은 무력으로 남송을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금측은 남송에 대해 새로운 조건의 강화를 제의하였다. 이전에 합의한 내용 가운데 화북 지방을 남송에 돌려준다는 조건은 삭제되었다.

  금의 태도 변화에 따라 진회를 중심으로 한 남송의 주화파도 다시 강화 정책을 추진해갔다. 그런데 강화를 체결하는 데 있어 중대한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악비를 위시한 무장들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점은 금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화를 추진하는 진회 일파에 대해, ‘남송이 아무리 강화를 원한다 해도 악비가 있는 한 성사될 수 없을 것이다. 악비를 죽이고 난 다음 구체적인 협상을 전개하자.’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악비 군단의 전투력은 당시 남송 군대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고 있었고, 악비의 존재는 금측에도 대단히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진회는 우회적으로 악비 군단을 무력화시키는 방침을 취하였다. 1140년 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 논공행상을 행한다는 명분으로 악비와 한세충 등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지방에 주둔한 군단과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악비와 한세충에게 중앙의 관직을 수여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악비 및 한세충의 군권을 박탈한 다음에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얼마 후에는 악비와 한세충에게 주어졌던 직책도 한직으로 바뀌었다.

  악비의 군권은 빼앗았지만 그래도 진회는 안심하지 못했다. 악비는 공공연히 진회의 강화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42년 9월, 진회는 모반의 혐의로 악비를 체포하였다. 물론 모반이란 죄목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었다. 한세충은 악비가 체포되자, ‘어디에 모반의 증거가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그러자 진회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그래도 모반의 정황은 아마 존재했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아마 존재했을 것이다.(莫須有)’라는 말은 훗날 두고두고 악비의 원통한 죽음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이게 된다.

  악비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모반의 죄목으로 1142년 말 처형되었다. 당시 악비의 나이는 불과 40살이었다.

  그리고 악비가 투옥된 상태에서 남송과 금 사이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남송 황제가 금의 황제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고, 또 금이 남송의 남중국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남송측이 매년 막대한 물자(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바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소흥의 화의’ 라고 부른다. 이로써 북송의 멸망 얼마 전부터 계속되어 온 송과 금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악비와 진회 사이의 경쟁은 이렇게 해서 진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악비는 진회의 음모로 처형된 반면, 진회는 금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오래도록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맺음말

  ‘소흥의 화의’는 남송측에게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남송이 언제까지나 금과 대치 국면을 지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금과의 군사적 대결 국면은 종식시켜야 했다.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권의 안정이나 민심의 진정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화조약의 체결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해도, ‘소흥 화의’의 내용은 남송측에 결코 유리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직전인 1138년경 일단 타결되었던 강화조약과 비교해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불과 4년만에 강화조약의 내용은 남송측에 훨씬 불리한 것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서 남송은 금에 의심의 여지없이 승리한 바 있었다.

  진회가 ‘소흥의 화의’의 체결을 서둘렀던 것은 사실 1140년의 전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1140년 전쟁의 과정은 남송측 군사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동시에 또 그것은 남송측 군사력의 구조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는 점 역시 선명히 확인시켜주었다. 남송의 군대는 몇 사람의 무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더욱이 그들의 부대 내부에는 지휘자와 장병들 사이 매우 끈끈한 사적 유대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러한 부대의 대표적인 존재가 악비의 군단이었다.

  남송의 조정과 진회로서는 국가권력을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악비의 군단과 같은 비정상적 부대의 정리가 시급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송의 여기저기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 군단의 해체를 위해서는 한시 바삐 금과의 전쟁을 종료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민족주의 지식이나 민중에게 있어 진회가 주도한 ‘소흥의 화의’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짐승 같은 여진족의 금나라에 머리를 굽히며 구걸한 강화조약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며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는 ‘영웅과 매국노’라는 구도로 정립되어 갔다.

오늘날 항저우의 서호 남쪽 기슭에는 악비의 사당이 있고 여기에 악비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그 묘소 입구에는 진회 부부의 철제 조각상이 있는데, 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 무릎 꿇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악비의 사당과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며 그들을 향해 침을 내뱉기도 한다. 지금에 이르도록 중국의 민중들에게 있어 악비는 남송초의 위기 국면에서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반면 진회는 금에 나라를 팔아 넘긴 매국노라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로 본 문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편, 2010) 

[출처] 악비와 진회 - 중국 중세의 민족영웅과 매국노|작성자 무인불승

 

 

 

진회(秦檜)는 왜 800년간이나 왜곡되었는가?

[출처] 110. 진회(秦檜)는 왜 800년간이나 왜곡되었는가?|작성자 새오늘

 

글: 노위병(路衛兵)

 

진회라는 이름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떠올리는 가장 많은 단어는 “간신(奸臣)”, “매국노(賣國賊)”, 충신을 살해한 소인배등일 것이다. 진회라는 두 글자는 거의 ‘민족쓰레기’라는 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역사상 진회의 ‘죄상’은 개략 세가지이다: 첫째는 구화매국(求和賣國)했고, 둘째는 항금영웅 악비를 박해했고, 셋째는 금나라의 간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고증해본 바에 따르면, 이 몇가지 역사적인 정설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진회는 사실 역사에 의하여 억울하게 왜곡되었다.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송금화의(宋金和議)에 관한 문제

 

쌍방의 군사실력: 진회가 매국노로 취급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금나라와의 화의를 극력 주장했다는데 있다. 당시 화의주장이 정확했는지 여부를 분석하기 위하여는 필자가 보기에, 이성적으로 당시의 형세를 분석해봐야 한다. 남송초기에는 나라를 세운 후 안정되지 않았다. 사회는 흔들렸고 불안했다. 군대의 전투력도 아주 약했다. 그러므로, 금나라와 싸우면 자주 패배했다. <<문헌통고>>의 기록에 따르면, “건염중흥(남송건국) 이후, 병력을 약하고 적은 강하여, 움직이면 패배했다. 그래서 귀퉁이에 웅크려 편안히 왕업을 유지하려고 했다. 장군은 교만하고 병사는 나태했다. 이는 군정이 엄숙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것이 당시 남송의 상황이다.

여진은 북방유목민족으로, 춥고 고달픈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고난을 견디고 상무(尙武)의 근성이 있어,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금사>>의 기록에 따르면, “장군들은 용감하면서 한 뜻이고, 병사들은 정예이면서 힘이 있었다.” 이것도 그다지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금나라가 아주 적은 병력으로 강성한 요나라를 무찌른 것은 이미 이를 설명해준다.

행군전투는 책을 읽고 노래하고 연극하는 것이 아니다.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는 남송의 대장 유광세의 부하인 여경의 말로써 충분하다. “(금나라 총사령관)이 친히 전장터에 나와서 전투를 독려한다. 화살이 날아다니는데도 왕은 갑옷을 입지 않고, 삼군을 지휘하는데, 아주 태연자약하다” 금나라사람들은 전투를 하면서 우두머리가 친히 일선에 나와서 지휘했다. 그렇다면 송나라군사는? “강남의 여러 장수들은 재능이 중급에 미치지 못한다. 매번 출병할 때마다 몸을 수백리 밖에 피해있고, 말로는 지중(持重)한다고 한다” 총사령관이 백리밖에서 지휘하는 이러한 “지중”으로 병사들에게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마음이 생기겠는가? 사기가 이러하니 쌍방의 강약이 어떠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다: 혹자는 금나라가 단기간내에 남송을 멸말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127년 정강지난이후, 금나라사람들은 북송의 수도 변경(지금의 개봉)을 점령한 후 흠종, 휘종의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서, 바로 퇴각했고,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장방창(張邦昌)을 괴뢰황제로 세웠다. 1137년, 금나라병사들은 장강일선까지 치고 내려왔다. 그러나 기세를 타고 남하하거나 그 자리에 주둔하지 않고, 다시 회군했다. 그리고 하남에는 유예(劉豫)를 황제로 세웠다.

금나라사람들의 이 두차례에 걸친 남하에서 알 수 있듯이,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킬 야심은 품지 않았다. 오히려 남송의 북진하려는 생각을 없애고자 했다. 그래서 두번에 걸쳐 하남에 황제를 세우고, 하남의 땅을 송과 금간의 완충지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렇게 남북대치를 유지하면서, 자신은 북방을 안심하고 경영하고자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원인때문이다. 첬재, 여진은 비록 전쟁에 능하지만, 부족이 늦게 일어섰기 때문에, 사람수가 많지 않았다. 전투의 목적은 그저 재물을 약탈하는데 있었지, 중국을 모조리 점령할 실력은 갖추지 못했었다. 둘째, 금나라의 후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요나라의 옛땅을 다스리는데만도 힘이 벅찼다. 그때는 이미 몽골도 흥성하기 시작했고, 서하도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해서 경영할 실력은 안되었다.

이상의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남송은 당시에 북방을 회복할 실력이 없었다. 금나라도 강남을 차지할 야심이 없었다. 화의는 쌍방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고, 대세의 흐름이었다. 진회가 당시 화의를 극력주장한 것은 당시 형세를 잘 파악한 현명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2. 진회의 화의에 있어서의 태도

 

진회는 처음에는 화의에 반대했다: 1126년, 금나라병사가 변경으로 진격하고, 송휘종에게 태원, 중산(지금의 하북 정현), 하간의 삼진(三鎭)을 할양해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원외랑이었던 진회는 조정에 4가지 의견을 제출한다: 첫째는 금나라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으니, 그들에게 연산의 1로만 주어야 한다. 둘째는 금나라사람은 교활하고 간사하니 방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백관을 소집하여 상세히 토론하여야 한다. 넷째는 금나라의 대표는 전각의 바깥에서 접견하게 해야 한다. 이를 보면 진회는 금나라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금나라가 “땅을 분명히 요구하며, 들어주지 않으면 변경을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황제는 할 수 없이 조정의 백관들을 불러 표결을 한다. <<이십사사찰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70명의 동의하고, 36명이 반대했는데, 진회는 반대한 36명에 속해 있다.

진회는 남송에 대하여 충성했다: 금나라삼이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울 때, 진회는 끝까지 반대한다. 글을 올려 다투었다. 진회는 그 글에서 장방창은 그저 먹고 마시고 놀줄이나 알고,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조정을 위기에 몰아넣은 인물이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진회는 이런 인간을 경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회의 송나라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진회가 매국으로 부귀영화를 도모했다는 말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진회는 금나라에 투항한 간첩인가?

 

진회는 어떻게 금나라에 갔는가?: 진회가 가장 의심받는 역사의 오점은 바로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포로가 된 것인가? 유수인 왕시옹이 무력으로 백관을 위협하여, 그들에게 장방창을 황제로 올리는 ‘위임장’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진회는 서명을 거부했다. 금나라사람들은 진회가 장방창을 황제로 세우는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를 휘종, 흠종황제와 함께 붙잡아서 돌아갔다. 진회가 포로로 잡힌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의늠름한 면모가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송나라황제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회는 간첩인가 아닌가?: 1130년, 금나라장수 다라이는 병력을 이끌고 회북의 주요도시 산양(지금의 강소 회안)을 공격한다. 이때 진회를 데리고 간다. 산양성이 함락된 후, 진회는 기회를 틈타서 도망친다. 그래서, <<송사>>에는 이렇게 썼다: 진회는 임안에 돌아온 후에 화의를 극력 주장했고, 재상의 지위를 훔치고, 권력을 독단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했다. 송나라사람들도 진회는 금나라에서 ‘화의’를 책동하기 위하여 파견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금나라는 강하고 송나라는 약하며, 송나라군대는 연전연패하고 있는데, 금나라가 화의를 하려면, 이렇게 복잡하게 우회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을 남송에 보내어 ‘잠복’시킬 필요가 있을까? 송나라가 뭐가 무섭다고. 말도 되지 않는다. 둘째는 진회 자신이 어떻게 돌아간 후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줄 알고 있었겠는가? 진회가 간첩이라는 주장은 견강부회이다.

 

4. 진회가 악비를 모해하였다는데 관하여

 

악비의 이미지는 역사에 의하여 과장되었다: 악비의 위대한 이미지는 <<송사>>에서 자주 보인다. 사실 <<금사>>와 대조만 해보아도 금방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사>>에서 나오는 악비의 승전은 딱 한번 언성에서의 전투이다. 이것은 후세인들이 ‘언성대첩’이라고 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비는 2만명의 인마로 완안올술의 1만5천인마를 무찌른 것이지, 무슨 대전투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비의 혁혁한 전공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소설이다.

 만일 <<금사>>를 믿을 수 없다면, 중국고대의 송원 교체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마단림이 쓴 <<문헌통고>>에 나오는 평가를 보라: “장(장준), 한(한세충), 유(유광세), 악(악비)의 무리는 모두 평범한 무리이다. 기껏해야 내란을 막는 정도이고, 동남지방을 안정시킬 뿐이다. 여진을 만나기만 하면, 패하지 않으면 도망쳤다. 작은 승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오를 보충할만한 것은 못된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악비등이 패전을 한 것이 승전을 한 것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로 전설에서처럼 그런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악비전전>>에서 악비가 주선진을 대파하고, 800의 병사로 금나라병사 10만을 무찌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라도 믿지 않을 내용이다. 민족영웅은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악비의 이미지를 수립하려면, 진회를 극도로 폄하해야만 했다.

악비는 왜 피살되었는가?: <<문헌통고>>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영웅이라 자부했다. 유광세, 장준, 오개, 한세충, 악비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나라안에서 웅거했다. 군량미는 달라는대로 줬고, 전공은 그들이 말하고 싶은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이들이 달라고 했던 병사들의 녹봉은 실제 병사의 수보다 훨씬 많았고, 서로간에 교만하여 협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화의를 하려면 이들의 병권을 반드시 회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근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십이금패로 불러들인 내용이다. <<송사>>에는 조정에서 십이금패를 연이어 보내서 악비에게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오도록 지시한다. 악비는 분개하여 말한다: “십년의 공이 하루밤에 무너진다” 얻었던 모든 마을은 하루 아침에 날린다. 사직강산을 다시 중흥시키기 어렵도다.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를 보면 마치 당시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것같다. 그러나, <<금사>>의 기록을 보면, “되돌아간 군사가 몇 되지 않고” “여러 군대가 모두 궤멸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 중간에 차이가 크다는 점은 말하지 않더라도, 악비가 진충보국하려고 했다면 그가 보국하려는 대상은 남송이다. 그런데, 남송의 십이금패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석을 한다면 그저 악비는 병권을 놓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피살당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이상의 분석을 보면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진회는 사실 역사와 세상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진회는 800여년이나 억울하게 당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필연이었다. 진회가 평화회담을 주재하고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주었다. 이것은 당연히 굴욕스러운 일이다. 당시 사람들의 감정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의 사적을 과장하여 위안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당시에 이렇게 하여야 했느니 저렇게 하여야 했느니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사실을 따져야 한다. 그저 큰소리만 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출처] 110. 진회(秦檜)는 왜 800년간이나 왜곡되었는가?|작성자 새오늘

 

 

 

[분수대] 막수유로 악비 죽인 진회 … 중국 최고의 간신으로 남아 … 우리도 끝까지 책임 물리자

(중앙일보 2011.11.01 08:56)

 

‘아드 호미넴(ad hominem)’이란 말이 있다. ‘지성 또는 이성이 아니라 편견 또는 감정에 호소하여’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흔히 인신공격을 수식하는 말로 쓰인다. 논쟁에 있어 문제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대신 상대를 욕되게 하는 데 치중하는 행태 말이다. 따라서 그 초점은 사실관계가 아닌 악의와 과장에 맞춰지게 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함으로써 허약한 위치에 있는 논쟁자를 옹호하는 데 퍽 효과적이다.

 아드 호미넴이 동양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된 유명한 사례가 있다. 중국 남송 때 악비(岳飛) 대 진회(秦檜) 케이스다. 악비는 제갈량과 더불어 충절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관우와 함께 군신(軍神)으로 숭배되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는 금나라 군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뒀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 인기가 드높았다.

 하지만 강남으로 달아나 항주를 임시 도읍으로 삼고 있던 송의 귀족들은 악비가 눈엣가시 같았다.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서호의 풍광이나 즐기며 취생몽사하는 게 그들의 바람이었던 까닭이다. 진회는 가짜 성지를 만들어 악비의 병권을 빼앗고 소환해 죽였다. 결국 송은 굴욕적 화친조약을 맺고 금의 속국이 됐다. 나중에 무장 한세충이 진회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물었다. “도대체 악비에게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이오?” 이때 진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럴 만한 일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

 사람 사는 게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다. 못된 것 먼저 배운다고, 우리도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것이 이런 ‘막수유(莫須有)’식 흑색선전이요, 네거티브 인신공격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판에도 예외 없이 아드 호미넴의 잔해들이 수북이 쌓였다.

 하지만 이번에 좀 달랐으면 좋겠다. 아니 이제 달라질 때도 됐다. 그 쓰레기들을 차근차근 분리 수거해 잘못 버린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선거가 끝났다고 해서 흐지부지 끝낼 일이 아니다. 양측이 고소·고발한 사건들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아마 있었을 일’이 아니라 ‘없는 일’이라면 그 책임을 단단히 물어야 한다.

 악비는 나중에 복권돼 악왕(顎王)으로 추존됐다. 하지만 진회는 막수유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으로 등극한다. 오늘날 악비의 묘에 가면 진회가 결박된 죄인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지금은 막아놨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회의 동상에 침을 뱉고 발로 차는 것이 관광코스였다고 한다.

 오늘날 막수유를 흩뿌린 사람들을 발로 차고 침 뱉을 순 없겠지만, 선거에는 승리만이 정의라는 명제가 더 이상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줘야 한다. 승자건 패자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