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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튀는 문제해결 방안/꼭 필요한 생활의 지혜

놔둬요, 그냥 빚더미에 살렵니다 (조선일보 2014.04.16 00:23)

 놔둬요, 그냥 빚더미에 살렵니다

[박근혜 정부의 서민부채 탕감 '행복기금' 왜 외면당하나]

- 빚 깎아준다는데도…거부
남아있는 탕감 대상 262만명 중 소득 없는 기초수급자 60% 넘어
대부분 50대 이상 중년·고령층… 남은 빚 갚을 의지도 능력도 없어

- 채권 추심 안되니까… 거부
행복기금, 이미 부실채권 사들여… 금융기관 독촉 안하니 '배째라 식'

 


	국민행복기금 채무자 특성 정리표

"제가 더는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왜 돈을 갚아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자식 부담 주기도 싫고….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여러 금융회사에 총 5000만원의 빚을 진 김모(70) 할아버지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상담원에게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7년간 연체해 연체이자만 3000만원이 쌓인 김씨는 국민행복기금이 금융사로부터 채권을 매입한 채무 조정 대상자 중 한 명이다. 전화를 걸었던 상담원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매일 100명가량에게 채무 조정을 하라고 전화하는데 이 중 응하는 사람은 10%가 될까 말까 해요. 그나마 주소와 연락처가 맞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고, 어렵게 연락이 닿아도 '빚을 갚기 어렵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서민 복지 공약으로 지난해 3월 출범한 국민행복기금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금융기관에 6개월 이상, 1억원 이하의 빚을 연체한 채무자에게 최대 70%까지 감면해주는 제도다. 국민행복기금은 최근 1년 만에 전체 채무 조정 대상자(287만명) 가운데 24만9000명의 채무를 조정하거나 약정 체결했다며 목표치(5년간 32만6000명)의 76%를 벌써 달성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이미 빚을 갚을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다 갚은 것 같다"며 "올해 목표가 30만명이고 앞으로 4~5년간 추가로 10만명을 더 구제하겠다는 계획이지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국민행복기금은 지금까지 어떻게 굴러 왔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채무 조정 대상자의 60% 이상은 소득 없는 기초수급자

국민행복기금은 지금까지 총 287만명의 부실채권을 여러 금융사로부터 매입했다. 이 가운데 24만 9000명이 국민행복기금의 도움을 받아 빚을 50%가량 탕감받고 나머지 빚을 갚고 있다.

이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부실 채권을 매입해 운영하던 '한마음금융' '희망모아' 상품으로 채무 조정을 한 178만명으로 이 중 8만1000명이 국민행복기금의 도움을 받았다.

또 한 부류는 지난해 국민행복기금이 여러 금융회사로부터 부실 채권 10조4000억원을 3.7% 가격인 3848억원에 새로 매입한 것에 해당하는 채무자 109만명이다. 이 중 16만8000명이 현재 빚을 갚고 있다. 이들 24만여명은 일정한 소득이 있고 사회 활동을 위해 빚 청산이 절실한 젊은 층이 많다. 전체의 60%가량이 20~40대 채무자들이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그렇다면 아직까지 국민행복기금 도움을 받지 않고 있는 남은 채무 조정 대상자 262만명은 어떤 사람들일까. 금융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이 중 60% 이상은 소득이 없는 기초수급자들이다. 또 소득은 있지만 빚을 갚을 정도의 여력은 없는 영세 자영업자나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소득은 있어도 빚을 갚을 의지가 전혀 없는 고령층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재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남아 있는 채무 조정 대상자는 주로 50대 이상의 중년 또는 고령층"이라며 "거의 채무를 갚을 의사가 없어 신용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국민행복기금의 도움을 받아 빚을 탕감받은 24만여명 중에서 빚을 갚지 않는 사람도 벌써 나오고 있다. 캠코 관계자는 "얼마나 채무를 상환받았는지 공개할 수 없지만 회수해야 하는 금액이 추정 목표치(연간 1500억원가량)를 밑도는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빚 독촉' 면제가 도덕적 해이 조장

국민행복기금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부실 채권을 매입한 순간부터 금융사로부터 채권 추심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채무자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있다. 국민행복기금 채무 조정 대상자인 자영업자 이모(50)씨는 "최근 국민행복기금으로부터 1000만원의 채무를 졌는데 500만원을 탕감해줄 테니 500만원만 갚으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오래전 채무를 굳이 무리해가며 갚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캠코의 한 관계자는 "채무자들로부터 '캠코에서 내 부실 채권도 매입해달라'는 전화가 많이 걸려 온다"며 "빚도 안 갚고 채권 추심도 받지 않겠다는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면 소득이 없어 빚을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딱한 사람들도 많다. 캠코는 국민행복기금 지원 자격이 되지 않거나 상환이 도저히 불가능한 채무 조정 신청자 1만6456명을 지난해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선택하도록 안내했다.

국민행복기금은 채무 조정뿐만 아니라 취업 지원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이들의 채무를 갚는 것을 독려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취업과 창업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1100여명을 지원했다. 캠코 관계자는 "안정적 소득이 있어야 빚을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서민자활지원부라는 부서도 신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빚을 갚을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국민행복기금 프로그램에 들어온 만큼 취업 지원 활동 등을 통해 얼마나 더 많은 채무자를 구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캠코 직원 1200명 중 60%가 직·간접적으로 행복기금 일에 매달리고 있다"며 "앞으로 할 일이 점점 줄어들 텐데 인력을 줄이거나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연 연구위원은 "정부가 (이 프로그램을) 빨리 정리할지, 계속 유지할지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국민행복기금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지난해 3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도입한 채무조정제도이다. 채무조정 대상자는 국민행복기금이 협약을 맺어 금융기관으로부터 매입한 연체채권 채무자들이다. 6개월 이상 연체된 1억 이하 채무자들에게만 채무조정 자격을 주며, 채무 조정 기간에는 금융사의 채권추심이 금지된다. 채무자의 연령, 연체기간, 소득을 고려해 최대 50%까지 원금을 탕감해주고 남은 금액을 최장 10년까지 분할상환할 수 있으며 연체이자는 전액 면제된다. 기초수급자 등 소득이 없는 특수채무자는 70%까지 원금을 탕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