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김 삿 갓

김삿갓

김삿갓

최종 확인 버전:


김삿갓 표준영정

Contents

1 시인
1.1 개요
1.2 원인
1.3 발단
1.4 전개
1.5 절정
1.6 결말
1.7 여담
2 노래
3 소주
4 별명

1 시인

죽장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
- 명국환의 <떠나가는 김삿갓>(작사 김문응, 작곡 전오승)의 유명한 첫 대목 #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삿갓
- 홍서범의 <김삿갓> 중에서

1.1 개요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놀랍게도 안동 김씨의 일가였다. 그것도 세도정치기에! (그의 사망년은 정확히 고종 즉위년과 일치한다.)

김삿갓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

1.2 원인

김삿갓이 김삿갓으로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조부였던 김익순에게 있다. 홍경래의 난 때,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당시 선천 부사 5품 관료인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홍경래의 세력은 패하였고. 김삿갓의 이야기는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실록을 살펴보면 좀 복잡한 일이 있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후략)

순조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기사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왔기 때문에 비록 항복한 죄는 크지만 어느 정도 용서받을 수 있고 막장테크를 타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전략)“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기사

여기에 보면 스스로 투항해서 홍경래가 준 벼슬을 받은 것 뿐 아니라 수급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전말이 이러하니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순조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기사

다시 말해 항복한 것 때문에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수령의 목을 잘라온 것을 돈을 주고 사서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였으니, 그야말로 기군망상의 막장테크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벌을 받는게 당연한 일이다.

1.3 발단

조부의 죄는 그 대로 끝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수치에 병에 걸려 일찍 죽고 만다. 그래도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 김삿갓은 몰락하였어도 양반집 자제였고, 그것도 그 유명한 안동 김씨, 그 가운데도 성골급인 장동 김씨 일족이다. 이 점 덕분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조부 김익순을 사형한 걸로 일가의 죽음을 면한것이다. 덕분에 머리만큼은 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가 나이를 먹어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의 잘못을 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가며, 너는 역사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 급제 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어이가 없어진 어머니에게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고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답안을 적어내려갔던 것이다. 이에 큰 충격을 받아 4년간 집에서 폐인처럼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결혼했는데 아내가 절세미인이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 4대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뭐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랑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후에도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같은 양반들끼리 모인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버리자 허심탄회하게 놀던 양반들이 그를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사안이 된 것을 확인하자 결국 김삿갓은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포기하고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대략 이러하며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 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통탄하고 정가산(정시)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였다.

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1.4 전개

어쨌든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하였으나, 자신을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름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삿갓착용에 대한 다른 설들도 있다.

첫째로,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이었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출처: 이응수의 '풍자시인 김삿갓').

다음은 위와 관련하여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편역본 출처: 양동식의 '길 위의 시').

나와 삿갓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하늘을 보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삿갓을 쓴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조부 김익순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관직매매로 선천부사 직을 얻은 데다가, 단순히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조정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홍경래의 부하 장수의 수급을 취해서 임금에게 바쳤는데. 문제는 자기가 자른게 아니라 남을 시킨것이고 시켜놓고 돈 안주고 자기가 했다고 임금을 속인 것이다.(...) 그 덕에 기군망상과 모반대역죄로 참수.

이런 점을 보면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손자 낯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던 터라(...) 사실 그가 늙으막까지라도 기웃거렸으면 안동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이런 분위기는 철종대는 대세였던 분위기였다.

1.5 절정

죽을 때까지 방랑생활을 하면서 배고프면 훈장질을 하며 끼니를 때웠고(그 당시에 시간강사?!), 즉석시로 현 양반태세를 비판하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의외로 전국에 팬들이 많았다 전해진다. 특히 기생들 중 팬이 많았는데, 인물로 보는 조선사(김형광 지음/시아 출판사)라는 책을 보면 자신의 팬인 기생들과 잠자리를 가지고도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김삿갓의 시는 언어유희로 유명하다. 아래는 그 예들이다.

  • 쪼잔한 친구의 파자문을 풀어서 파자문으로 역공격을 한 일화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리까?"하고 묻자
그 친구가 "月月山山(월월산산)하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丁口竹夭(정구죽요)로구나 이 亞心土白(아심토백)아."
(다른 버전으로는 "丁口竹天(정구죽천)이구나 이 犬者禾重(견자화중)아!"가 있다.)
하고 가 버렸다.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 人良 卜一 = 食(밥 식) + 上(윗 상) = 밥을 올리다
  • 月月 山山 = 朋(벗 붕) + 出(날 출) = 친구가 나가다
  • 丁口 竹夭(혹은 天) = 可(옳을 가)[1] + 笑(웃을 소) = 가소롭다. 쉽게 얘기하면, 그냥 웃기구나.
  • 亞心 土白 = 惡(나쁠 악) + 者(놈 자) = 나쁜 놈
  • 犬者 (이미 개새끼란 의미지만..) 禾重 = 猪(돼지 저) + 種(씨 종) = 돼지 새끼
따라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된다.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하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가소롭구나나쁜 자식(혹은 돼지 새끼)아."
하고 가 버렸다.

위 시의 경우 人良卜一이 아니라 上人良이라고 써 있는 판본도 있다. 사실상 여러 판본을 통틀어 이본이 없는 것은 月月山山이 유일. 어떤 판본에서는 '정구죽천'을 김삿갓이 아니라 머슴이 외치기도 한다. 김삿갓이 밥을 얻어먹는 것을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판본마다 다르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자체가 김삿갓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의 네임드 문관 둘이라는 판본도 있다. 어찌되었던 내용은 위에 설명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 사멱난관(혹은 사멱난운)
許多韻字何呼覓 많고 많은 운자에 하필 멱자를 부르는가?
彼覓有難況此覓 첫 번 멱자도 어려웠는데 이번 멱자는 어이 할까?
一夜宿寢懸於覓 오늘 하룻밤 자고 못자는 운수가 멱자에 걸리었는데
山村訓長但知覓 산촌의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인심 고약한 시골 훈장이 식사를 청하며 찾아온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찾을 覓자 네 개로 운을 떼어 시를 짓게 하자 대답한 것. 김삿갓 이전에는 이 사멱난운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금강산에 가서 저녁에 어떤 절에 들렀는데 절에 있던 선비와 중이 자기들끼리 비밀 이야기를 나누며 김삿갓을 개매너로 대하다가 김삿갓의 말솜씨에 눌려 그 선비가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글 배틀을 걸었다가 역관광을 당한 일화
절에 있던 선비: 자, 내가 먼저 운을 띄울 테니 어디 한번 답해 보시오.
김삿갓: 좋습니다. 운을 띄워 보시오.
선비: 타!
김삿갓: 언문 풍월이오?
선비: 당연하지.
김삿갓: 그거야 간단합니다.
(속으로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선비: 그럼 해 보시오.
김삿갓: 사면 기둥 붉게 ! (혹은 '벌거타'(벌겋다)라고 표기된 판본도 있다)
(사방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어 붉게 보이는 것을 불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즉, 저녁때가 됐다는 뜻이다.)
선비: 또 타!
김삿갓: 석양 행객 시장!
(물론 여기서 '석양 행객'은 자신을 가리킨다. 직역하면 '해 질 무렵에 길을 가는 나그네'의 뜻.)
선비: 또 타!
김삿갓: 네 절 인심 고약!

운을 띄우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김삿갓을 보고 선비와 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 나오니 운을 더 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삿갓은 '지옥 가기 딱 좋'[2]라고 대답하기 위해 선비가 '타'라고 한 번 더 띄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선비가 GG쳤다.

  • 어느 서당에 들렸는데 제대로 대접도 안해주고 쫓아내니까 열받아서 썼다는 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내 일찍이 서당인줄은 알았지만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명도 못되고
선생은 와서 인사조차 않는구나.

의미만 보면 좋아보이지만(하지만 의미 역시 잘 생각해 보면서 읽어보면 서당을 은근히 까고 있다.) 이걸 발음해서 읽으면...

서당내조지.
방중존물.
생도제미.
선생내불알.

현대 기준으로도 심각한 욕이 막 쓰이고 있는데, 당시 조선의 언어생활과 이 시를 쓴 사람이 양반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김삿갓이 아주 제대로 열을 받았던 것 같다.

조선까지 갈 필요 없이 당장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보'라는 말마저 당당히 욕설의 일종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생식기를 주제로 하는 욕설은 거의 상대와 관계를 끊을 생각을 하고서야 쓸 수 있었다는 듯. 물론 민중들의 대사(예를 들면 봉산탈춤이라든지)를 보면 욕설이 난무하는 것이 그다지 드문 표현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를 지은 사람도 양반이고, 시에서 풍자하는 대상도 서당의 훈장이니 역시 양반이라는 것. 김삿갓이 평민이기만 했어도 멍석말이 한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문학적으로는 양반임에도 민중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을 듯. 본격 언어유희.

더불어 조선시대 욕과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기도 한데, 현대에도 그렇지만 욕이나 비속어가 기록된 기록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과거의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다. 조선시대 시사대담

(김삿갓)
毛深內闊 모심내활
必過他人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반드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도다.[3]

(처녀)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라고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져요.

물은 사람이나 대답한 사람이나

  • 김삿갓의 "연유삼장(嚥乳三章)"을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소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1장 一章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則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2장 二章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則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3장 三章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則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시아비가 그 위를 삼키고, 며느리가 그 아래를 삼키니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시아비가 그 둘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하나를 삼키니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시아비가 그 단것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신 것을 삼키니
단것과 신것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커억... 이런 시를 쓴 이유는 김삿갓이 방랑시절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위해 찾아간 집의 주인이 며느리가 유종을 앓아 젖을 빨아야 되기 때문에 재워 줄 수 없다하여 이 시를 읊어 놀렸다는 설과, 아비 父가 아니라 사내 夫를 써서 방랑 중 건달패들과 함께 놀다가 패거리들이 원하는 음담패설 시를 지어 웃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사내들 중 하나가 아내가 유종을 알아 젖을 빨아줘야 한다는 걸 놀림받고 있던 걸 기억하고 지었다는 것. 어느 쪽이든 69자세로 비틀었다.

  • 유명하지는 않지만, 함경도에서 어떤 부자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술 좀 달라고 했다가 되려 푸대접을 하니까 이런 시를 써서 부자들을 화나게 하기도 했다.
日出猿生原 일출원생원.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黃昏蚊簷至 황혼문첨지.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해 뜨자 원숭이가 마당에 나타나고
고양이가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저녁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이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 대네.

역시나 언어유희가 잘 두드러지는 작품. 각각 성이 원생원 = 원숭이, 서진사 = , 문첨지 = 모기, 조석사 = 벼룩으로 치환된다는 언어유희를 이용한 것이다. 한자의 뜻을 모를 리가 없는 부자들은 그 시를 읽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도 썼다.
宣化堂上宣火黨 선화당선화당.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함경도.
趙岐泳家兆豈永 조기영조기영.

선화당에서 화적같은 정치를 행하고
낙민루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이 가문이 어찌 오래 가리오?

당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로 선화당, 낙민루, 함경도, 조기영의 한자 훈을 바꿔서 언어유희로 시를 지었다.

  • 풍자대상은 불분명하지만 이런 시도 지었다.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
四十村中五十食 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기유칠십사
不如家歸三十食 불여가귀삼십식

스무 나무 아래에 서러운(서른) 나그네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 밥이네
사람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설익은)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

또한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두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도이 옳지 않으며
(是是非非非是是)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是非非是是非非)

그른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是非非是是非非)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是是非非是是非)

시가 아닌 언어유희 중에도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머슴이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김삿갓이 잡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하니 사람이 죽어 부고를 쓰러 간다고 했다. 김삿갓이 자기가 글을 아니 써주겠다고 하고 쓴 것은 유유화화(柳柳花花). 버들 유, 버들 유에 꽃 화, 꽃 화다. 글을 모르는 머슴은 고맙다고 하고 받아갔다. 저 뜻은 버들버들 떨다가 꽃꽃해졌다.(...) 즉 죽었다.(...) 머슴 불쌍해요. 고인드립까지 일삼는 김삿갓... 유화(1번 항목)가 이걸 보면 어떤 기분일까.

아무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이다. 역사서에 적혀있기는, 아들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통 아무 마을이나 랜덤(…)으로 돌린 모양이다. 그런 편지도 잘도 받은걸 생각하면 인기가... 그리고 아들 포함한 집안 사람들이 몇 번 데리러 오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거나 하고서 도망쳤단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 40 먹어서 힘들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하여 냉대받는 집안 현실 때문에 또 방랑생활 시작.

1.6 결말

결국은 외지인 전라남도 화순 동북면 동복리에서 사망했는데, 그나마 거지 꼴이 아닌 잘 알던 이 집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도 뭔가 가련한 느낌을 준다.

"안 초시(자기 마지막을 돌보던 인물) 춥구려. 이제 잠을 자야겠으니 불을 꺼주시오…."

뒤에 어머니가 보고싶소라고 했다고 한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사시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사망 소식을 들은 아들이 직접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진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완전한 막장 테크 크리 + 죽어서도 결국 아들이 멀리까지 나가 데려와야 하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양반귀족과 유교를 중시하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조부는 역적으로 죽고 자기는 출세길까지 막혔으니...그냥 자포자기 심정일 듯.

그래도 사후에는 워낙 유명해져서 임금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삿갓 손자 되는 사람이 절에서 스님으로 있었는데, 그걸 알게 된 임금이 일부러 궁으로 불러서 김익순 죄를 사해주고 관직을 내려주었다. 사실인즉 가문의 힘으로 복권된게 아닌가 한다. 이미 고종 즉위 이후라서 세도정치는 이미 쫑난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완전히 엎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유야 어떻건 두령의 목을 잘라왔으니 가문의 힘을 쓰면 복권이 가능하긴 했다. 또 당시에는 거지들이 김삿갓 흉내를 내면서 구걸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덕분에 이삿갓, 윤삿갓 하는 별의별 짝퉁들에서부터 어설픈 흉내를 내고자 시도 썼는데 역시 짝퉁들이라 실력은 영 아니었다고 한다...

1.7 여담

성황당,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1911~1991)이 소설 김삿갓을 쓴 바 있는데,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밖에도 80년대 후반,KBS에서 만든 교통안전 홍보 애니메이션에서도 김삿갓이 나오기도 했다. 이 애니에서 김삿갓을 노인들이 "여보시오. 삿갓 양반."이라고 불렀다.

멜랑꼴리를 그리는 천재(적으로 재미없는)작가 비타민이 뜬금없이 그에 관한 일화를 종종 올리는 걸 볼 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

왠지 은거기인이나 도사틱한 이미지가 있는데 이미지만 그럴 뿐 그저 방랑자. MBC 드라마 상도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오기도 한다.

이름의 특성 때문인지 국어나 문학 시간에 김삿갓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일부러 "김삿갓이" 이런 식으로 노려서 강조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만약 낄낄댄다면...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그의 일생을 <시인>으로 소설화시켰다. 이문열 최고의(혹은 마지막) 걸작, 이문열의 주변 문단이나 문학적 생애를 집대성했다. 스핀오프 작으로 도둑과 시인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건 현대문학상 수상작

윤승운 화백이 만화광장에 김삿갓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성인대상 작품으로 의외로 수작이다. 단행본은 연재때문에 못다한 김삿갓의 후손들 이야기도 넣었는데, 어떤 후손은 일제 연간에 합방 은사금 수령도 거부한다. 압권은 소주병이 가득한(!) 김삿갓의 묘 앞에서의 대사 "저는 만화를 그리는 윤가입니다" "옹야". 이 만화를 보면 왜정 때 일본인들도 김삿갓 무덤을 둘러보고 연구하던 사람도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어린이 버전으로도 상당히 두껍고, 거기에 김삿갓의 시를 다룬 해설까지 있어 대단히 괜찮은 책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왠만한 김삿갓의 야사나 시는 다 안다 싶을 수준의 수작.

언어유희의 달인이시다. 하지만 이문열은 이 시대의 시풍을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시절로 간주한다. 실지로 김삿갓의 작품사에서 이런 언어유희는 극히 일부이다.

비슷한 인물로는 해학으로는 정지윤(=정수동=정만서), 실존 인물이 아닌 이로는 봉이 김선달, 시대가 겹치는 인물로는 고산자 김정호가 있다. 다만 김정호는 실제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든 사람은 아니다. 심심해서 하는 드립이지만 로버트 리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남북전쟁(1863년) 때 대다수 인물들과 동세대다. 김삿갓은 그 해 사망했다.

2 노래

1989년에 가수 홍서범이 부른 노래 제목. 당연히 항목1의 인물을 소재로 부른 곡으로 한국가요 역사상 최초의 랩송으로 알려져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1992)와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1990)보다 앞선 랩송.

랩부분 중에 "김삿갓이삿갓이 김삿갓" 하는 부분이 있어 중고딩들은 아주 재미있어 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타자들이 응징하는 모 투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가사 내용은 항목 1의 인물 소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특별한 의의는 없다(?).

가사가 좀 고증에 안맞는 부분들이 있다.

  • 1807년 개화기에 태어나: 개화기라고 부르려면 강화도 조약이후에나 되어야지 이 시점은 개화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라고 해야 한다.
  • 20세 전에 장원급제했네: 뭐 이것은 예전에 김삿갓이 과거에 장원급제했는데 알고보니 할아버지를 욕한것이 되어버려서 충격먹고 삿갓쓰게 되었다라는 통설에서 나온거지만 현재 시점에서의 연구성과로 보면 김삿갓은 장원급제는 커녕 과거 급제도 한적이 없다.

3 소주

1996년에 보해양조에서 내놓은 소주. 소주 위의 소주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프리미엄 소주'를 표방하며 감미료로 을 집어넣고, 기존의 투명한 소주병이 아닌, 새카만 색의 전용 소주병을 사용하여 출시하였다. 당시 출고가(시장판매가가 아님)가 무려 1258원. 의외로 인기를 끌자, 진로의 '참나무통맑은소주', 두산경월(현 롯데칠성음료)의 '청산리벽계수' 등이 발매되면서 프리미엄 소주 시장을 이끌었지만, IMF의 철퇴를 맞고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근데 그래봤자 희석식 소주. OTL

4 별명

모치즈키 소카쿠의 별명. 그가 쓰고 있는 삿갓에서 유래했다. 주로 동네 오락실이나 문방구 게임기 등에서 이렇게 부르는 아이들이 좀 있었다.

임삿갓 때문에 김태훈의 별명이 되기도 하나...잘 알려진 사람이 아닌지라.
----
  • [1] '~~할만하다'란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뜻으로 쓰이는 것이 '옳다'란 의미로 쓰이는 것과 거의 비등비등하다.
  • [2] 당시의 한글 표기법은 중철 표기법, 예를 들자면 '사람을'을 '사람믈'로 부르는 것과 같다. 사실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나온 독자라면 국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은 이상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고1 국어에 나온다.
  • [3]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 그대로 패러디 된다.